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의 취향 (20) 칼국수

내 맘대로 고른 칼국수 맛집 best 4

© 셔터스톡
친할머니와 함께 산 시간이 더 길긴 하지만 지금 내 ‘취향’에 많은 영향을 준 분은 외할머니다. 오래전 할머니들이 그랬듯 딸은 출가외인이라 계절이 지나갈 때 한 번 보기도 어려워 그랬을까, 아니면 궂은 일만 시키다가 시집보낸 똑똑한 막내딸이 안쓰러워 그랬을까, 외할머니는 어머니와 나를 무척 아꼈다. 외갓집에 가는 날이면 배를 두둥실 포식할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먹을거리 취향의 원형에는 외할머니의 음식이 있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가마솥에 찐 옥수수. 할머니가 직접 밭에서 키운 옥수수를 따다가 가마솥에 푹 찐 옥수수는 여름이면 외갓집에 가자고 조르게 되는 마법의 음식이었다. 할머니가 끓여주던 뭇국이며 직접 빻은 쌀로 만들어낸 오곡밥도. 그중 가장 ‘할머니다운’ 음식은 슴슴한 칼국수였다.

할머니의 칼국수는 정말 할머니다웠다. ‘차분이’라는 이름대로였다. 차분한 할머니가 만들어준 칼국수는 차분했다. 별다른 장식 없이 멸치로 낸 육수, 손수 제면한 투박한 면, 멋없이 올려진 애호박 같은 고명이 전부. 양은 넘쳐, 못 먹을 정도로 양푼 가득 담아주셨다.

처음부터 할머니의 칼국수를 좋아한 것은 아니다. 어린 입맛에는 할머니가 손녀 온다고 사둔 햄 조각이 칼국수보다 더 맛있어 계속 그릇 밖으로 젓가락을 뻗곤 했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20년이 훌쩍 지나고서야 그 칼국수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되짚어보게 된다. 할머니의 손맛이 내 혀의 가장 끝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외할머니의 손맛이 갑자기 생각난 이유는 지난 주말 여행 중 국도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가로등도 없는 2차선 시골길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를 보고 하마터면 차를 세울 뻔했다.

어느 일요일, 할머니는 거의 처음으로 막내딸 집에 와 직접 지은 작물을 한아름 안겨주고 용돈까지 쥐어주고 갔다. 그리고 이틀 뒤 끔찍한 이야기를 들었다. 시골길 좁은 도로를 걸어가던 할머니를 술 취한 트럭이 치고 지나가버렸다는 것이다. 누가 그랬는지도 모른 채 숨을 거둔 후 발견된 할머니에 대한 응어리를 엄마는 지금껏 안고 산다.

문득 차 안을 돌아보니 살짝 잠들었거나 스마트폰을 쳐다보고 있는 친구들이 보였다. 친구 일곱 명과 함께 떠난 여행. 30대 중반, 각자 제자리를 잡은 탓에 어렵게 맞춘 일정이었다. 정류장마다 멈춰 가는 시외버스가 아니라 대여비 비싼 큰 승합차를 타고, 낡은 민박집과는 비교도 안 되는 방 세 개짜리 고급 휴양 시설에서 묵는 여행.

할머니가 떠난 20년 사이에 조금씩 어른이 되어, 둘도 없는 친구들과 여행을 왔다는 걸 할머니가 안다면 얼마나 기뻐할까. 겨울이면 유독 뜨거운 할머니집 사랑방에 발을 녹이고, 할머니는 “(놀다 온 여행도) 힘들었제?”라며 양손 가득 주전부리를 얹어줬을지 모른다. 손녀의 수다에는 적당히 대답하면서 칼국수 면을 칼로 써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할아버지칼국수
세상에 이런 가격이!
서울 중구 마장로9길 43-3

© 네이버블로그_dmgk32
메뉴는 단 하나, 3500원짜리 칼국수뿐이다. 노포(老鋪)들이 즐비한 황학동 곱창골목에서 유일하게 50년째 칼국수를 팔고 있다. 여러 매체에 소개돼 전국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정갈함을 중시한다면 좀처럼 발을 들이기 어렵다. 그만큼 낡고 허름하다. 이곳 칼국수는 어디에서나 봄 직하지만,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별다른 기교 없이 만들어낸 아주 평범한 국수는 옛 칼국수의 정석이다. 멸치 중심으로 낸 육수는 고추를 곁들인 듯 칼칼하면서도 간이 맞아 누구든 ‘시원하다’며 마실 수 있다. 면은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다. 반죽에 전분을 섞어 수제비처럼 투명하고 쫄깃한데, 손반죽이라 넓적한 것이 제멋대로 생겼다. 그 덕에 국물이 한층 더 잘 스며들어 육수와 함께 떠먹는 것 같은 맛을 낸다. ‘된장 아님’이라고 적힌 다대기는 맵다. 우선 넣지 않고 한 그릇, 다대기 넣어 한 그릇 먹어볼 것을 권한다.



성북동집
갈비마구리 육수의 담백함
서울 성북구 성북로24길 4 / 02-747-6234

© 네이버블로그_haneul88128
사골 육수 칼국수를 먹고 싶다면 추천한다. 가게 안 안내판에 따르면 이 집 육수는 ‘갈비마구리’로 낸다. 갈비마구리는 사람으로 따지면 척추·늑골 부위인데, 근육이 적고 대부분 연골과 뼈로 이뤄져 있다. 마구리로 낸 육수는 담백하고 고소하면서 고기 누린내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고기 육수의 눅진한 맛을 꺼리는 사람도 무난하게 먹을 수 있다. 이곳 면발 역시 손으로 밀어 만든다. 여러 번 밀어 쫄깃해진 면발은 뜨거운 사골 육수 속에서도 쉽게 퍼지지 않는다. 살짝 얹은 다대기에는 대파가 고춧가루에 버무려져 있어 자칫 심심할 수 있는 칼국수의 맛을 더해준다. 청양고추 다대기는 맛이 강해서 가장 마지막에 맛보기로 넣어 먹어볼 것을 권한다. 얼마 전 가게를 넓혀 옮겼는데도 주차가 쉽지 않다. 한 그릇에 만 원이라 비싼 편이다. 손만두도 유명해 곁들여 먹어도 좋다.



신숙
일본인 남편이 초록 칼국수를 만들면
서울 서초구 법원로3길 21 / 02-596-9295

© 네이버블로그_sunnyfint
칼국수에도 변화를 줄 수 있다면 이런 변화는 환영한다. ‘신숙’이라는 가게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으면 신주쿠다. 주인 부부 중 남편이 일본인이다. 그래서인지 신숙의 칼국수는 정통 칼국수에서 살짝 변형된 모양이다. 우선 면발이 특이하다. 해초가루를 넣어 반죽했다는 초록빛 면발은 우동면처럼 탄력 있고 감칠맛 난다. 멸치와 버섯으로 육수를 냈다고 하는데 일본에서 육수를 낼 때 자주 쓰는 가쓰오부시의 맛도 느껴진다. 칼국수 위에는 볶은 버섯과 고기, 애호박 고명이 올라가는데, 육수와 매우 잘 어우러진다. 보기 드문 초록빛 칼국수인데도 오래된 칼국수집 같은 깊은 맛을 느끼게 하는 일등공신은 곁들여 나오는 김치다. 김치 때문에 이 집에 온다는 사람이 많다. 오랜 단골이라면 처음 이 집을 찾는 고객에게 칼국수 한 젓가락에 김치 한 조각을 꼭 곁들여 먹으라고 권할 정도다.



엘림
방앗간에서 찧은 들깻가루가 걸죽~
서울 강북구 삼각산로 67 / 02-996-2583

© 네이버블로그_leaderjmk
방앗간에서 여러 번 찧은 들깻가루가 듬뿍 들어간 들깨칼국수집이다. 예전에는 칼국수나 수제비를 한 그릇씩 시킬 수 있었지만 지금은 둘을 합친 ‘칼제비’만 판다. 수제비나 칼국수면 모두 손으로 빚은 것이 드러나는 얼기설기한 모양새다. 톳과 함초소금을 섞어 만들었다는 면은 찰기나 굵기, 쫀득함이 조화롭다. 너무 쫄깃한 수제비는 먹을 때 육수와 면이 따로 놀기 마련인데 이곳 면은 그렇지 않다. 들깨를 듬뿍 넣어 만들지만 들깨 맛만 강조하지도 않는다. 간혹 어떤 들깨칼국수집을 가보면 들깨만 갈아낸 듯 진득한 국물로 나오는데, 그 경우 깨의 고소함보다 비린 맛이 강하다. 적당한 묽기의 ‘엘림’ 육수에 엄지척을 하는 이유다. 이곳 칼국수는 고추씨를 넣어 우려내 고소하면서도 시원하다. 푸짐한 상차림으로도 유명하다. 칼제비 한 그릇을 시켜도 수육 몇 점과 작은 보리밥 공기가 딸려 나온다. 배추김치에 칼국수까지 먹고 나면 한 상 배부르게 먹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 2020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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