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언니 은열의 회사생활 (12)

미더운 ‘또래 동료’, 그 가공할 위력

글 : 은열 

까칠언니의 한마디
당신과 잘 맞는 단 한 명의 컨템포러리,
회사를 ‘다닐 만한 곳’으로 만드는 마법이다.
“남편이 일본에서 근무하게 됐어요. 저도 한 2년 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E의 ‘폭탄 발언’을 들은 건 1년 전 이맘때였다. 거짓말 좀 보태서 하늘이 노랬다. 짐짓 태연한 척 “잘된 일”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속으론 서운한 맘 가득 담아 울부짖었다. ‘전 어쩌라고요!’


회사에 ‘마음 맞는 동년배’가 있다는 것

E를 알게 된 건 4년여 전, 이직하고도 2년쯤 흐른 후였다. 처음엔 업무상 가끔 만나 눈인사 건네고 소소하게 협의하는 정도였지만 같은 부서로 배치받은 다음부턴 시종 붙어 다녔다. 그렇다고 우리가 매사 척척 통하는 ‘소울메이트’였던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공통점보단 차이점이 두드러지는 사이였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오랜 1인 가구 생활로 혼자, 조용히 지내는 데 인이 박인 나와 달리 전형적 워킹맘인 E 주변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내가 천성적으로 남 챙기는 데 서툰 편이라면 E는 놀랍도록 넓은 오지랖으로 사람들을 살갑게 보살피는 쪽이었다. 소심한 데다 결정 장애까지 있어 종종 주변 사람들을 답답하게 하는 내 눈에 뭐든 거침없이 선택하고 돌파력 있게 추진하는 E는 딴 세상 사람 같았다.

희한한 건 그 부조화가 빚어내는, 기막히는 ‘케미(chemistry)’였다. 남의 말 잘 안 듣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내가 E의 조언만큼은 귀를 쫑긋 세워 들었고, E는 융통성 없는 기자 출신 선배의 전문성과 업무 역량을 틈만 나면 칭찬하고 신뢰했다. 길눈 어둡고 겁도 많아 십수 년 전 딴 운전면허증을 주민등록증 대용품쯤으로 여기다 불쑥 승용차를 장만한 것도, 재테크가 무슨 말이냐는 듯 미련 떨며 살다 부동산 정보를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도 다 E 덕분이었다. 그 모든 변화를 지켜본 동생은 내게 가만히 충고했다.

“언니, 그분 옆에 딱 붙어 있어. 알았지?”

닮은 점이 별로 없는 E와 내가 급속도로 가까워질 수 있었던 비결은 아무래도 나이였다. 내가 두 살쯤 더 많긴 했지만 직장에서 2년 차이는 사실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다. 말하자면 우리 둘은 동년배, 즉 약간의 시차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살며 꽤 많은 걸 공유해온 사이였다. 중고생 때 열광했던 아이돌, 고달프고 지루했던 입시 준비의 기억, 대학 새내기 시절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연애사…. 수십 년간 켜켜이 쌓인 공통분모 덕에 우린 비교적 짧은 시간에 ‘절친’이 될 수 있었다.

팍팍한 회사 생활을 버텨내는 과정에서 ‘마음 맞는 동년배 동료’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일단 엇비슷한 입사 시기 덕에 스트레스의 종류나 깊이가 대체로 같다. 서로에게 비교적 영양가 있는 위로를 건넬 수 있는 비결이다. ‘무개념 후배’나 ‘꼰대 선배’를 흉볼 때도 동년배 동료만큼 마침맞은 상대가 없다(공공의 적이 막강해질수록 내부 결속 역시 그에 비례해 단단해지는 법!). 뭐니 뭐니 해도 동년배 동료의 효용은 속상한 일이 생겼을 때 극대화된다. 선배에게 털어놓으려니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처럼 비칠까 두렵고, 후배를 붙잡고 하소연하려니 나약해빠진 선배처럼 보일까 저어될 때 비슷한 연배의 동료야말로 최고의 상담 상대다.


갈수록 절실해지는 ‘컨템포러리’의 가치

대중음악 장르 중 ‘어덜트 컨템포러리(adult contemporary)’란 게 있다. 백과사전의 정의는 ‘(발라드나 소프트록처럼)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성인 취향의 팝 음악’. 사춘기 시절, 한창 즐겨 듣던 팝송의 상당수가 어덜트 컨템포러리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안 후 호기심에 사전을 뒤적인 적이 있다. 컨템포러리에 ‘동년배’의 뜻이 있단 사실을 알게 된 건 그즈음이었다.

이후 개인적으로 꽤 오랫동안 컨템포러리란 말에 매료됐다. 나이가 들고 사회 경력이 쌓일수록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컨템포러리들(contemporaries)’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자주 생각했다. 세상 혼자인 듯 사투를 벌이다가도 어딘가에서 나와 비슷한 경험치를 움켜쥔 채 힘껏 버티고 있을 그들을 떠올리면 괜히 든든해졌다. 뿌리염색과 종류별 비타민을 주기적으로 챙겨야 하는 일상이 서글프다가도 함께 나이 들어가는 그들 생각에 ‘그래도 기운 내자!’ 힘이 났다.

직장 생활에서도 ‘컨템포러리 효과’는 요긴하다. 작게는 소소한 대화에서부터 크게는 스트레스 관리와 인생 상담에 이르기까지 나이 차가 크지 않은, 그러면서도 믿음직한 동료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이 아무리 고단해도, 심지어 불편한 선후배가 한 다스쯤 돼도 견딜 수 있을 만큼.

“홋카이도 할인 항공권 떴어요!” E가 일본에서 부지런히 공유해준 현지 저가 항공사 프로모션 상품 정보 덕에 일찌감치 여름휴가 계획을 확정지었다. 까마득해 보였던 2년의 시간도 어느덧 절반 이상 지나갔다. 우린 요즘도 인터넷 메신저로 회사와 업무, 일상에 관해 이런저런 얘길 주고받는다. 여전히 E의 살뜰한 챙김을 받으며 문득문득 생각한다. ‘E 같은 컨템포러리를 둔 난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글쓴이 은열은 신문사에서 일하다 뜻한 바 있어 기업으로 이직했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 글쓰기인 데다 오랜 데스크 생활까지 거쳐 남의 글 들여다보고 고치는 데 이골이 났다.
어쩌면 이 땅 어딘가에 존재할, ‘논스톱 20년 차 직장인’의 내공이 궁금할 이름 모를 후배들에게 손톱만 한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다시 글 쓸 용기를 냈다.
  • 2019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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