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농부

안창근 글로벌 제주 문화협동조합 이사장

잘나가던 박사님, 다 던지고 제주도로

글·사진 : 서경리 기자

한때 ‘제주살이’를 꿈꾼 적이 있다. 아메리칸드림처럼 제주드림이 한창일 때다. 환상에 기름을 부은 건 〈효리네 민박〉이라는 TV 프로그램이 히트를 하면서였다. 이효리는 매일 아침 요가를 하고 돌아와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낮잠을 즐기다 해 질 녘이면 강아지들을 데리고 숲이나 바닷가로 산책을 떠났다. 제주도만 가면 이효리처럼 살 수 있을 것만 같았지만 실상은 제주나 서울이나 ‘생존’의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이효리가 방송에 나와 “저는 괜찮아요. 전 돈이 많잖아요”라고 말했듯, 호숫가 우아한 백조에게도 발바닥 땀나게 헤엄칠 시간이 필요하다.

모두가 제주드림을 꿈꿀 때, 청년 사업가 안창근(39) 씨는 현실적인 제주살이의 길을 제시한다. 놀이를 문화로, 문화를 산업으로 이끌어 주는 플랫폼 ‘글로벌 제주 문화협동조합’, 줄여서 ‘글제문’을 통해서다. 안창근 글제문 이사장은 제주판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을 통해 제주에 귀농・귀어 하려는 청년 농부를 돕고 있다.


공부만 잘하면 행복해진다더니


‘공부=취업=돈=행복’. 어른들이 제시하는 달콤한 미래 공식을 정답으로 알고 살았다. 남들 다 가는 클럽 한 번 가본 적이 없다. 대학 때 MT는커녕 친구들과 여행 한 번 못 갔다. 안창근 이사장은 23세부터 공공기관 연구원에서 인턴으로 활동하며 국가정책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위기관리센터, 유엔 기구, 국가간재난관리표준(ISO) 조직에서 일했다. 국가 간 협력을 진행하거나 정책 방향성을 세우고 로드맵을 수립하는 일을 맡았다. 일하면서 틈틈이 행정학석사와 경영정보학 박사과정도 공부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았지만, 출근길 쳇바퀴 도는 삶은 무료했다. 공부만 하면 행복해진다던 미래는 현실과 달랐다. ‘내가 원하던 삶이 무엇인가, 내 인생 누가 책임질 건가’에 대한 의문이 들 때 직장을 접고 귀향했다.

“30대 초반 지방의 대학교수로 가면서 농어촌 지역의 개발지원 정책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내가 잘하는 일이 뭘까 생각하니 ‘정책 수립’이더라고요. ‘정책을 어떻게 해석해서 문화와 청년, 지역을 연결해서 소득을 낼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지역의 활성화와 소득 증대 방안에 대한 연구는 많았지만 현실적으로 미흡한 부분이 있었죠. 나만의 공부를 위한 과감한 도전을 해보자 생각했습니다.”

첫 프로젝트는 대구의 근대건축거리 골목길 투어 프로그램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건물을 고쳐 지역민을 위한 새로운 문화 공간을 만들었다. 건물이 갖는 역사성과 전통미를 살리면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입히는 방식이었다. 한옥의 원형을 살린 카페 뜰 안에 수심 6m 풀장을 만들어 도심에서 스킨스쿠버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시대상이 고스란히 담긴 방공호는 와인 저장소로 바꿨다. 카페가 ‘명소’로 소문나며 구도심에 사람이 몰려들었다. 놀이가 문화와 산업으로 이어지는 첫 번째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자신감이 붙었다. 도시재생의 성공 여세를 몰아 농어촌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문화는 영역이나 깊이를 알 수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주도는 산과 바다가 있고 자연환경적으로 모든 것이 개방되어 있어요. 문화를 만들어 가기에 최적의 장소입니다.”

그는 대구의 한 카페에서 청년 사업가 100여 명을 불러 모아 제주도에서 벌일 수 있는 사업 영역에 관해 설명했다. 그때 나온 이야기 중 하나가 ‘청년 워킹홀리데이’다.

“제주도에 가서 보고 먹고 즐기며 돈만 쓰다 오는 게 아니라 일을 해서 번 돈으로 관광을 하거나 일터를 잡는 거죠. 농산물로 접근해 제주의 문화를 느끼고 새로운 패턴의 문화를 이끌어 가는 사업입니다. 지역 입장에서는 농업과 관련한 청년 일자리 시장을 열어가는 새로운 모색인 거죠.”

사업은 협동조합 형태로 구상했다. 중심이 되는 플랫폼을 만들고 그 위에서 각자의 법인을 세워 수익을 가져가는 식이다. 투자는 없다. 플랫폼은 의사소통 역할만 할 뿐이다. ‘콘텐츠만 활성화되면 수익은 따라서 온다’는 확신이 있었다. 황금빛 로드맵이라 자신했지만, 대부분이 그를 속된 말로 사기꾼으로 봤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단 한 사람의 지지자가 인생을 바꿀 수 있다. 그를 돕겠다고 나선건 ‘대구 치맥 페스티벌’ 기획에 참여했던 이성빈씨다. 뜻을 함께하는 든든한 동지를 얻고 2015년 ‘가능성’을 담보로 한 제주도 여정이 시작됐다. 첫 발걸음은 쉽지 않았다.


‘괸당 문화’에 발목 잡히다


“패기로 들이댔는데 신나게 두들겨 맞았죠. 콘텐츠는 좋은데 제주도와 맞지 않는다고 해요. 우리의 자세가 문제라는 거죠. 제주도에는 ‘괸당 문화’가 있습니다. 괸당은 혈족이나 친족을 의미해요. 어떤 일이든 밑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죠. 무작정 들이대는 게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는 게 먼저라는 말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마음먹고 6개월간 쉬었다. 노인회관을 빌려 거주하면서 트럭을 타고 봉사활동을 다녔다.

밭일을 돕거나 마을을 청소하고 어르신을 위한 식사를 준비했다. 한두 달 지나 얼굴을 익히고 나니 마을 사람들도 서서히 마음을 열었다. 송악산 인근에 사업장으로 쓰기 좋은 땅도 소개받았다. 폐교된 무릉초등학교와 인근 유휴펜션을 기반으로 사업을 본격화했다.

처음 두 달 동안 2명이 참여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SNS를 통해 적극적으로 홍보하니 10명, 20명 모여 작년 초엔 50명까지 몰렸다. 자신감을 가지고 대학과도 연결해 사업을 확장했다.

“대학마다 진로학습개발 장학금이 있어요. 교육부 예산을 지원받아 대구한의대 학생을 초청했습니다. 이들에게 귤밭을 무상으로 지원하고 실제로 판매하도록 했습니다. 진로 방향을 고심할 수 있도록 체험의 장을 열어준 거죠. 경영학이나 마케팅학과 학생은 어떻게 하면 물건을 잘 팔지 고심하고, 디자인학과 학생은 상품 포장을 생각할 겁니다. 130명이 와서 1인당 100만 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어요. 진로 체험을 하면서 용돈도 번 셈이죠.”


글제문 마케팅은 직접 판매를 통한 점조직 형태다. 참여자 스스로가 글제문의 ‘안테나숍’ 역할을 한다. 잘 만든 콘텐츠 하나가 SNS에 올린 글을 통해 ‘좋아요’와 ‘공유’를 타고 세계로 퍼져나갔다.

농촌은 이미 초고령화를 향해 가고 있다. 인력이 늘 부족하다. 제주도에서의 워킹 홀리데이는 청년의 힘을 빌려 농어촌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일거양득이다. 또 농산물을 통한 제주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홍보할 수 있다. 글제문의 활동이 알려지며 역으로 인력 지원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다.

“마을 한 어르신이 ‘귤나무는 있는데, 귤 딸 힘도 없고 인력도 마땅찮다. 약은 한 번 쳤다. 예전처럼 시기별로 영양제를 주거나 약을 자주 치지는 못했다. 너희가 가져가서 쓰거라’ 하는 거예요. 가서 보니 귤에 벌레가 많이 붙어서 귤이 새까매요. 이걸 어떻게 팔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광고했죠. ‘약 한 번 친, 자연이 키운 귤이다. 받으면 놀랄 거다. 저(低)농약이고 숨은 귤이고 정말 싸다’라고요.”

이들의 홍보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3300m2 (1000평) 규모의 귤밭에서 나온 귤을 다 팔았다. 이 일이 입소문이 나면서 여기저기서 귤밭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저렴한 노동비로 수익을 올릴 수 있으니 밭주인 입장에서 나쁠 게 없었다. 체험자들도 직접 딴 귤을 상품화하고 마케팅으로 연결해 돈을 벌 수 있으니 서로 ‘윈윈’이었다.

“워킹홀리데이는 마을과의 교차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서 일자리를 받아야 하고, 필요할 때만 도와주고 빠지는 식은 제대로 된 워킹이 아닙니다. 글제문은 단순히 ‘일자리 소개소’가 아닙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지역의 유휴 공간을 살리고 콘텐츠를 집어넣어 활성화하는 게 목표입니다. 관광산업이나 청년 놀이문화가 아니죠. 농업과 관련한 일자리를 만드는 시장이라 새로운 겁니다.”


20대 셋이 만든 ‘알뜨르 농부시장’


초기 글제문은 1기부터 4기까지 분기별로 참여자를 받아 일자리를 연결해줬다. 최근에는 독특한 아이템을 가지고 눈길 끄는 청년 사업가를 필두로 그룹화하고 있다. 청년들의 활동이 단기적인 돈벌이가 아닌 사업으로 이어지도록 기틀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알뜨르 농부시장’이다. 안창근 이사장이 처음 와서 산 송악산 옆 자그마한 카페 공간을 농산물 직판장으로 꾸몄다. 20대 초・중반의 청년 세 명이 공간을 맡았다. 감류와 고사리, 땅콩, 감자, 고구마 등 제주에서 나는 농산물에 그들의 문화를 입혀 판다.

“SNS에 ‘귤이 맛있다’라는 광고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해요. 귤을 앞에 두고 ‘끙끙’ 앓다가 귤을 시원하게 까 먹죠. ‘값이 싸다, 맛있다, 시원하다’ 그런 말이 없어요. 소비자들은 그들의 표정만 보고 귤이 시원하고 맛있다고 느끼죠. 알뜨르 농부시장은 제주도 전체 직판장 판매에서 상위권에 있어요. ‘너희가 마음껏 해봐라. 춤추고 노래하고 놀아라!’ 그게 먹혔죠.”

청년은 아이디어나 트렌드에서 빠르다. 청년이 가진 반짝이는 아이디어는 구조가 받쳐줬을 때 트렌드로 넘어가고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그 과정을 돕는 게 글제문이다.

글제문은 해외로도 눈을 돌리고 있다. 대만과 베트남의 워킹홀리데이 사이트에 모집 공고를 올렸더니 1000여 명의 문의가 쏟아졌다. 그중 30여 명이 한국을 찾았다. 앞으로는 농산물 체험 행사뿐만 아니라 청소년들과 교류하는 어학연수 프로그램도 열 계획이다. 또 ‘글로벌 제주 문화협동조합’이라는 이름에서 지역만 바꿔 ‘글로벌 안동’, ‘글로벌 순천’ 등으로 지역도 옮긴다.

“농산물 판매를 전략으로 두면 장사꾼입니다. 그 위로 콘텐츠를 얹어야 문화가 되는 거죠. 지금 저는 ‘인생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단발성의 반짝거리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정착해 수익을 내고 싶어요. 플랫폼 역할을 하며 발전적인 방향으로 사람들을 이끌어가고자 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역량을 가지고 출사표를 던졌을 때, 내 인생의 로드맵도 완성됩니다.”


슬로건이 없는 이유


그가 꿈꾸는 인생의 큰 그림은 무엇일까.

“추억을 같이 나눌 친구를 만들고 싶었어요. 소득과 경영체를 기반으로 한 친구죠. 우리는 슬로건이 없어요. 지금 내가 방향을 잡아버리면 안창근의 색깔이지, 함께 가는 게 아니잖아요. 당위성이 있고 승산이 있되 참여하는 이들과 친구처럼 지내고 싶습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공부를 잘하고 직장에 들어가 돈 버는 게 행복의 정답이 아니듯 인생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나만의 길을 찾기도 한다. 누군가 길에 대해 조언해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꼭 맞는 길이라고 말할 순 없다.

“삶의 가치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 강요해서도 안 된다. 누가 내 인생을 책임질 건가. 나쁜 길로만 가지 않으면 된다.”

청년들에게 던지는 그의 로드맵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 2018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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