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언니 은열의 회사생활 (15)

여행,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꾸역꾸역 다니는 이유

글 : 은열 

까칠언니의 한마디
쳇바퀴 도는 회사원의 삶에서 여행은 아주 크고 진한 쉼표일 수 있다.
그러니 틈만 나면 떠날 것, 되도록 혼자서!
‘내가 미쳤지!’

정신없이 짐을 싸다 문득 멍해졌다. 밖은 벌써 어둑어둑.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만사 귀찮아. 잠이나 푹 잤으면….’

올 초 ‘특가 세일’ 문패에 눈이 멀어 덜컥 결제한 인천-삿포로 왕복 항공권은 출발 시각도, 도착 시각도 새벽이었다. 일정 변경이나 환불은 당연히 불가. 좌석을 지정하고 수하물을 위탁하는 데도 꼬박꼬박 추가 요금이 매겨졌다. 야심한 시각, 대중교통 수단이 마땅찮아 내린 결론은 자차 이동. 당연히 왕복 통행료에 장기 주차비까지 예산에 포함시켜야 했다.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던 나흘간의 휴가

숙소를 정하며 일은 점점 커졌다. 삿포로는 가봤으니 이번엔 다른 데 한번 도전해볼까? 웹서핑을 하다 우연히 발견한 홋카이도 남단 도시 하코다테에 달린 설명은 이랬다.

“일본 최초 무역항으로 이국적 정서가 물씬 풍긴다. 하코다테산(山)에서 내려다본 야경은 나폴리, 홍콩과 더불어 세계 3대 야경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거다, 싶었다. 그날부터 온갖 숙박료 예약 애플리케이션을 들락거리며 하코다테 숙소를 검색했다. 신치토세공항에서 하코다테까지 이동 시간이 고속열차로도 세 시간 반 이상. 이런 사실을 안 건 이미 호텔 예약을 끝낸 후였다(그쯤 되니 15만 원을 훌쩍 넘기는 레일패스 값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교통편과 잘 곳을 해결하고선 이제 됐다, 싶어 몇 개월간 여행 간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냈다. 그리고 어김없이 닥친 디데이(D-day). 한껏 설레도 시원찮을 타이밍에 ‘잠 타령’이나 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해 헛웃음이 났다.

나흘을 꽉 채워 떠난 하코다테 여행은 이후로도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밤새 주린 배를 ‘현지 맛집이 즐비하기로 유명한’ 공항 식당가에서 채우리라 다짐했지만, 이른 새벽 허기진 여행자를 위해 문을 연 곳은 전무했다. 기차라도 빨리 타자며 찾아간 레일패스 교환처 역시 두 시간여 후에나 문을 여는 상황. 하는 수 없이 청사 내 소파에 캐리어를 끌어안고 노숙자마냥 한참을 졸았다. 온라인 예약 시스템의 존재를 몰라 일찌감치 매진된 지정석 대신 자유석(이라 쓰여 있지만 사실상 입석)을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땐 찔끔 눈물이 났다. 쇼핑 도중 휴대전화를 잃어버릴 뻔한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등허리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순간, 나도 모르게 ‘파이팅’을 외쳤다

그래서 여행이 별로였느냐고? 전혀! 대도시 특유의 사나움을 걷어낸 하코다테의 온순한 기운은 일정 내내 고단한 여행자의 긴장을 가만히 달래줬다. 도시 곳곳에 가 닿는 트램을 타고 동네 풍경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고, 적당히 낙낙해져 발에 착 감기는 스니커즈를 신고 발길 닿는 대로 걷다 쉬다 하는 여유도 즐거웠다.

SNS마다 차고 넘치는 ‘하코다테 대표 음식’을 뒤로한 채 구글 맵 하나 믿고 찾아간 현지 식당에서의 경험은 뜻밖의 재미를 선사했다(손님이 많든 적든 올드 팝 크게 틀어놓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기가 막힌 ‘함박스텍’을 내어 오던 경양식집 할머니 사장님, 완전 멋졌어요!). 또 하나, 독서의 즐거움을 온전히 누린 시간이기도 했다(외로울 뻔했던 시간을 함께해준 레이 크록 아저씨와 정유정 작가님, 감사합니다).

맥주 두어 잔 걸치고 느릿느릿 버스에 올라타 마침내 마주한 하코다테 야경은 말 그대로 명불허전이었다. 중국인 단체 관광객 틈바구니에서 주변 소음을 ‘자체 차단’한 후 호흡을 가다듬고 좌우로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짙은 어둠 사이로 점점이 박힌 조명이 뿜어내는 온기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회사에, 집에 잔뜩 쌓아둔 근심걱정이 하나둘 잊혀갔다. 무엇 하나 달라진 것 없는데 괜히 주먹을 불끈 쥐었다. ‘까짓것, 못 할 게 뭐 있어. 하는 데까지 부딪쳐보자!’


혼자 떠나는 여행이 내게 선물한 것들

돌이켜보면 내 휴가는 늘 이런 식이었다. 별로 내키지도 않으면서 어쨌거나 뭐든 해야 할 것 같아 교통편과 숙소를 예약하고, 내내 별 준비 않고 있다 허겁지겁 떠나선 크고 작은 실수를 연발하면서도, 돌아오는 길엔 ‘이번 여행 너무 좋았어!’를 외치며 일찌감치 다음 여행의 밑그림을 구상하는.

한때는 이런 내가 퍽 한심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강요하는 사람 하나 없는데 꾸역꾸역 반복하며 사는 모습이 딱해 보인 적도 여러 번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퍼뜩 깨달았다. 아, 나란 인간은 여행을 거듭하며 성장해가는 존재구나. 그걸 직관적으로 알고 있어서 겉으론 안 내키네 어쩌고 하면서도 어디론가 끊임없이 떠나려 하는구나.

김영하 산문집 《여행의 이유》(문학동네)에서 작가는 자신에게 여행이 지니는 의미를 이렇게 정리한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51쪽)

격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밑줄을 긋다 한 가지쯤 덧붙이고 싶어졌다. ‘그런 자각을 지렛대 삼아 이전보다 두어 뼘쯤 현명하게 살아갈 지혜를 품는 것’이라고. 그나저나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가지?

글쓴이 은열은 신문사에서 일하다 뜻한 바 있어 기업으로 이직했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 글쓰기인 데다 오랜 데스크 생활까지 거쳐 남의 글 들여다보고 고치는 데 이골이 났다.
어쩌면 이 땅 어딘가에 존재할, ‘논스톱 20년 차 직장인’의 내공이 궁금할 이름 모를 후배들에게 손톱만 한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다시 글 쓸 용기를 냈다.
  • 2019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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