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기의 슬기로운 퇴사생활 (16)

수미에게서 배운 것들

글 : 이슬기 

액션건축가의 말
누군가에게 멋진 하루를 선물하기 위해서는, 멋진 하루를 살아봐야 한다.
며칠 전부터 현관문이 밥 달라고 삐-약거리더니 이제는 쌔액- 앓는 소리를 낸다. 이제 정말 바꿔야 할 시간이다. 곧 영업 정지를 신청할 것 같은 도어록을 위해 1.5볼트 건전지 네 알을 구하러 밖으로 나갔다. 응? 편의점이 할인 마트보다 두 배나 비싸다는 것을 발견해버린 동공이 흔들린다. 그러나 ‘흠, 이 더위에 나를 고생시킬 순 없잖아’ 생각하며 쿨하게 카드를 휘두르려고 했다.

그러다 멈칫…. 회사를 나온 후 난 나 자신에게 인색해졌다. 아스팔트를 녹여버릴 폭염에도 1000원을 아끼기 위해 10분을 더 걸어 할인 마트를 찾았다. 더 갖기 위해서 시간과 자유를 포기했던 그 순간을 다시는 맞이하고 싶지 않았기에 최소한을 소비하고 소유하며 사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그런 내가 조금씩 바뀌어간다. 내 친구 수미 덕분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스스로 선물했을 때, 나는 글이 쓰고 싶어졌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 르 코르뷔지에도 삶의 마지막 순간 네 평짜리 통나무집에서 인생을 반추했다는 멋진 이유를 핑계 삼아, 한여름 방 안에 빨래를 널어두면 발 디딜 틈도, 숨 디딜 틈도 없는 작은 우주에서 콧잔등에 맺힌 소금 짠내를 핥아가며 활자와 씨름을 벌였다.

노란 망고, 한우스테이크, 노르웨이 훈제연어, 아보카도, 페퍼잭 치즈… 지지리 궁상맞아 보이는 나에게 수미는 이따금씩, 좋아하지만 이제는 감히 집어 들지 못할 식재료를 선물했다. 마트 장바구니가 집 앞에 도착했을 즈음, 시크하게 울린 문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맛집이 되려면 음식도 맛있어야 하지만 서빙하는 주인의 표정도 밝아야 하는 것처럼, 좋은 글을 쓰려면 작가의 기운이 밝아야 해. 언니의 지금 이 순간들이 모여 어느 순간 잭팟이 터졌을 때를 대비한 투자이니 전혀 부담 갖지 말고. 경제학과 나온 여자의 현명한 결정이니까.”

나는 투자자의 아웃풋을 위해 내 기분을 잘 챙기려고 노력했다. 밥 한 끼를 먹더라도 정성스럽게 예쁜 그릇에 보기 좋게 담아내고, 보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이것을 소비해도 되는지 계산하는 나에게 ‘나는 이 모든 것을 누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해줬다.

그녀는 내가 인생의 변곡점 위를 헤매다 어딘가에 걸려 넘어질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연락을 해왔다. 용건은 크게 두 가지다. ‘놀러 와’와 ‘놀러 가자’. 나는 그게 무엇이든, 좋다고 응답했다. 수미가 부르는 곳에는 언제나 늘 좋은 것, 멋진 것, 감히 내가 해보지 못할 경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접 받는 느낌을 알아야 대접할 수 있다’ ‘콘텐츠(서비스)를 만드는 사람일수록 높은 수준의 경험이 필요하다’, 내가 그녀에게서 배운 것들이다.

이번에는 나를 방콕으로 불렀다. 수완나품국제공항에서 만난 그녀는 내가 사랑하는 망고주스를 건네며 이번 테마도 기대하라고 했다. 우리는 오랜 역사가 깃든 빈티지한 호텔과 도심 속 최신식 호텔에 번갈아 머무르며 룸서비스로 조식을 먹고, 야외 수영장에서 선탠을 즐겼다. 낮에는 길거리 마사지 숍부터 전문 마사지 숍까지 각기 다른 가격대의 가게를 방문해 서비스 제공자의 한 끗 차이, 예를 들면, 특별히 케어 받고 싶은 부위가 있는지 설문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얼마나 큰 서비스 격차를 만들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 새로 생긴 쇼핑센터를 방문하거나 젊은 예술가들이 만들어놓은 마을을 찾아가 최신 유행을 흡수하고, 해가 지면 낮보다 더 밝은 태국의 밤을 스카이라운지에서, 때로는 강 위를 유유히 미끄러지며 그 순간을 탐닉했다.

밤이 깊어간다. 나는 지금 태국의 상류층이 즐겨 찾는다는 바에 앉아 칵테일을 마시고 있다. 스테이지를 가득 채운 흑인 여가수와 그녀의 트리오가 재즈 연주를 막 시작했다. 눈을 지그시 감고 그녀의 목소리에 몸을 맡긴다. 향긋한 시가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나는 이 순간 나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려고 한다. 그러자 내가 나에게 묻는다. 그 제안을 위해 너는 나에게 무엇을 먼저 줄 수 있는지를.

글쓴이 이슬기는 한때 회사원이었다. 지금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일 년에 두세 달쯤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며 사업가, 작가, 여행가, 교육가로 활동하고 있다. 인생을 무대로 평범한 사람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을 연구하고, 공유하는 것을 사랑하며 워라밸 연구소 ‘액션 랩’을 운영 중이다. 《퇴사를 준비하는 나에게》 《댄싱 위드 파파》를 썼다.
  • 2019년 09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는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201911

201911

구독신청
낱권구매
전체기사

event2019.11

event
event 신청하기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30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