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문명의 십자로, 중앙아시아를 가다 ⑩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아브 벽화

초원길을 주름잡던 고구려, 중앙아시아 오아시스에 흔적을 남기다

사마르칸트 여행은 아프라시아브(Afraciab) 언덕에서 시작된다. 사마르칸트 입구이기도 한 아프라시아브 언덕에 서면 저 멀리 이국의 향취를 물씬 풍기는 에메랄드 돔들이 햇빛에 어울려 손짓하듯 반짝거린다. 순간, 나그네는 꿈인 듯 아련한 몽환에 빠진다. 그리고 한마디 감탄사를 터뜨린다.
“아, 여기가 사마르칸트구나!”
목동들만 한가로운 아프라시아브 궁전 터.
아프라시아브 궁전은 기원전 5세기부터 13세기 초 몽골의 침략 전까지 사마르칸트의 중심지였다. 특히 7~8세기에는 실크로드 무역을 이끈 소그디아나의 수도이자 중앙아시아의 강력한 국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옛날 국제적인 명성과 번영을 누린 아프라시아브 궁전은 황량한 언덕과 무덤들만 남긴 채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아프라시아브 궁전이 있던 곳을 왜 두 동강을 내었지?”

“원래 사마르칸트로 들어오는 도로공사를 하던 중에 발견되었거든요.”

“목동들이 언덕에서 발견한 것은 없었나?”

“토기 조각과 동전 한두 개 정도는 있었지만 이곳이 궁전 터였던 것은 공사를 하면서 알려졌어요.”

도로 건설로 두 동강이 난 아프라시아브 언덕
아프라시아브 궁전이 있었던 언덕은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를 오가는 도로가 중간을 가로질러 지나간다. 도로 공사를 위해 언덕을 절단하면서 궁전의 벽과 기둥이 발견된 것이다. 그로 인해 궁전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사전 지표조사 없이 무작정 도로를 건설하다 보니 흙 속에 묻혔던 귀중한 문화유산이 반 토막이 난 것이다. 하지만 경제 수준과 문화의식이 낮은 상황에서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지는 것은 우스운 이야기다. 그보다는 고속도로 공사로 인해 궁전이 발견되고 남은 부분이나마 보존되고 있으니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

아프라시아브 궁전이 있었던 언덕은 여기저기 파여 있다. 궁전이 발견되자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서구의 고고학자들이 대거 발굴에 참여하였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이곳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중요한 것들은 모두 자국의 박물관으로 가져갔다. 발굴과 보존에 투자한 비용을 대신한 것이라고 믿기엔 왠지 허전하고 우울하다.

여기저기 파헤친 구덩이마다 풀이 무성하다. 그곳에는 목동들이 어제처럼 짐승들을 데리고 와서 풀을 먹이고 있다. 폐허가 된 아프라시아브 언덕을 거닐며 절정기의 사마르칸트를 상상한다. 몇몇 목동들이 뙤약볕에 황무지를 둘러보는 나를 보고 신기한 듯 웃고 섰다. 그들에게 손 인사를 하며 8세기의 아프라시아브 궁전으로 들어간다.

커다란 궁전을 중심으로 귀족과 부호들의 저택이 자리 잡고 대상들의 교역 장소인 바자르와 휴식처가 즐비하였을 것이다. 보석으로 장식한 화려한 복장을 한 왕은 각지에서 온 사절단을 맞이하느라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대상(隊商)들은 순조로운 교역을 위해 진귀한 물건을 준비했을 것이다. 바자르에는 방금 도착한 신기한 물건들이 마법처럼 사람들의 눈과 귀를 현혹하고, 청순한 여인들의 가슴을 끝없이 달궜을 것이다. 초승달 위로 반짝이는 샛별이 보일 때까지 음주·가무가 끊이질 않고, 어둑한 뒷방에선 물건보다 더 귀중한 정보가 은밀하게 거래되었으리라. 여인은 비단과 금화에 밤새 사랑을 버리고, 낙타는 만취한 청년의 암울한 가슴을 밤새 보듬었으리라.

사랑이 떠나간 자리는 허전하다. 그 옛날의 영광이 사라진 아프라시아브 궁전도 고적하다. 아프라시아브는 허전하고 고적한 슬픔을 잊고자 오늘도 목동과 짐승들에게 아픈 역사를 뜯게 하고 있다. 어디쯤이었을까. 청년이 연인을 잊지 못해 온 밤을 흐느꼈을, 그리하여 청록빛 눈물로 하늘과 땅을 하나로 엮었을 그곳.

아프라시아브 발굴 현장 전경
아픔조차도 팍팍한 먼지로 날리는 아프라시아브 궁전 터를 뒤로하고 이곳에서 발굴된 유적을 모아놓은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에 들어서자 발굴 장면을 담은 전경 사진이 손님을 맞이한다. 각종 동전과 자기류, 조로아스터교의 유물들이 지도와 함께 진열되어 있다. 하지만 나의 주된 관심사는 궁전 벽에 그려진 벽화다. 그 벽화에는 우리 한민족의 글로벌 활동 자취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벽화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어서 별도의 전시실로 구분해 놓았다. 철문으로 된 입구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벽화의 보존을 위하여 특별한 경우에만 한정적으로 공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흐무드 아크라노브 박물관장이 벽화로 안내해 주었다.

아프라시아브 벽화에 보이는 고구려인(○부분).
아프라시아브 벽화는 1965년부터 3년간 소련의 중앙아시아 고고학자인 알리바움에 의해 발굴되었다. 벽화는 아랍 지배 이전에 완성된 것인데 8세기 초 아랍인에 의해 부분적으로 파괴된 채 묻혀있었다고 한다. 높이 2미터의 벽화가 어둑한 불빛에 희미하다. 그림은 많이 손상되었지만 윤곽선은 뚜렷하다. 잠시 후, 눈이 전시실 불빛에 적응되자 벽화의 그림이 확연히 보인다.

벽화의 주제는 사마르칸트 왕이 각국에서 온 사절을 영접하는 장면과 사절단이 사마르칸트로 이동·도착하는 모습이다. 특히 사절도는 세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맨 밑에는 좌우에서 중앙으로 이동하는 사절단과 이들을 맞이하는 왕의 가신들이 그려져 있다. 두 번째 그룹은 등을 돌리고 방석 위에 가부좌로 앉아 있는 왕의 신하들이고, 맨 위쪽도 두 번째 그룹과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왕의 신하들이다. 왕의 신하들은 모두 변발을 하고 있다. 이들은 튀르크인들로 왕의 신하는 대다수 튀르크인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소그드인의 머리 모양과 복장은 낙타를 타고 있는 차가니언 사절처럼 아주 다르다. 그러므로 이 벽화는 소그드 사회에서 정치・군사는 튀르크인이, 경제・무역은 소그드인이 각기 역할 분담했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조우관과 환두대도를 차고 있는 고구려 사신.
벽화에는 각국에서 온 사절단을 그린 부분이 있는데, 조우관을 쓰고 M자형 장식을 단 칼집에 환두대도를 찬 두 명의 남자 사절이 또렷이 보인다. 이 사신이 바로 우리 한민족인 것이다.

“이 벽화는 소그드인이 그린 것입니다. 아랍이 이 지역을 지배하기 이전이지요.”

“아랍이 지배한 것이 8세기니까 6~7세기겠네요?”

“네, 맞습니다. 이 벽화는 사절도(使節圖)인데, 벽화 오른쪽 맨 끝에 보시면 한국에서 온 사절단도 보입니다.”

“네, 그래서 꼭 보고 싶었습니다. 혹시, 왕의 이름과 재위 시기를 알 수 있나요?”

“주인공은 와르흐만 국왕으로 그의 재위 시기를 고려하면 이 벽화는 650년에서 670년경에 제작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 고구려인이다. 고구려인이야!”

관장의 설명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2004년 당시만 해도 벽화에 그려진 사신이 부여냐, 고구려냐, 신라냐, 발해냐, 고려냐 등등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의 재위 시기를 확인하는 순간, 조우관을 쓴 사신은 고구려인이 틀림없다는 확증이 생겼다. 이 시기에 부여와 발해, 고려는 존재하지 않았다. 7세기는 고구려가 북방 초원길을 장악하고 있던 때여서 신라인이 초원길로 올 수 있는 상황이 못 됐다. 통일신라는 왕의 재위 기간과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고구려인이 확실한 것이다. 이러한 정황이 학계에서도 인정되어 지금은 모두가 고구려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아프라시아브 벽화 모사도.
벽화의 고구려인은 어떻게 머나먼 사마르칸트까지 갔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7세기 국제 정세를 살펴보고 역사적 개연성을 확장하면 이해가 쉬워진다.

고구려는 중국과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성장하였다. 중국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보다는 국가적인 패배를 감수해야 했다. 수나라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과, 고구려와의 전쟁을 금지한 당 태종의 유언이 이를 입증한다. 대국적 자존심이 상한 중국은 고구려를 꺾기 위해 혈안이 되고 이는 끊임없는 침략으로 이어진다. 고구려는 군사적으로 강한 나라였다. 수많은 전쟁에서의 승리는 자부심으로 승화되어 중국과는 별도의 문명권을 형성할 정도였다. 이러한 고구려가 중국을 효율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변국과의 동맹이 필요했다. 수・당으로 이어지는 통일 중국에 대항해 유연, 돌궐, 설연타 등과 동맹 관계를 형성한 것도 격변하는 국제질서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은 고구려의 능동적이고 다중적인 외교 전략이었다. 또한 이러한 외교 전략은 동북아시아의 질서 유지에 기여했다.

7세기 후반, 고구려는 계속되는 당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서역제국과의 연합을 통한 ‘원교근공(遠交近攻・먼 나라와 친하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한다)’ 정책을 편다. 그리하여 연개소문은 최전성기인 사마르칸트의 강국에 사신을 보내게 된다. 사신들은 초원길을 이용하였는데, 이는 고구려가 유목제국들과 오랫동안 교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벽화에 보이는 고구려 사신은 이러한 7세기 후반의 치열해지고 있는 대당 전쟁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고구려 외교 노력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원거리 외교활동을 벌인 사신들의 노력도 헛되이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사마르칸트 왕은 어째서 고구려를 돕지 않았을까. 그것은 이익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소그드인의 품성이 단적으로 알려준다. 즉, 고구려보다는 실크로드의 핵심 시장인 당의 발전이 그들에게 더욱 이익이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고구려는 멸망했지만 중국을 뛰어넘는 새로운 세계와의 연대는 중화문명과는 별도로 독자적인 문명을 생산할 수 있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 이는 글로벌 정책에 입각한 개척정신의 발로이며, 대단히 진취적인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선을 넓히고 국제사회 속에서 고구려의 위상을 인식시키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고구려인의 천하관은 바로 이러한 진취적인 사고와 행동의 소산이었다.

고구려 민족의 이러한 기상은 멸망 후에도 이어져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 장군으로 하여금 실크로드를 장악하게 하였다. 이는 당나라 장수로 실크로드를 개척하기 위함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불과 80여 년 전, 조국이 풍전등화의 어려움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가차 없는 복수일 수도 있었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사마르칸트에 이은 잔혹한 석국 정벌이 자꾸만 이런 생각을 더하게 만든다.

중앙아시아는 우리 민족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다. 고구려가 그렇고 고구려 유민이 그랬다. 구소련 스탈린 시대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때에도 고려인이 있었다. 오늘날도 경제협력과 자원외교 등 중앙아시아에 관한 관심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우리와 뗄 수 없는 곳이 중앙아시아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중앙아시아에 관심을 집중해야 할 때다. 1300여 년 전, 고구려의 글로벌 숨결을 이어받아 21세기 중앙아시아를 새롭게 꽃피울 우리의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 2018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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