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언니 은열의 회사생활 (9)

‘루틴routine’은 힘이 세다

글 : 은열 

까칠언니의 한마디
루틴의 힘은 ‘만드는’ 데서가 아니라 ‘지키는’ 데서 생겨난다.
기왕 맘먹은 루틴이라면 악착같이 실천할 것!
한참 망설이다 ‘송금하기’ 버튼을 눌렀다. 1박 2일, 강원도 홍천에서 책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행사의 참가비였다. 3주 이상 남은 일정과 불투명한 주말 상황을 고려하면 턱도 없는 결정이었지만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이었다. ‘작년에 좋았잖아? 그럼 올해도 가는 거지, 뭐.’


어느 겨울 여행, ‘연례행사’가 되다

재작년 12월 초, 간간이 모바일 메신저로 소식을 받아보던 독서 커뮤니티가 ‘홍천에서 북캠프를 연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크리스마스이브가 포함된, 1년 중 가장 시끌벅적한 주말이었다. 대충 훑어본 일정표는 듬성듬성했다. 두어 번 있는 단체 모임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이 자유 시간이었다. 주최 측이 제안한 시간 활용 수단은 (당연히) ‘독서’였지만 뭘 하든 그건 말 그대로 참가자 자유였다.

사람 많은 곳과 요란한 분위기가 갈수록 싫어지던 차에 묘하게 구미가 당겼다. 책도 읽고 생각 정리도 하며 한 해를 차분히 마무리할 수 있다니! 두 시간이 채 안 걸리는, 숙소까지의 드라이브 코스도 맘에 들었다. 별 고민 없이 주섬주섬 옷가지와 세면도구, 읽을 책을 챙겨 집을 나섰다.

처음엔 살짝 당황했다. 1인 1실이라던 숙소는 미니 세면대와 변기가 딸린, 5㎡쯤 되는 면적의 직사각형 공간이었다. 참가비만 내면 숙소까지 갖다 준다던 저녁 식사는 우유와 바나나, 아몬드를 갈아 만든 셰이크 한 컵과 찐 고구마 한 개가 전부였다. 하필이면 보일러가 말썽인 방에 배정돼 덜덜 떨면서도 그게 ‘고장인지 (행사의) 설정인지’ 몰라 한나절을 냉골에서 버텼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좋았다. 좁고 길게 난 창을 통해 보는 겨울 풍경,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얼떨결에 들여다본 심연, 여리고 순한 음식과 ‘몸을 덥혀준다’는 황차(黃茶) 덕에 한껏 편해진 속, 두툼한 이불로 온몸을 꽁꽁 동여맨 채 모로 누워 책을 읽다 깜빡 든 낮잠…. 깊은 산속에서 맞은 크리스마스이브 아침엔 거짓말처럼 눈까지 내렸다. 만 24시간 내내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었다. 잔뜩 꼬인 일정에도 두 번째 여행을 결심한 이유다.


‘1만 시간의 법칙’이 건네는 메시지

1년 만에 다시 찾은 홍천은 모든 게 그대로였다. 스무 명쯤 되는 참가자 중엔 반가운 얼굴도 눈에 띄었다. 나처럼 2년째 참가한 이들이었다. 커다란 온돌방에 방석을 깔고 둥글게 앉아 인사를 나누는 자리, 날 비롯한 ‘개근생’들이 빼놓지 않고 한 얘기가 있었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매년 한 해의 마무리를 이 행사로 짓고 싶다는 말이었다. 누군가는 가만히 고백했다. “이 행사를 저만의 루틴으로 삼고 싶어요.”

루틴(routine). ‘규칙적으로 하는 일의 통상적 순서와 방법’이란 뜻의 영어 단어다. 어감 때문일까, ‘지루한’이나 ‘판에 박힌’ 같은 표현과 흔히 어울려 쓰인다. 자연히 모험 정신으로 충만한 젊은이 사이에선 영 인기가 없다.

하지만 살아보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직장 생활을 오래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나쁜 짓만 아니라면 그게 뭐든 루틴으로 자리 잡는 순간, 그 자체로 ‘가공할 힘’이 됐다. 매일 출근길에 읽는 신문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관심해져선 안 되겠다는 각성을 선사했고, 자기 전 짧게라도 쓰는 일기는 생각을 글로 치환하는 요령을 터득하게 해줬다. 매해 ‘절친’들과 갖는 생일 모임은 오래된 인연의 가치를 새삼 일깨웠으며, 싫어도 1주일에 두세 번씩 이어간 운동은 체지방과 탐식의 죄책감을 동시에 덜어내는 데 기여했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적어도 그와 관련된 부문에서 1만 시간의 훈련을 거쳐야 한다”는 일명 ‘1만 시간의 법칙’을 처음 접한 건 2009년, 미국 작가 말콤 글래드웰의 책 《아웃라이어》(김영사)에서였다. 당시만 해도 ‘아, 그렇구나!’ 정도로 넘겼던 그 용어가 이제 와 생각하니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1만 시간의 법칙만큼 루틴의 중요성을 직관적으로 설명해주는 이론은 없는 것 같아서다.


반복되는 일상, 슬기롭게 버티려면

직장 일이란 게 대동소이하다. 처음 얼마간이 좀 낯설고 두려울 뿐, 이내 적응되고 그다음엔 슬슬 지루해진다. 대단히 독창적이고 매일 신나서 어쩔 줄 모르겠는 회사 업무란 사실 없다. 하지만 고수와 하수가 구분되는 것 역시 바로 그 지점이다. 고수는 반복되는 루틴에서도 기가 막힌 가치를 뽑아내고, 하수는 반복되는 루틴을 지겨워하며 툭하면 다른 곳을 기웃거린다. 고수에게나 하수에게나 시간은 동일하게 흘러간다. 그리고 1만 시간은, 생각보다 금방이다.

“내년에 다시 만나요. 꼭!” 1년 만에 조우한 북캠프 참가자들과 살가운 눈인사를 건네며 1년 후 세밑을 기약했다. 그새 정겨워진 홍천을 뒤로하고 다시 서울로 향하는 길, 왠지 모르게 마음속 곳간이 가득 채워진 느낌이었다. 새로운 루틴이 선물한 에너지로 또 한 해, 치열하게 살아봐야겠다. 바라건대 이 글을 접한 모든 이의 2019년도 그러하길!

글쓴이 은열은 신문사에서 일하다 뜻한 바 있어 기업으로 이직했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 글쓰기인 데다 오랜 데스크 생활까지 거쳐 남의 글 들여다보고 고치는 데 이골이 났다.
어쩌면 이 땅 어딘가에 존재할, ‘논스톱 20년 차 직장인’의 내공이 궁금할 이름 모를 후배들에게 손톱만 한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다시 글 쓸 용기를 냈다.
  • 2019년 02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는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201911

201911

구독신청
낱권구매
전체기사

event2019.11

event
event 신청하기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30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