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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엔 토기 조각 켜켜이 묻혀 있고 불탄 토층은 그날의 역사를 알려주는 듯

동서문명의 십자로, 중앙아시아를 가다 ⑦ 고선지 장군의 석국 정벌

관광객을 위한 계단이 되어버린 성벽.
“우와! 도로가 엄청 넓어졌네.”

“타슈켄트도 많이 달라졌지요?”

“달라진 정도가 아니고 완전 개벽한 거 같아. 구소련의 향취가 다 없어졌네.”

“하하, 최근에 대대적으로 도시를 정비했어요.”

“그러게, 이젠 옛 건물이 아니면 길 찾기가 어렵겠어.”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는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울퉁불퉁하고 비좁던 거리는 번듯한 대로가 되었다. 구소련 시절의 우중충한 건물들도 많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엔 현대식 건물이 빼곡하다. 예전엔 시내 중심가의 길도 척척 알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도 어렵다. 이 도시를 처음 찾았을 때의 이방인으로 되돌아간 듯하다. 그야말로 수도인 타슈켄트가 유럽의 도시 풍으로 변모했다.

아쉬운 것도 있다. 궤도열차인 트람바이, 전기버스인 트랄레이버스가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타슈켄트의 자랑거리(?)가 없어져서 아쉽다는 것은 관광객의 입장일 뿐이다.

“길이 넓어지고 버스도 많아서 빠르게 다닐 수 있고 좋아요.”

도시인은 언제나 시간에 쫓긴다. 시간에 쫓길수록 생활은 더 불편하다. 그래서 도시는 항상 문명의 이기를 만들어 편안함을 추구한다. 문명은 도시를 양산·발전시키고 도시인은 그 혜택으로 질 높은 생활을 영위하고 싶어 한다. 문명의 힘이 발산되는 곳, 도시의 생명이자 존재 이유다. 그러한 도시인이 배낭을 메고 다른 도시로 떠나면 그 도시에서는 문명과는 비켜선 삶을 찾는다. 인간은 하루라도 문명생활을 못 하면 어딘가 불편하고, 문명생활이 넘쳐나면 또한 피곤해하는 존재인가.

도시개발계획으로 정비된 타슈켄트 시가지.
점심시간이 지났다. 국수와 왕만두 하나로 요기를 하고 민우르크 성터로 향했다. 타슈켄트는 8세기에 석국(石國)으로 불렸다. 이 성은 석국의 도성이었다. 민우르크성은 750년에 고구려 유민(遺民) 출신의 당나라 장군인 고선지(高仙芝)가 이끄는 군대에 점령된다. 고선지 장군은 이미 파미르고원을 세 번이나 넘어 중앙아시아 지역과 파키스탄 지역을 호령하고 있는 천하무적의 장군이었다. 그러한 위세의 고선지 장군이 또다시 파미르를 넘어 파죽지세로 공격해오니 석국은 손쓸 도리가 없었다. 손쉽게 석국의 왕 투둔(Toudoun)의 항복을 받은 고선지 장군은 엄하게 왕을 꾸짖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또다시 신하의 예를 게을리하는가?”

“장군, 우리는 진심으로 예를 다하려 했지만 주변 나라들이 우리의 정성을 위협합니다. 통촉해주십시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지난해도 그대는 내게 똑같은 말을 했소.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던가. 세 번째 맹세가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했거늘. 또 그런 어설픈 충성 맹세로 나를 놀리려 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소.”

“장군 믿어주십시오. 돌기시(突騎施, 튀르크족)가 아바스의 힘을 믿고 우리와 주변 국가를 조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지금도 안서절도사인 나를 실망시키고 있소. 우리의 신하인 양 충성을 맹세하지만 실은 그들을 이용하여 반란을 모색하고 아바스와 내통하고 있다는 걸 내 모를 줄 아는가?”


잡초만 무성한 성터

타슈켄트 모바르나흐 거리에 있는 민우르크 성터의 옛 모습.
당나라의 식민지 지배정책은 고삐를 느슨히 하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기미(羈)정책이었다. 안서절도사인 고선지 장군도 이를 잘 활용하였으나 끝내 신하로서 조공의 의무를 포기한 석국의 왕을 용서할 수 없었다. 이는 고선지가 총괄하는 당의 서역 경영에 도전한 것이나 다름없는 중차대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특히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을 틈타 신흥제국으로 떠오르는 아바스 왕조의 움직임을 알아내 대처하는 것이 서역 경영과 확장을 책임지고 있는 고선지 장군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화뇌동하는 속국들의 행동은 묵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석국 정벌은 급변하는 정세에서 고선지 장군의 서역 경영에 대한 확고부동의 의지를 천명함과 동시에 ‘일벌백계(一罰百戒)’의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민우르크 성터가 아직도 남아 있겠지?”

“글쎄요. 뭐 조금은 남아 있겠죠.”

“옛 석국의 도성을 잘 보존해야 하는데….”

“여기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알지도 못해요. 그 성의 역사를 알려주신 것도 선생님뿐인 걸요.”

“그동안 한 번도 가보지 않았나?”

“갈 일이 없지요. 오직 선생님이 오시면 가는 곳이에요.”

성벽에 박혀 있는 토기 파편과 불탄 토층.
십여 년 전에 왔을 때만 해도 민우르크성은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성벽 주위로 집들이 들어서고 길이 생겨서 남은 성터는 몇 십 미터에 불과했었다. 그때만 해도 성은 흔적조차 없고 잡초만 무성했다. 부서져 내린 성터 사이로 고선지군의 석국 정벌 당시의 흔적으로 여겨지는 불탄 토층(土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약 2센티미터 두께의 회색 지층을 손으로 파내자 뼈와 토기 조각이 나왔다. 순간, 1250여 년 전 고선지 부대의 말발굽에 짓밟힌 아비규환의 역사가 생생하게 느껴졌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다시 성터를 찾았을 때에는 성벽을 뚫고 H빔 공사를 하고 있었다. 너무도 놀라고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제 다시 몇 년 만에 찾아가는 성터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성터의 흔적은 남아 있을까. 도시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십여 년의 민우르크성의 변모를 보고 있노라니 마치 내 소중한 물건이 자꾸만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민우르크 성터는 타슈켄트 역 건너편에 있다. 빼곡한 건물들 사이의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가니 조그만 풀숲 사이로 커다란 토담을 둘러친 건물이 보인다. 민우르크 성터다. 그런데 성벽은 파헤쳐지고 철골 기둥이 세워졌다. 성터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긴 하지만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예전에 남았던 성벽도 대부분 사라졌다. 성벽 여기저기를 계단처럼 깎아서 둘러보게 하였다.

먼지만 풀풀 날리는 성터에는 무수한 발자국이 가득하고 오늘도 흙벽 성터를 오르는 발자국에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절개된 성벽에는 도자기 파편들과 함께 불에 탄 토층이 확연하다. 계단 구석에는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 조각을 늘어놓았다. 실감나게 보는 것은 좋지만 너무도 허술하게 보존하는 것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문화재 보존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인가.


고구려의 혼을 저버리지 않은 고선지

민우르크 성터 입구.
도시문명의 변화는 이 시간에도 가속하고 있지만, 그러한 문명도 역사와 전통은 반드시 보존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문화는 문명과 전통의 조화로운 발전 속에서 오래도록 빛을 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민족이든 자신의 역사와 전통은 스스로가 지켜야 하는 것임을 도시 개발이 한창인 타슈켄트에서 절실하게 되새긴다.

우리는 너나없이 문명의 발전에만 관심이 높다. 인간의 역사는 곧 강자의 역사였고 강자는 곧 첨단문명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절대적 진리다. 결국, 문명의 발전도 강자로 군림하기 위한 욕망 표출에 다름 아니다. 이를 통해 삶의 윤택과 번영을 구가해 왔다는 논리는 한갓 포장에 불과한 것이다. 전 시대에 비해 보다 진일보한 문명의 첨단에는 항상 서슬 푸른 신무기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도 진행 중이고 아마도 인류 멸망의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안서절도사인 고선지 장군 또한 세계 제국을 꿈꾸는 당의 정책을 최전방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오히려 수도 장안(長安)의 현종은 양귀비의 품에서 벗어나질 못했으니, 제국의 건설은 고선지 장군의 두 어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구려 유민인 그가 원흉인 당을 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고선지는 정녕 고구려인임을 포기했는가?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전공(戰功)을 배 아파한 상사가 “개 창자를 씹어 먹을 고구려 노예놈, 개똥을 핥아먹을 고구려 노예놈”이라고 모욕을 해도 결코 고구려인임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선지의 생각은 무엇일까.

고구려 멸망 후 80년. 당은 고구려 유민들이 끈질기게 국가재건운동을 벌이자 이를 사전에 저지하기 위해 고구려인들을 오지로 내몰았다. 이때 고선지 아버지인 고사계(高舍鷄)도 안서지역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아버지가 장수였기에 고선지 또한 유능한 군인이 될 수 있었다.

군인만이 가장 빠르게 그리고 무리 없이 자신의 기반을 넓혀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고구려인이지만 중국과 대등한 문명을 열어간 고구려의 기상은 그렇게 쉽게 식은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고선지 부대의 선봉은 고구려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영토 확장은 당나라의 몫일지라도 진정한 승리는 고구려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석국을 비롯한 72개국을 복속시킨 이유였을까? 지장(智將)이기도 한 고선지의 생각은 또 있었을 것이다.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아브 궁전 터에서 발굴된 벽화에는 사마르칸트의 왕이 외국 사절단의 알현을 받는 장면이 있다. 그중에는 머리에 조우관을 쓴 두 명의 사절이 있는데 이는 다름 아닌 고구려인이다.

벽화의 주인공은 바르흐만 왕으로 650년에서 660년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고구려가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하며 초원로를 따라 돌궐인 튀르크인과 상호 교통했음은 이미 알려져 있는데, 이때에도 고구려 사절은 초원로를 따라왔지만 사정은 급박했다. 신라와 함께 협공하는 당을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도 튀르크와 연대하여 당을 협공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튀르크는 협조하지 않았고 고구려는 멸망했다.

나라 잃은 유민이 당해야 하는 치욕을 참으며 젊은 고선지는 망국의 역사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 함께 튀르크인에 대한 믿음도 없었을 것이리라. 그 후 안서절도사가 되어 망국의 한을 하나씩 실천에 옮겼다면 너무 지나친 생각일까. 750년 석국을 정벌하기 몇 달 전, 걸사국(師國)인 사마르칸트를 먼저 평정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연유에서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옛날의 영화는 간 데 없고…

우즈베키스탄 과학아카데미 부설 전통예술연구소의 아카데미크 르드벨라제 박사는 민우르크 성터와 함께 ‘악테파(Ak-Tepa)’ 유적도 중요하다고 귀띔해준다.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악테파는 당시 귀족들의 저택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상류층이 살던 곳이라 왕궁 못지않은 시설과 함께 별도의 성을 쌓았다. 그리고 외곽 방어의 역할도 겸했다.

자동차로 한 시간여를 달려서 악테파를 찾았다. 하지만 ‘황성옛터’라 했던가. 고선지 장군의 전위대에 의해 파괴되고 수백 년을 방치해 오는 동안 그 옛날의 영화는 간 곳이 없다. 5월임에도 따가운 햇살과 거친 바람이 주민들이 파헤친 구덩이의 먼지만을 뽀얗게 일으킬 뿐이다. 역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일이 기쁨과 환희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쓰라림과 반성을 통한 새로운 다짐이라면 악테파에서도 그래야 할 것이다.

고선지 장군은 석국 정벌뿐 아니라 돌기시도 응징하고 그 왕을 사로잡아 석국의 왕 투둔과 함께 장안으로 압송했다. 이로써 반당(反唐) 움직임을 보이던 주변국을 제압하고 서역 경영에 힘쓸 즈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 그것은 수도로 압송한 석국왕 투둔을 문신들이 살해한 사건이다. 당에 복속한 왕에게는 별도의 직위를 주고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 관행인데, 어찌하여 그것도 포로인 왕을 살해했을까.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세 번의 약속을 어긴 것에 있지 않았을까? 신의(信義)를 중시하는 국가의 수도 한복판이라면 배신감에 찬 여론몰이식 사냥은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이슬람 국가들의 단결로 이어져 1년 후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 장군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겨주었다. 그 원인 제공자는 바로 당나라의 위정자들이었다. 이후 중국은 서역 경영에 치명타를 입는다. 고선지 장군을 필두로 세계 제국으로 치닫던 당은 이슬람의 힘에 밀려 실크로드에서의 전성기를 마감해야 했으니 역사의 사필귀정(事必歸正)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 2018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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