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언니 은열의 회사생활 (13)

어쩌면 ‘세대론’이 놓치고 있는 것

글 : 은열 

까칠언니의 한마디
후배에게: 꼰대만 아니면 좋은 선배란 착각에서 탈출을!
선배에게: 세대론 핑계 댈 시간 아껴 ‘진심’으로 무장할 것!
8년 전쯤 일이다.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운 좋게도!) 한 매체의 편집장을 맡게 됐다. 비교적 젊은 조직이었고 구성원이라고 해야 10여 명이 고작이었지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지면을 오롯이 내 판단으로 채워내는 일이 막막해 한동안 버둥거렸다. 당시 지면을 책임지는 일만큼이나 버거웠던 게 ‘후배들 건사하기’였다.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인 친구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은 특히 고역이었다. 어떤 ‘나쁜 버릇’도 없어 가르치는 족족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새내기와 달리 중고참들은 얼마간의 경력에서 생겨난 소위 ‘곤조(근성)’가 생각보다 뿌리 깊어 종종 애를 먹었다. 그리고 기어이 사달이 났다.


나도 모르게 뱉어버린 말, ‘죽을래?’

새로운 기삿거리 발제를 목적으로 열린 기획 회의 시간. 개중 연차가 높은 축에 속했던 후배 S의 입에서 나온 주제를 듣고 귀를 의심했다. 상당수 매체가 이미 보도했을 뿐 아니라 엄연히 그날 우리 지면에까지 반영된 아이템이었기 때문이다. ‘명명백백한 업무 태만’이란 확신에 그만 감정이 이성을 앞질러버렸다. “죄송하다”는 S의 면전에 대고, 그보다 훨씬 어린 후배들이 다 함께 앉아 있는 자리에서 해선 안 될 말을 해버린 것이다. “죽을래?”

순간, ‘아뿔싸’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S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회의 자리엔 불편한 적막이 감돌았다. 서둘러 회의를 끝내놓고 책상으로 돌아와 자책하고 있는데 여지없이 S의 면담 요청이 들어왔다. 회의실 문을 닫고 마주 앉자마자 뾰족한 원망이 날아와 꽂혔다. “그 자리에서 꼭 그렇게 말씀하셨어야 했어요?” 분명 발단은 S의 명백한 잘못이었지만 그날 언쟁은 내 완패로 끝났다. 눈물 콧물 찍어가며 사과해야 했으니까. 억울하진 않았다. 업무상 실수에 감정적 배설로 응수한 잘못이 얼마나 큰지 이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사건 이후 S와 나 둘 다 한 뼘쯤 자랐다. ‘일 욕심 많은 완벽주의자’였던 S는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나 역시 후배들과의 대화 도중 지나치게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다. 매사 언행을 조심해야 해서 예전보다 훨씬 불편해졌지만 성과도 있었다. 간혹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날것의 상태로 고개를 들이밀 때마다 S와의 해프닝을 떠올렸다. 모르긴 해도 누군가 내게 리더로서 가장 성장했던 계기가 뭐였느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음, 죽을래 사건이라고 있었는데 말이죠….’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니…

요즘 기업에선 ‘젊은 세대 공부하기’가 한창이다. 핵심 학습 대상은 단연 ‘밀레니얼 세대’, 즉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태어난 사람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당수 기업이 오래전부터 적지 않은 비중의 밀레니얼 세대 구성원을 품고 있다. 이들이 기성세대와 잘 어우러지며 생산성을 높여준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을 터. 요컨대 오늘날 밀레니얼 세대 끌어안기는 기업 입장에서 ‘옵션’이 아니라 ‘필수’다.

하지만 선배 세대 입장에서 ‘뇌 구조마저 다른 듯한’ 밀레니얼 세대와 잘 지내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다. 그래서일까, 세간엔 ‘닥치고 밀레니얼 세대 이해하기’란 난제 앞에서 황망해하는 기성세대의 자학이 난무한다. 한편에선 “이해는 무슨, 그냥 외워라” 일갈하고 다른 쪽에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읽으며 자란 우리가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에 열광하는 친구들을 어떻게 이해하겠느냐”며 지레 풀이 죽는다. 그러는 사이, 세대 간 격차를 어떻게든 좁혀보려는 이들은 남몰래 서점을 찾아 《90년생이 온다》 《밀레니얼과 함께 일하는 법》 같은 책을 뒤적인다.

얼마 전 모처럼 S를 만났다. 우린 을지로 후미진 골목에 있는 순댓국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옛이야기를 안주 삼아 오래 수다를 떨었다. 그날 S는 내게 “같이 일할 때부터 지금껏 참 고맙고 닮고 싶은 존재였다”고 적힌 카드를 건넸다. ‘이런 얘길 들을 자격이 있나’ 싶으면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그리고 감히 생각했다, ‘세대론에 매몰되지 말고 나만의 리더십을 찾아가자!’


‘괜찮은 선배’의 제1요건, 진심

사실 ‘죽을래 사건’ 이후에도 난 줄곧 좋게 말하면 ‘카리스마 작렬 선배’, 나쁘게 말하면 ‘전형적 꼰대 상사’였다. 하지만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 원칙 몇 가지를 정해놓고 그것만큼은 지키며 살려 애썼다. 후배는 ‘일’로만 평가할 것, 후배가 낸 아이디어는 최선을 다해 실현되도록 도울 것, 업무량에서만큼은 후배를 뛰어넘을 것…. 그 덕이라 단언할 순 없지만 당시 함께 근무했던 친구 중 꽤 여럿과 활발히 연락하며 지낸다.

2019년 6월, 여전히 난 고만고만한 중간 관리자로 살며 ‘황망한 기성세대’ 대열의 어디쯤에 서 있다. 하지만 짧지 않은 경험치에서 체득한 노하우 덕에 나름 ‘믿는 구석’은 있다. 세대 간 골이 아무리 깊어져도, 그래서 웬만해선 꼰대의 늪을 벗어나기 힘들어도 결국 중요한 건 ‘진심’이란 사실이다. 좀 구식이고 투박해도, 최신 유행어나 ‘인싸템’에 어두워도, (친구는 고사하고) ‘여지없는 상사’처럼 비쳐도 문제없다. 사특한 마음을 떨치고 매사 진정성 있게 상대를 대할 자신만 있다면 누구나 괜찮은 선배가 될 수 있으니까. 더 중요한 사실 하나, 세대가 열두 번 바뀌어도 그런 선배를 한눈에 알아보는 ‘눈 밝은’ 후배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글쓴이 은열은 신문사에서 일하다 뜻한 바 있어 기업으로 이직했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 글쓰기인 데다 오랜 데스크 생활까지 거쳐 남의 글 들여다보고 고치는 데 이골이 났다.
어쩌면 이 땅 어딘가에 존재할, ‘논스톱 20년 차 직장인’의 내공이 궁금할 이름 모를 후배들에게 손톱만 한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다시 글 쓸 용기를 냈다.
  • 2019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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