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기의 슬기로운 퇴사생활 (8)

회사 일보다 힘든, 휴식

글 : 이슬기 

액션건축가의 말
그냥,
좀 제발,
제대로 쉬어보기!
창문을 활짝 열었다. 자전거가 산책을 나가고 싶은지 자꾸 눈길을 보낸다. 밖으로 데리고 나와 페달이 향하는 대로 발을 굴렀다. 오후에 참석하려던 클래식 강연이 있어서 조금만 타려 했는데, 선선한 바람이 들려주는 오케스트라에 취해 한강까지 와버렸다. 결국 강연은 가지 못했고 다시 돌아올 땐 다리가 주꾸미처럼 흐느적거렸다. 그래서 후회했냐고? 아니. 햇볕에 그을려 따끔한 얼굴이 탐험가의 그것과 닮아 있어 뿌듯함에 피식피식 웃음이 났고, 다음엔 물을 꼭 챙겨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달달한 낮잠의 나라로 향했다.

요즘 매번 이런 식이다. 계획한 것이 있더라도 그 순간 더 하고 싶은 것이 나타나면 신나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도록 배려한다.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늦는 바람에 기회를 놓친 적도 있지만 속상해하거나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앞만 보고 달리다 정작 소중한 순간을 놓치는 것보다는 천천히 걷거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잠시 쉬어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퇴사 전 나는 ‘열심히 산다’ 증후군에 걸려 있었다. 매 시각 일분일초 계획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는 이상한 병이었다. 심지어 몇 달간 밤을 새우다시피 준비한 프로젝트가 끝난 후, 겨우 하루 이틀 쉬는 휴일에도 다음 날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를 머릿속으로 따져봐야만 안심이 되었다. 덕분에 가야 한다고 믿는 길의 어디 즈음까지는 다른 이들과 속도를 맞춰 걸을 수 있었고, 운이 좋을 때는 앞서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스물아홉의 가을과 겨울 사이였다. 차가운 공기 때문인지, 퇴근길에 허기를 채우려 먹었던 식은 김밥 때문인지, 서른을 노래하는 음악을 듣다 ‘수고했다’는 가사에 왈칵 울어버리고 말았다. 정말이지 열심히 사는 것에 진절머리가 났다. 전혀 행복하지 않았고, 문뜩문뜩 우울했다. ‘이대로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30년간 수고한 나에게 3년의 휴식을 선물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일신상의 사유’라는 간단한 단어로 사직서에 적어 내고, 회전문을 돌아 나와 바깥 풍경과 마주했다. 아직 이른 오후였다. 갑자기 주어진 자유의 무거움을 알지 못한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몇 가지 당부가 담긴 짧은 편지를 적었다.

걷던 길에서 잠시 멈추고, 옆으로 비켜서기. 앞서가는 친구들을 보며 질투하거나 따라가려 하지 말고, 축하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기. 인생의 성공은 지금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머리로 답을 계산하지 말고,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르기.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길을 걷기. 그냥, 제발 좀 푹 쉬어보기.

동네 책방에서 그간 보고 싶었던 만화책을 모두 빌려 보고, 밤낮이 바뀌든지 말든지 방에 누워 미드를 정주행했다. 그러다 그 모든 것이 지겨워졌는데 달력을 보니 퇴사한 지 겨우 한 달이 지나 있었다. 평일 낮 시간을 ‘즐겁고 유쾌하게’ 보내는 것은 쓸데없는 말이 오가는 회의 시간에 집중하는 표정을 짓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특히 페이스북 알림 창에서 친구들이 성취한 무언가를 보여줄 때마다 나만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풍이 마음속을 휘젓고 다녔다. 나 홀로 정지해 있는 이 상태를 불안해하지 않고 온전한 휴식을 하기 위해서는 고요한 상태가 필요했다.

정신건강을 위해 태풍의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SNS를 모두 지우고, TV도 없고, 만화책도 없고, 휴대폰도 꺼둔, 아주 심심한 상태에 나를 던져두었다. 아무런 자극이 없는 무중력 상태의 시간이 계속되자 종이와 펜을 찾아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을 토해내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때때로 배낭에 옷가지 몇 개만 챙겨 가난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1년 후 즈음, 태풍의 눈에서 발걸음을 옮길 용기가 생겼다. 잠시 꺼둔 시간 동안에도 세상은 여전히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멋진 성취를 이룬 친구들이 보였다. 하지만 더는 그들의 성공이 부럽지 않았다.

이제는 나만의 시간 속에서 내 기준의 성공을 만들며 살고 있다. 천천히 걷다 보니 작가의 꿈이 이루어져 있었고, 직장인들의 슬기로운 회사생활을 위해 시작한 컨설팅 액션랩도 감사하게도 많은 분이 찾아주고 있다. 또한 같은 고민을 가진 이들과 소통하고 싶어 새롭게 시작한 유튜브 덕분에 설레는 아침을 맞이한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삼시 세끼 따뜻한 밥 지어 꼭꼭 씹어 먹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때로는 방법을 몰라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고, 예상외의 결과에 뿌듯함을 만끽하기도 하는, 그런 하루들로 인생을 채워나가고 싶다.

나는, 우리는, 지금 바라보는 풍경을 즐길 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글쓴이 이슬기는 한때 회사원이었다. 지금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일 년에 두세 달쯤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며 사업가, 작가, 여행가, 교육가로 활동하고 있다. 인생을 무대로 평범한 사람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을 연구하고, 공유하는 것을 사랑하며 실행력 연구소 ‘액션 랩’을 운영 중이다. 《퇴사를 준비하는 나에게》, 《댄싱 위드 파파》를 썼다.
  • 2019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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