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언니 은열의 회사생활 (8)

‘사람이 오는’ 어마어마한 순간

글 : 은열 

까칠언니의 한마디
주변에 사람이 없다고?
투덜거릴 시간에 한 명이라도 더 생각하고 챙겨보자.
누군가를 당신 곁으로 오게 하는 방법 중 최선은 당신이 먼저 다가가는 것이니.
“드르르르.” 한창 ‘불꽃 업무’ 중인 오후, 요란한 진동음을 내며 모바일 메신저가 울리기 시작했다. 선배 언니였다. 메신저로 도착한 건 이미지 파일 한 개. 커다란 공연장 좌석도에 작은 점 두 개가 콕 박힌 그림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메시지. “예매 성공했어, 조용필!” 사무실에 낮게 깔린 침묵을 뚫고 하마터면 소릴 지를 뻔했다. 가까스로 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대박.”

부모님께 조용필 공연을 보여드리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지난봄. 데뷔 50주년을 맞아 모처럼 모습을 드러낸 조용필이 전국 투어 공연 계획을 밝혔을 즈음이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부모님이 계신) 지방 투어는 미정이었다. 어찌어찌 일정이 잡힌다 해도 진짜 문제는 ‘피케팅(피 튀는 티케팅)’의 관문을 넘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뮤지컬 마니아인 선배 언니 얼굴이 퍼뜩 떠올랐다. 뮤지컬 관람을 워낙 많이 해 온라인 예매에 관한 한 자타공인 ‘금손’을 자랑하는 언니다.

“당연히 안 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언니 시간 괜찮으면…” 구구절절 사족을 달고 부탁한 게 여름 무렵이었던가. 그러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4개월 넘게 지나 연락이 온 것이다. 난생처음 ‘당대 아이돌’ 조용필의 실물을 마주한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셨는지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덕분에 난 그 치열하다는 예매 전쟁에 발 한 번 안 담그고 ‘제대로 효도’ 했다.


‘금손 언니’와 ‘엽서 선배’가 건넨 메시지

“지난번에 쓰신 칼럼 중 그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표현 말이지요.” 짐작도 못 했다. 한 다리 건너 알게 된, 오래전 은퇴하신 선배 입에서 내 글에 대한 품평이 나오리라곤. 서너 달 전 모임에서 지나가듯 “이런저런 글을 쓰고 있다”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그 얘길 흘려듣지 않고 몇 달 치 칼럼을 꼼꼼히 읽으신 것이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나이로나 연륜으로나 한참 후배인 모임 참석자들을 위해 아껴두신 와인과 예쁘게 포장된 선물까지 챙겨 오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미신 ‘그것’ 앞에서 우린 아연실색했다. 한눈에 봐도 정성이 뚝뚝 묻어나는 손그림 엽서였기 때문이다.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실력은 고만고만해요. 그래도 성의이니 받아주세요.” 참 희한하지, 왜 하필 그 순간 ‘금손 언니’가 떠올랐을까? 가볍게 무시해도 아무 일 없었을 부탁을 기억해뒀다 다들 바쁜 평일 오후, 따로 시간을 내어 기어이 들어주는 사람. 그런 귀인이 지척에 있었구나,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사이, 기다렸다는 듯 다른 기억도 속속 고개를 내밀었다. 고단하고 외롭던 교육 기간 중 불쑥 살가운 안부 메시지를 보내준 동료, 매해 생일이면 축하 메시지에 소소한 기프티콘을 매달아 아낌없이 날리던 친구, “선배 덕에 이만큼 자랐다”며 만날 때마다 고마워하는 후배…. 수줍게 엽서를 건네는 선배 얼굴 사이로 그 모든 장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내 정신이 확 들었다. ‘나, 이런 대접 받을 자격 있나?’


누가 오기 전 내 발로 뚜벅뚜벅 다가가기

“사람이 온다는 건 /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 시 〈방문객〉의 일부로 제작된 교보문고 현판에 처음 시선이 가 닿은 건 2011년 여름이었다. 당시 받은 감동도 결코 작지 않았다. 여전히 크고 작은 대인관계로 고전 중이었고, 그래서 더더욱 ‘어마어마한’이란 형용사의 무게감이 압도적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암, 어마어마하지. 문제는 그런 기적이 아무에게나 와주진 않는단 사실 아냐?’ 대충 이러고 말았던 것 같다.

장장 7년 만에 그 시구(詩句)가 생각난 건 우연이었을까? 막상 다시 떠올리고 보니 그땐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관점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사람이 오는, 그 어마어마한 순간에 난 대체 뭘 하고 있었지?’ 생각해보니 거기엔 넋 놓고 앉아 누군가가 와주기만 하염없이 기다리는, 무기력한 내가 있었다. 이미 온 사람을 고마워하기는커녕 ‘왜 더 안 오는 거야?’ 속상해할 줄이나 아는, 이기적인 나도 있었다. 스스로 얼마든지 누군가에게 어마어마한 순간을 선사할 수 있는 존재이면서 그걸 인식조차 못 하는, 우둔한 나 역시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부끄러웠다. 그리고 사무치게 고마웠다. 이제라도 그 사실을 깨닫게 해준 ‘금손 언니’, 그리고 ‘엽서 선배’가.

선배에게 받은 엽서는 거실 책장, 그중에서도 눈에 제일 잘 띄는 곳에 세워놓았다. 요즘은 매일 집을 나서기 전, 알록달록한 머플러를 두른 엽서 속 눈사람과 찡긋 눈인사를 나눈다. 살짝 말도 걸어본다.

“어이, 오늘은 또 누구에게 먼저 다가가 볼까? 그 사람에게 어마어마한 순간을 선물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글쓴이 은열은 신문사에서 일하다 뜻한 바 있어 기업으로 이직했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 글쓰기인 데다 오랜 데스크 생활까지 거쳐 남의 글 들여다보고 고치는 데 이골이 났다.
어쩌면 이 땅 어딘가에 존재할, ‘논스톱 20년 차 직장인’의 내공이 궁금할 이름 모를 후배들에게 손톱만 한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다시 글 쓸 용기를 냈다.
  • 2019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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