강이슬의 커피코피해피 #8

1kg에 기대는 삶

글 : 강이슬 

난데없이 노트북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우스 포인터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제멋대로 움직이며 수도 없이 많은 창을 실행시키거나 종료시켰다. 곁에 있던 동료 작가들이 내 노트북의 심상치 않은 기세를 보고서 한마디씩 던졌다.

“바이러스 걸린 것 같은데, 메인보드 갈아야 할 수도 있겠다.”

“메인보드 바꾸면 다 날아가는데, 백업해뒀죠?”

“공포영화에서 이 장면 본 것 같은데, 귀신 들린 거 아냐?”


노트북 없는 나는 쓸데없다?!

차라리 귀신의 소행이기를 바랐다. 만약 그렇다면 싹싹 빌든지 성수를 뿌리든지 방울을 흔들든지, 하여튼 뭐라도 해서 귀신을 진정시키고 백업할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내 노트북에 귀신이 들렸을 리 만무했다. 정말 메인보드 고장인 걸까. 노트북에 협박이라도 당하는 사람처럼 항복 자세로 두 손을 들고 한동안 얼어 있었다.

노트북을 쓸 수 없게 된 나는 순식간에 아주 무용하다 못해 민폐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노트북이 없는 방송작가 이슬이는 함부로 말하자면 쓸데없다. 회의 도중 쉴 새 없이 자료를 찾고, 찾은 자료를 동료들과 메신저로 공유하고, 대본을 쓰고, 수정하고, 인쇄 버튼을 누르고, 촬영 허가 신청 메일을 보내고, 촬영 허가 메일을 받는 등 거의 모든 일에 노트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회사에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노트북님을 회사에 실어주는 가마꾼으로서 내가 회사에 딸려 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글 쓰는 이슬이는 방송작가 이슬이보다 훨씬 더 무거운 삶의 영역을 노트북에 의지하고 있었다. 글은 누가 대신 써줄 수도 없는데, 심지어 마감이 코앞에 닥친 지금, 노트북 없이 급한 글을 당최 어떻게 써야 한단 말인가. 무엇보다 그동안 쓰다 만 원고들이 별다른 백업 없이 바탕화면에 저장돼 있었다. 만에 하나 메인보드를 갈아야 한다면, 오, 하느님 제발 그것만은…! 마감 당일이 머릿속을 스쳤다.

‘담당자님, 진짜로 글을 거의 다 썼는데 노트북이 갑자기 미쳐서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바람에 작업이 다 날아갔어요.’

나 때문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의 노트북 때문에 매체에 글을 실을 수 없게 된 담당자의 난감한 표정, 그 담당자를 혼내는 선임, 그 선임의 책임자, 책임자의 기자회견 및 사퇴, 매체 독자들의 빗발치는 환불 요구와 국민 청원…. 현기증이 났다. ‘진짜 망했다’를 여러 번 되뇌며 노트북을 들춰 메고 바삐 응급실, 아니 서비스센터로 달려갔다.

“포인터가 제멋대로 움직여서 창을 30개도 넘게 켰다 껐다 그래요. 도저히 작업을 할 수가 없어요. 바이러스에 걸린 걸까요? 메인보드는 갈면 안 되는데, 혹시 급하게라도 백업할 수 없을까요?”

서비스센터 직원은 노트북의 증상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마우스 패드가 고장 났네요.”

“그럼 메인보드는….”

“패드 포함 키보드를 바꾸거나 패드 기능을 완전히 끄고 마우스로만 조작하셔도 돼요.”


1kg 공산품에 생계가 흔들리다니

마우스 패드 기능을 끄자 노트북은 거짓말처럼 정상 작동했고 동시에 내 심장박동도 정상 패턴을 되찾았다. 안도의 한숨을 여러 번 내쉬며 노트북을 가슴에 안고 지하철을 기다리는데 방금 전 1kg도 안 되는 공산품에 생계가 흔들렸다는 사실이 실감 나 오싹했다.

컴퓨터와 인터넷 덕분에 시간과 장소의 개념이 해체되면서 멀리 있는 사람들과 굳이 시간을 내서 대면하지 않고도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됐다. 정해진 시간 안에 많은 일을 빠르게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생활 전체가 흔들리기도 한다. 클릭 한 번으로 열리는 삶만큼이나 클릭 한 번에 닫히는 삶의 영역도 넓어진 것이다.

여하튼 고쳐진 노트북 덕분에 무사히 글을 마감했다. 노트북 고장으로 마감을 지키지 못했다는 변명을 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었다. 노트북을 덮으며 성공과 실패는 더 이상 종이 한 장 차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연결 차이가 더 맞는 말 아닌가.

글쓴이 강이슬은 〈SNL 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제6회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출판 계약을 하며 난생처음 갑이 됐다. 술과 개와 밤을 좋아하고 욕을 잘하지만 착하다.
어제도 오늘도 가난했고 내일도 가난하겠지만 가난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 2020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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