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기의 슬기로운 퇴사생활 (10)

내일 문득, 죽음이 말을 건다면

글 : 이슬기 

액션 건축가의 말
인생의 진짜 길이는 기억될 만한 시간의 합이 아닐까.
4년 전부터 매주 1회, 군포문화재단에서 5060세대를 대상으로 인생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다. 지나간 인생을 반추하며 자서전 한 권을 완성하는 과정인데, 내 강의는 수강자들에게 악명 높다. 나이 차이도 두 배 이상 나는 어린 녀석이 자꾸 ‘이상한 것’을 시키기 때문이다. 글쓰기 소재를 찾아준다는 핑계로 취조하듯 옆에 착 달라붙어 잊고 있던 꿈을 하나씩 기억나게 만든다. 게다가 이 나이에도 할 수 있다고 부추기며 다음 시간까지 해보라고 과제로 내주고는, 수업 시작 전에 잊지 않고 꼭 체크한다.

이토록 다이내믹한 글쓰기 과정을 네 번이나 연속 수강해 2년을 꼬박 함께한 학생이 있다. 83세, 전숙향.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이자, 동시에 인생을 따뜻하게 사는 법을 몸소 알려준 벗을 소개한다.


83세 전숙향 학생

출석부에 적힌 생년월일로 나를 당황케 만든, 1936년생 전숙향. 그녀는 팔십 평생 품어온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언제나 과제 그 이상을 해오던 열정적인 학생이자 젊은이의 입에서 나온 짧은 한마디 말도 허투루 안 듣고 그대로 실천하려 노력하는 멋진 어른이다.

숙향과 함께 수업을 잘 따라와주는 좋은 학생들 덕분에 글쓰기 수업은 날이 갈수록 자유로워졌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한강공원, 이태원, 대학로, 삼청동으로 소풍을 나가 햇살 가득한 야외에서 글을 썼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면 미술관으로 가거나, 연극을 보거나, 가고 싶은 나라를 무작위로 골라 그 나라 음식을 음미했다. 그때마다 숙향은 내 손을 꼭 잡고 걸으며 지금 이 시간들이 꿈만 같다고 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일만 하며 살았는데, 글을 쓰고, 문화생활을 즐기고, 작가가 되어가는 과정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했다. 어느덧 축적의 시간이 흘러 그녀의 자서전이 완성되었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첫 책이 완성되자, 숙향 덕분에 난 굉장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숙향이 가족, 친척, 친구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선생님을 잘 만나 자신이 책을 쓴 작가가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어깨가 으쓱했지만, 한편으로는 숙향의 자랑거리가 1년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어 민망함이 커져갔다. 그래서 지난 가을학기 마지막 수업 시간에는 “2019년에는 가보지 않은 곳, 해보지 않은 것을 더 많이 경험해 주변 사람에게 모두 알리고픈 이야기를 또 한 번 업데이트하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월의 토요일 오후, 밀린 빨래를 탁탁 털어 널고 있던 중이었다. 주머니에서 낮은 진동음이 울렸다. 숙향의 갑작스런 부고 소식이었다. 젊은 사람은 돈 쓸 곳이 많지 않느냐며 수업을 함께 듣는 동무들에게 점심을 베풀고는 나이 많은 당신과 함께해줘서 감사하다고 이야기하던 그녀의 따뜻한 말과, 잘 먹어야 좋아하는 일을 오래할 수 있다며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내 손에 언제나 손수 만든 음식을 쥐어주던 그녀의 따뜻한 손이 떠올라 차가운 빨래를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다.

그날 이후로 내 머릿속에는 죽음, 죽음,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내일 문득, 죽음이 말을 걸며 나에게 이승의 기억을 리플레이할 기회를 준다면 ‘재생 가능한 기억할 만한 추억’의 시간은 얼마나 될까. 삶이 영원할 것 같은 청년의 시간 속에서도, 영원한 삶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노년의 시간 속에서도 ‘그땐 그랬지’라는 이야기보다 ‘요즘 이렇다’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아마도 그 소망이 내 꿈일지도 모르겠다.

글쓴이 이슬기는 한때 회사원이었다. 지금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일 년에 두세 달쯤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며 사업가, 작가, 여행가, 교육가로 활동하고 있다. 인생을 무대로 평범한 사람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을 연구하고, 공유하는 것을 사랑하며 실행력 연구소 ‘액션 랩’을 운영 중이다. 《퇴사를 준비하는 나에게》, 《댄싱 위드 파파》를 썼다.
  • 2019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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