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슬의 커피코피해피 #5

책임감 있는 게으름

글 : 강이슬 

룸메이트 박과 3일을 붙어 있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여파로 우리 회사는 방역 및 폐쇄 조치됐고, 박은 무급휴가를 보내게 된 탓이다. 같이 산 지 햇수로 7년째인데 이렇게 3일을 내리 붙어 있었던 적은 처음이다. 박과 나는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서 확실하게 게을러지기로 다짐했다. 세상천지에 별의별 봄꽃이 다 피었다지만, 평일이라서 어떤 유명 음식점에 가도 줄 설 일이 없다지만, 우리는 자발적으로 집 안에만 갇혀 있으리.

봄나물 가득한 막걸리상, 봄은 봄!

“시간도 많겠다. 전이나 부쳐 먹을까?”

내 제안에 박이 바닥에 비닐을 깔고 버너와 프라이팬을 세팅했다. 그사이 난 전날 퇴근길에 사온 봄나물을 깨끗이 씻었다. 숙주와 쑥, 팽이버섯을 알맞게 썰고 칵테일 새우를 다져 넣은 뒤 부침가루와 달걀에 버무린 반죽을 박에게 건네는데, 문득 그의 요리 솜씨가 떠올라 걱정이 됐다. 박의 요리 실력은 좀 안타까운 편인데, 그가 만든 토마토스파게티는 어딘지 비주얼이 아귀찜 같고, 그가 만든 김치볶음밥에서는 한국에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외국인이 사진만 보고 열심히 흉내 냈을 법한 맛이 나기 때문이다. 부침개가 박의 손을 거치고 난 후에도 부침개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너, 잘 뒤집을 수 있겠냐?”

박은 명절마다 허리가 빠지도록, 손목 인대가 닳도록 전을 부쳤으니 이 정도 양은 껌이라며 받아쳤다. 그의 눈빛이 필요 이상으로 비장해서 더 못 미더웠지만 어쩔 수 없었으므로 박을 믿으며 다음 전을 준비했다. 알배추 이파리를 깨끗이 씻은 뒤 조금 질긴 뿌리 부분을 칼등으로 두드렸다. 달걀물만 입혀 부치면 근사한 배추전이 된다. 달래전 반죽을 박에게 건네며 동그랑땡 크기로 부치라고 일러줬다.

난 파전을 부치기 시작했다. 기름에 달궈진 프라이팬에 쪽파를 열 맞춰 가득 올리고 잘 개워놓은 반죽물을 부었다. 그 위에 냉동 해산물 믹스를 욕심껏 올린 뒤 청양고추를 송송 썰어 무심하게 뿌리고 달걀 두 개 풀어 올리면 냄새만으로도 막걸리 한 병이 순식간이다. 파전을 다 부친 뒤 박을 거들었다. 조금 식은 전도 손으로 대강 떼어 박 입에 넣어주고 중간 중간 식용유도 더했다.

“이러니까 꼭 명절 같네.”

박의 말에 키득거리며 “동서, 전을 아주 잘 부치네~ 손끝이 야물어” 했더니 박도 “형님, 형님” 하며 맞장구를 쳤다. 전을 다 부치니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박이 대강 치우는 사이에 남은 달래로 달래장을 만들었다. 가장 곱게 부친 전은 예쁘게 접시에 담아 달래장과 함께 윗집 주인 할머니에게 가져다드렸다. 집 안에서 먹기엔 날이 너무 좋아서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막걸리상을 차렸다. 마당 한편에 크게 자란 목련나무에서 커다란 꽃잎이 턱턱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고, 상 위에는 봄나물로 부친 전이 가득했다. 제법 봄 맵시가 났다. 박이 넓은 잔에 막걸리를 따라주며 말했다.

“기분 너무 좋아! 이거 먹고 영화 볼래?”

“그래 좋네. 뭐 볼까?”

“네가 골라. 영화 잘 고르잖아. 저번에 봤던 것도 재미있었는데. 그 뭐지? 달마와 루이스!”

“…델마겠지… 달마는 다른 분이야.”


각자의 자리에서 게으르고 바쁘고, 모두 책임감 있게

실없는 이야기로 한참을 웃었다. 박과 있으면 웃느라 하루가 반나절처럼 간다. 이런 식의 무해하고 귀여운 박의 빈틈들 덕분이다. ‘얘의 빈틈은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을까. 가만, 어쩌면 박은 빈틈으로만 꽉꽉 채워진 사람이 아닐까.’

“한잠 늘어지게 잔 다음에 저녁 해 먹으면 하루 다 가겠다.”

취기가 도는지 얼굴이 발그레해진 박이 말했다.

“그래, 저녁에 쑥 남은 걸로 된장국 끓여줄게. 배추도 좀 넣고.”

“좋다. 완전 먹고 자고, 먹고 자고네.”

나는 그거야말로 책임감 있는 어른의 모습 아니겠냐고 대답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책임감으로 누군가는 억지로 게을러지고, 누군가는 숨 막히게 바쁘다. 몸도 마음도 어수선한 봄이다. 다가올 여름은 무사한 모습이기를.

글쓴이 강이슬은 〈SNL 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제6회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출판 계약을 하며 난생처음 갑이 됐다. 술과 개와 밤을 좋아하고 욕을 잘하지만 착하다.
어제도 오늘도 가난했고 내일도 가난하겠지만 가난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 2020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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