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언니 은열의 회사생활 (6)

직장생활에서 겸손은 미덕이 아니다

글 : 은열 

까칠언니의 한마디
송곳은 반드시 주머니를 뚫고 나온다.
단 ‘진짜 송곳’일 때만!
“저기 앉아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유니폼 차림의 여직원이 턱을 까딱하더니 물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턱이 가리키는 방향에 놓인, 낡고 딱딱한 나무 의자엔 나 같은 ‘수금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서넛 앉아 있었다. 엉덩이를 반쯤 걸친 채 어색하게 두리번거리길 30분여. 마침내 봉투 하나를 받아 들었다. 그 안엔 3개월 후 지급 조건의 100만 원권 어음증서 한 장이 담겨 있었다. 괜히 코끝이 시큰거렸다. ‘해냈어!’


‘10년 후 할 일’ 누구도 안 바꿔준다

신문사에서 처음 배치된 부서는 문화사업을 기획, 운영하는 곳이었다. 당시 우리 부서 주최 행사에선 거의 예외 없이 참가자 배부용 팸플릿을 제작했다. 그리고 거기엔 광고 페이지가 몇 장씩 포함됐다. 당연히 유료였고 그걸 수주하는 건 부서원의 몫이었다. 신문에 종종 광고를 싣는, 알 만한 업체 담당은 일찌감치 선배들에게 돌아갔다. ‘신입 면제 특권’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나 같은 새내기가 시도할 방법은 ‘맨땅에 헤딩하기’가 전부였다.

소규모 음악회를 앞두고 또다시 ‘광고 수주전(戰)’이 시작됐다. 사무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사람 키만 한 백지 한 장이 붙었고 전 부서원의 이름이 차례로 적혔다. 수주 실적 ‘성적표’였다. 잘나가는 선배들이 ‘바를 정(正)’ 자를 그리며 수금 예정액을 높여갈 때 내 이름 옆만 내내 공백이었다. 한동안 부러 한 시간쯤 일찍 출근, 단골 도넛 가게에서 탕약 같은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신세를 한탄했다. ‘이러려고 취직했나….’

그날도 예의 그 도넛 가게에서 신문을 뒤적이다 한 광고 앞에 시선이 멈췄다. 고가의 수입 피아노를 판매하는 악기 도매 업체의 흑백 광고였다. ‘비싼 악기를 파는 곳이니 클래식 음악회 관객에게 광고하고 싶지 않을까…?’ 대표 전화번호를 옮겨 적고도 한참을 망설였다. 네댓 번의 통화 대기를 거쳐 겨우 광고 담당자와 연결됐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겨운 ‘100만 원짜리 어음 수주’ 사연이다.

그 후로도 내 ‘이러려고…’ 타령은 꽤 오래 이어졌다. 매일 아침 그날 신문을 선배들 책상에 올려놓고 커피 메이커를 청소하면서, 오후 두 시쯤 우편실로 달려가 선배들에게 배달된 등기우편 꾸러미를 받아오면서, 많게는 수천만 원에 이르는 행사 지출 내용을 맞추느라 산처럼 쌓인 영수증 더미와 씨름하며 시시때때로 겁이 났다. ‘10년, 20년 후에도 이런 일만 주어지면 어쩌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이후 난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비상’을 여러 번 경험했다. 팸플릿에 들어갈 임원 인사말을 쓰고 사내 신문 리포터로 활동하며 글쓰기 능력을 인정받았고, 교육 기사를 열심히 쓰다 때마침 교육사업을 준비 중이던 사내 기획단(TF)에 합류해 새로운 업무도 익혔다. 오래 알고 지내던 취재원에게서 확보한 제보 덕에 난생처음 특종상도 받았다. 30대 초반에 수십 년 전통의 매체 운영 책임자 자리에 앉았으며, 무대 공포증을 이겨가며 치러낸 강의 경험을 눈여겨봐준 몇몇 지인 덕에 매해 끊이지 않고 특강 의뢰를 받을 정도의 평판도 얻었다.

물론 ‘거저’는 아니었다. 석 장짜리 단신 기사 하나 송고하면서도 수십 차례 퇴고가 예사였고, 교육 전문 기자가 돼 보겠다며 ‘핫(hot)’하다는 사교육 전문가와 욕하는 초등생, 아이비리그행 티켓을 거머쥔 토종 여고생 사이를 누볐다. 준비 없이 리더가 됐다는 자괴감에 머리를 쥐어뜯다 거금 50만 원을 들여 6개월 과정의 모 대학 리더십 아카데미에 등록했으며, 어렵게 확보한 영상 강의 촬영 기회를 망치기 싫어 주말마다 카페에 죽치고 앉아 스크립트를 쓰고 고치길 반복했다.


만사형통 주문 ‘난 주머니 속 송곳이다!’

사자성어 ‘낭중지추(囊中之錐)’를 좋아한다. 주머니(囊) 속에 숨겨놔도 언젠가 뚫고 반드시 비어져 나오는 송곳(錐)처럼 유능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각을 드러낸다는 뜻이 퍽 맘에 들었다. 돌이켜보면 난 병아리 회사원 시절부터 줄곧 마음속에 낭중지추 네 글자를 고이 품고 살았다. ‘비록 지금은 주머니 속에 감춰진 신세지만 언젠가 이 갑갑한 공간을 뚫고 나가 내 존재를 만방에 떨쳐야지!’ 이를 악물었다. 한편으론 ‘주머니 뚫는 힘’을 기르려 백방으로 노력했다. 자신을 송곳이라 칭하면서도 내심 ‘남이 볼 땐 그저 뭉툭한 막대기면 어쩌지?’ 전전긍긍했다. 그 간극을 어떻게든 좁혀보려 갖은 수를 썼다.

‘쳇, 겨우 그 정도면서 송곳은 무슨!’ 주변에서 수군거릴 수 있다. 그래도 회사 생활을 시작할 때 스스로를 낭중지추로 명명하는 건 실(失)보다 득(得)이 크다. 일단 지금 당장 당신이 처리해야 할 일이 형편없이 한심하더라도 스스로를 진정시킬 수 있다. 당신은 아직 제대로 된 바깥세상을 구경조차 못 한 거니까. 그저 어둑한 주머니 속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니까. 지난한 회사 생활을 이겨낼 ‘전투의식’ 함양에도 유용하다. 주머니를 뚫고 바깥 구경을 하려면 결코 ‘멍 때려선’ 안 되기 때문이다. 끝이 무뎌지지 않도록, 녹이 슬어 돌파력을 잃지 않도록 한시도 쉬지 않고 자신을 벼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년쯤 애쓰다 보면 어느 틈엔가 정말 ‘날 선 송곳’이 된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돈이니 명예니 하는 건 자석에 달라붙는 쇳가루처럼 저절로 따라온다. 그러니 직장 초년생이라면 속는 셈 치고 낭중지추를 마음에 새기자. 혹 ‘약발’이 받는다 싶거든 꼭 《톱클래스》 편집부로 연락 주길.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온, 멋진 송곳의 탄생을 기꺼이 축하할 용의가 있으니!

글쓴이 은열은 신문사에서 일하다 뜻한 바 있어 기업으로 이직했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 글쓰기인 데다 오랜 데스크 생활까지 거쳐 남의 글 들여다보고 고치는 데 이골이 났다.
어쩌면 이 땅 어딘가에 존재할, ‘논스톱 20년 차 직장인’의 내공이 궁금할 이름 모를 후배들에게 손톱만 한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다시 글 쓸 용기를 냈다.
  • 201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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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ilwul   ( 2018-11-06 ) 찬성 : 1 반대 : 1
어설픈 잘난척. 짜증난다.
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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