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슬의 커피코피해피 #4

‘가진말’의 효과

글 : 강이슬 

아마도 천구백구십 몇 년도였을 것이다. 어느 겨울 날, 우리 가족은 설산을 오르고 있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목도리로 얼굴을 최대한 덮었지만 별수 없이 추위에 노출된 미간과 관자놀이는 띵했고 가파른 산길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엄마 아빠는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눈꽃이 핀 나무들을 보며 연신 감탄했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너무 어려서 그게 어디가 어떻게 아름다운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아빠 팔에 매달리다시피 의지해 걸으며 힘들고 지쳤다는 티를 온몸으로 냈다. 일 분에 한 번꼴로 아빠한테 어디쯤 왔느냐고 물었다. 아빠는 등산할 때면 산을 개미에 비유하곤 했는데, 이를테면 “지금은 개미 발목만큼 올라왔어” “지금은 개미 엉덩이야” “지금은 개미 눈썹까지 왔어” 하는 식이었다. 개미의 발톱과 종아리와 허리를 넘어 드디어 모가지에 당도했을 때, 이 정도면 정말이지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울수록 안 춥다고 하면 안 추워진다고?

“너무 추워. 추워서 한 걸음도 못 가겠어. 이제 내려가자.”

하산 길에 내 말을 들은 모르는 아저씨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아이고, 쬐-끔만 더 가면 정말로 정상인데! 쪼금만 더 가면 돼.”

나는 아저씨 말을 못 들은 체하며 내려가자고 거듭 고집을 부렸는데 사실은 빈말이었다. 어떻게 밟은 개미 모가지인데, 정상을 코앞에 두고 내려간단 말인가. 나는 그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다만 조금 영악했다. 아빠 등에 업혀 갈 심산이었던 것이다. 어쭙잖게 연기했다가는 꼼짝없이 정상까지 두 다리로 걸어야 할 것을 알았기에 필사적으로 추운 척 청승을 떨며 두 팔로 어깨를 감쌌다.

“딸,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마지막은 직접 걸어서 정상을 밟아야지 않겠어?”

“그렇지만 추운 걸 어떡해!”

“춥다, 춥다 하면 더 추워. 추울수록 하나도 안 춥다고 말해야 해, 그러면 정말 안 추워져.”

“추울 때 안 춥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잖아. 거짓말하지 말라면서!”

뒤에서 아빠와 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엄마가 말했다.

“이슬이한테 좋은 거짓말은 해도 돼. 그건 ‘가진말’이야.”

“가진말이 뭔데?”

“이슬이도 모르게 품고 있었던 힘을 꺼내주는 말.”

엄마는 마음이 넉넉해야 ‘가진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산에서 마음의 여유가 제일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엄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 그냥 빨리 올라와!”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린 동생이 성큼성큼 앞서 걸으며 한심하다는 듯 짜증을 냈다. 난 별수 없이 마저 걸어야 했다.

“작은 딸, 안 추워?”

엄마의 물음에 동생은 호기롭게 점퍼 지퍼를 열어 보이기까지 했는데 아주 꼴 보기가 싫었다.


마음이 넓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말

잠깐 걸으니 정말 정상이 나왔다. 아빠 등에 매달릴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민망할 정도로 금방이었다. 막상 올라오니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 아빠를 따라 ‘야-호’를 몇 번 외치고 기념사진도 여러 장 찍은 뒤 편평한 곳에 가방을 깔고 앉아 김밥을 먹었다. 살면서 먹어본 김밥 중 제일 차갑고 또 제일 맛있었다.

“김밥 진짜 맛있어. 꿀맛이야!”

“언니 바보야? 김밥이 어떻게 꿀맛이냐? 김밥 맛이지.”

동생의 논리적인 반박에 순간 멈칫했지만 빠르게 평정을 되찾고 대답했다.

“가진말이거든? 마음이 넓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어. 너는 아직 어려서 모르지?”

하산 길은 등산할 때와 다르게 별로 춥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엄마가 알려준 ‘가진말’의 효과 덕분인 것 같았다.

글쓴이 강이슬은 〈SNL 코리아〉 〈인생술집〉 〈놀라운 토요일〉 등 TV 프로그램에서 근면하게 일하며 소소하게 버는 방송작가다.
제6회 카카오 브런치북 프로젝트에서 《안 느끼한 산문집》으로 대상을 받고 출판 계약을 하며 난생처음 갑이 됐다. 술과 개와 밤을 좋아하고 욕을 잘하지만 착하다.
어제도 오늘도 가난했고 내일도 가난하겠지만 가난을 팔아 돈을 벌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가지고 있다.
  • 2020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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