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언니 은열의 회사생활 (19)

갑이 을이고 을이 갑이다

글 : 은열 

까칠언니의 한마디
성공 비결?
을(乙)의 생존법에서 찾아봐!
드디어 식사가 끝났다. 눈치를 보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말을 꺼냈다.

“계산, 제가 할게요.”

“….”

쿵. 침묵으로 대신한 A의 승낙을 ‘접수’하며 가슴속에서 뭔가 내려앉았다. 신용카드 명세서를 지갑에 꾸깃꾸깃 욱여넣고 돌아오는 길, 내내 뒷맛이 썼다. ‘아무렴, 뭘 바라. 내 신세가 그렇지!’


‘뭘 바라. 내 신세가 그렇지!’

A와는 업무상 가끔 엮이는 사이다. 엮인다,곤 하지만 그 대부분은 내 쪽에서 뭔가 부탁하거나 그의 부탁(처럼 보이지만 실은 꽤 강압적인 요청)을 들어주는 형태다. 그와의 첫 약속도 내가 먼저 제안해 성사됐다. 한 달여의 시차를 두고 날짜와 메뉴를 확정한 후 사흘 전 한 번 더 메시지를 보내 참석 여부를 재차 확인했다. 하지만 약속 당일, A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렵게 예약한 창가 테이블 좌석에서 홀로 20여 분을 기다리다 ‘늦어지면 음식을 미리 주문해놓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쩌죠,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네.”

당혹스러움과 민망함을 오물처럼 뒤집어쓴 채 혼자서 음식을 주문해 꾸역꾸역 먹고 나온 지 일주일쯤 흘렀을까, A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날은 정말 미안했다, 갚을 기회를 달라, 같은 식당에서 만나자, 밥은 내가 사겠다….”

고민하다 수락했고 결과는 앞서 쓴 대로다. 두 번째 식사에서도 식당 예약과 먼저 와 기다리기 그리고 계산까지 온전히 내 몫이었다.

요즘 내 일의 무게 중심은 상당 부분 A 같은 업무상 파트너와 식사 약속을 잡는 데 실려 있다. (대개는 먼저) 만남을 제안해 일정을 확정 짓고, 만나기 하루 이틀 전 약속을 상기시키며 상대의 음식 취향을 조사한 후 적당한 식당을 예약한다. 약속 시각에 5분쯤 먼저 도착해 ‘시그니처 메뉴’를 예습하는 건 기본. 상대가 도착하면 주문을 주도하고 음식이 차려질 때까지 시답잖은 농담과 근황 토크로 대화의 맥을 이어간다.

다행히 상대의 말문이 트이면 그때부터 미소를 장착한 채 경청 모드 돌입. 식사가 끝나도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 상대가 ‘커피 한잔’이라도 제안할 수 있으니. 그럼 잽싸게 주변 카페로 장소를 옮겨 줄을 서고 주문한 후, 진동벨을 움켜쥐고 대기하다 상대의 앞에 ‘바닐라라떼 샷 추가 얼음 적게’를 틀림없이 대령해야 한다. 물론 티타임에서도 미소와 고개 끄덕임, 적절한 추임새 탑재는 필수다.


갑을의 경계는 ‘실선’ 아닌 ‘점선’

고백하건대 업무가 바뀌며 새롭게 주어진 이 ‘미션’이 한동안 적잖이 고통스러웠다. 기꺼이 준비하고 때때로 즐기기까지 했던, 좋아하는 이들과의 식사 모임 준비와는 사뭇 결이 다른 작업 앞에서 종종 맥이 풀리고 피곤이 쌓였다. 매 순간 내가 ‘200% 을(乙)’이란 사실이 사무치게 다가왔고, 운 나쁘게 A와의 에피소드 같은 일을 겪기라도 하면 꽤 오래 자괴감에 허우적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십 수 년 전 썼던 기사 한 자락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처럼 ‘갑(甲)질’이란 말이 대대적으로 유행하기 전이었지만 2000년대 초반에도 갑과 을을 둘러싼 담론은 꽤 활발했다.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자기네 조직에서 누가 갑인지를 두고 격론을 벌였고, “을 중의 을은 바로 나”라며 앞다퉈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그 와중에 한쪽에선 갑을 행렬에 낄 엄두조차 못 낸 채 주변부를 서성이는 ‘병(丙)’과 ‘정(丁)’들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눈치를 살폈다. 그 난리통의 한가운데서 문득 궁금해졌다. ‘갑은 진짜 갑이고 을은 진짜 을일까?’

취재 결과는 흥미로웠다.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 중 의외로 을의 경험을 승화시킨 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갑으로 사는 행운아도 따지고 보면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세상이 정해놓은 갑을병정의 경계는 실선(實線)이 아니라 점선(點線)이란 것, 겉으론 불리해 보였던 을의 삶에서 의외로 ‘찐’의 경쟁력과 성공의 열쇠가 더 많이 보이더란 것. 그게 당시 내 기사의 결론이었다.

시간이 한참 흘렀지만 그때 내린 결론은 요즘도 유효한 것 같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는 (그게 전략이든, 진심이든) 고개 숙여 상대를 섬긴다. 상대의 마음을 자신 쪽으로 한 뼘 두 뼘 옮겨놓으려 최선을 다한다. 결코 쉽지 않고 종종 자존감을 다치는 그 경험치는 축적되면 의외로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분명한 건 세상 대부분의 갑은, 그를 갑이게 하는 울타리 안에서만 갑이란 사실이다. 누구나 언젠가는 자신을 둘러싼 울타리를 벗어나 홀로 서야 한다는 점을 떠올리면 ‘울타리 속 갑’처럼 나약하고 매력 없는 존재가 또 있을까?


‘울타리 속 갑’ 말고 ‘열정적 을’

10여 년 전의 내가 이미 내렸던, 하지만 꽤 오래 잊고 있었던 결론을 다시 마주하자 불쑥 힘이 났다. 그래서 요즘도 난 줄기차게 밥 한번 먹자고, 사람들을 졸라 약속을 잡고, 상대의 연령과 취향에 맞춰 신중하게, 무엇보다 즐겁게(!) 식당을 예약한다. 지금 반복하는 ‘을(乙)질’이 훗날 날 지탱할 저력이 돼줄 거라 굳게 믿기 때문이다.

글쓴이 은열은 신문사에서 일하다 뜻한 바 있어 기업으로 이직했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 글쓰기인 데다 오랜 데스크 생활까지 거쳐 남의 글 들여다보고 고치는 데 이골이 났다.
어쩌면 이 땅 어딘가에 존재할, ‘논스톱 20년 차 직장인’의 내공이 궁금할 이름 모를 후배들에게 손톱만 한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다시 글 쓸 용기를 냈다.
  • 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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