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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르다리야를 따라 흐르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동서문명의 십자로, 중앙아시아를 가다 ④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80년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37년 10월, 시베리아 연해주에 살고 있던 17만여 명의 고려인은 이유도 모른 채 강제로 화물기차에 태워졌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스탈린과 인민위원장 몰로토프의 ‘극동지방 고려인을 강제 이주시키라’는 극비 명령 때문이었다. 명령의 핵심은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소련정부는 고려인들의 반대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지도자급 인사 2500여 명을 간첩 혐의를 씌워 미리 처형했다.
강제 이주는 지체 없이 진행되었다. 고려인들은 통보 며칠 만에 연해주의 집결지에 모였고, 이유도, 목적지도 모른 채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짐짝처럼 태워졌다. 무고한 그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쓰러지는 죽음들을 목격하며 공포 속에서 한 달을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벌판에 버려졌다.
고려인들이 최초로 정착했던 바스토베 언덕에 세워진 정착비.
고려인이 처음 도착한 곳은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다. 알마티에서 4시간 거리에 있는 우슈토베역은 구소련 시절의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역은 이따금 오가는 여객보다는 화물을 실어 나르는 열차들만 길게 늘어서 있다.

“지금은 역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우슈토베 마을이 있지만 당시에는 허허벌판이었습니다.”

우슈토베역에서 북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고려인들의 첫 정착지인 바스토베 언덕이 있다. 갈대숲을 지나 언덕에 오른다. 그다지 높지 않은 언덕이지만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기차에서 내린 고려인들은 언덕의 경사면을 바람막이로 삼아 토굴을 팠다. 지붕은 주변의 갈대를 엮어서 만들었다. 그렇게 첫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냈다.

당시 토굴을 파고 살았던 곳에는 최초 정착 기념비가 세워졌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협회가 2012년에 세운 것이다. 올해는 이주 8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하며 조그마한 광장도 만들었다.


공동묘지로 변한 고려인 첫 정착지

고려인 1세 노동영웅의 녹슨 묘비.
오늘의 바스토베 언덕은 공동묘지로 변했다. 많은 고려인이 이곳에 묻혔다. 맨 앞줄에는 1세대의 한글 묘지명이 나란하다. 쇠로 만든 묘비는 머나먼 이국땅에서의 풍파를 오롯이 간직한 듯 붉은 녹만 가득하다. 노동영웅 묘지도 보인다. 고려인은 여타 소수민족 중에서 가장 많은 노동영웅을 배출했다. 고려인들의 노동력과 농업기술은 오늘의 중앙아시아를 풍요롭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고려인들은 어디에서든 학교부터 지었습니다.”

바스토베 언덕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코쉬카르바예프 학교. 이 학교는 1938년에 고려인이 세운 학교다. 우슈토베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고려인들은 학교부터 지었다. 이 학교는 고려인이 만든 첫 번째 학교다.

“개교 당시에는 5명의 학생과 8명의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교육열이 강한 고려인들은 자녀들의 교육에 온 정열을 쏟았습니다.”

1937년 우슈토베에 정착한 고려인들이 설립한 학교.
고려인 3세 김 예브게니아 선생이 복도에 전시된 80년 학교의 역사를 설명해 주었다.

“현재는 236명의 학생 중 고려인은 56명뿐입니다.”

20년 전만 해도 이 학교에는 70% 이상이 고려인이었다. 역대 교장들도 모두 고려인이었는데 최근에 와서야 바뀌었다. 고려인들의 집성촌은 해체된 지 오래다. 더 나은 삶을 찾아 알마티 같은 대도시나 외국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얼마 남지 않은 집에는 노인들만 남아 농사를 짓고 살아간다. 그래도 김 선생의 열정은 대단하다.

“이제는 모두 대도시로 떠나지만 그 뿌리인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잊으면 안 됩니다. 역사를 알아야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고려인들은 오늘도 우리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가르치고 있고 학생들도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있는 국립 고려극장 전경.
알마티 시내에는 고려인들의 정체성과 전통문화 보전(保全)에 힘써 온 고려극장이 있다. 고려극장 건물에는 한복을 입은 여인이 장구춤을 추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누가 보더라도 이곳이 고려극장임을 알 수가 있다. 극장 안은 지난 몇 년간 공연했던 포스터들이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넓은 연습실은 배우들의 리허설로 훈훈하다.

“우리 극장은 85년의 역사를 지닌 최초의 해외 극단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한민족 공연단체입니다.” 고려극장 대표 김조야 씨가 고려극장의 역사에 대해 알려준다.

“고려극장은 유일한 아카데믹 극장입니다. 우리 극장이 아카데미 칭호를 받은 것은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선배 배우들의 노고의 결실이며, 오늘의 후배들도 이를 지켜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고려극장은 1968년 국립극장이 되었고 카자흐스탄 정부의 배려로 2002년에 현재의 전용 극장을 갖게 되었다. 또한 모든 공연은 한국어로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설립 초기부터 변함이 없다. 관람객을 위하여 러시아어와 카자흐어로 동시통역한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한국어로 하는 공연이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한국어를 공부하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해답은 명쾌했다.

“별도로 한국어를 공부하는 시간은 없습니다. 모든 대사를 그냥 외우도록 합니다.”

고려극장의 단원은 96명이고 배우는 50명이다. 이들의 한 해 공연 횟수는 평균 80회다. 일주일에 한 편 이상을 공연하는 강행군이다. 하지만 배우와 단원들은 힘들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 고려인의 문화와 정체성을 널리 알리려는 열정뿐이다.

고려극장은 고난과 결핍의 힘든 시절을 이겨내고 수많은 배우와 가수, 극작가와 작곡가를 배출했다. 이들은 조국과 멀리 떨어진 중앙아시아에서 한민족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누구보다도 커다란 역할을 해왔다. 고려극장의 역사는 바로 고려인의 역사이자, 카자흐스탄 국민과 정부가 고려인에게 베풀어준 우호의 역사이기도 하다.


홍범도의 거리

크질오르다에 있는 홍범도 장군 묘역.
카자흐스탄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연해주 지역에서의 벼농사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했다. 고려인은 모두 9만 5000여 명이 이주하였는데 제일 많은 곳은 3만 5000여 명이 이주한 크질오르다이다.

알마티에서 크질오르다까지는 1100km가 넘는 거리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곧장 자동차에 올랐다. 점심도 간단하게 먹고 길을 재촉했지만 크질오르다의 호텔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자정이 다 되었다.

‘붉은 도시’라는 뜻의 크질오르다는 1925년부터 5년간 카자흐자치공화국의 수도였다. 수도가 알마티로 이전되기 전까지 중심 도시였다. 이 도시는 고려인들에게도 초기 정착 과정에서 매우 의미 있는 곳이다. 《고려일보》의 전신인 《레닌기치》, 고등교육기관인 ‘크질오르다 사범대학’과 고려극장 등이 모두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크질오르다는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고려인이 문화적 정체성을 잃지 않고 새로운 한인사회를 건설한 제3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1970년까지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노동영웅은 모두 67명이 탄생했는데, 크질오르다 출신이 32명이나 됩니다.”

안내를 맡은 카자흐인 무라트 씨가 자료를 보고 알려준다. 이곳에 정착한 고려인들도 다른 지역처럼 집단농장인 콜호스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선진 농업기술을 활용하여 다른 지역의 농장보다 훨씬 많은 수확량을 생산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크질오르다는 농업생산 홍보영상물에 언제나 모범 사례로 등장하게 되었다.

크질오르다는 애국지사들이 활약한 장소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인물이 홍범도 장군이다. 홍범도 장군은 1920년 6월, 일본군 19사단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궤멸했다. 임시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 전사자는 157명이나, 홍범도 일지에는 310명으로 되어 있다. 독립군은 4명만 전사했다. 그해 10월, 일본군은 보복전에 나섰다. 홍 장군은 김좌진 장군과 합세하여 다시 일본군을 대파했는데, 그것이 유명한 청산리전투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 사상자는 100여 명이지만 일본군 전사자는 2000여 명, 부상자는 1000여 명이었다.

1923년 소련의 압력으로 무장단체가 해산되자, 홍 장군은 연해주의 집단농장에서 일하다가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때에 크질오르다로 이주되었다. 그는 낮에는 정미소 노동자로, 밤에는 고려극장의 경비로 일했다. 고려극장은 1942년 홍범도 장군을 위해 그의 일대기를 그린 연극 〈홍범도〉를 공연했다. 장군을 흠모하는 고려인의 마음을 전달한 것이다. 그는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가 1943년 10월 25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크질오르다 시내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묘역을 찾았다. ‘통일문’이라 쓰인 입구를 들어가니 조그마한 묘역 끝, 장군의 유해가 안치된 곳에 늠름한 모습의 흉상이 우뚝하다. 흉상 왼쪽에는 1937년 강제 이주의 아픔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이라고 새겨진 문구가 살아생전 장군의 염원을 말해주는 듯하다.

홍범도 장군의 항일전 승리는 ‘날으는 홍범도가’라는 노래로도 불렸다. 이 노래는 독립군과 조선인들의 가슴속에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크질오르다에는 ‘홍범도의 거리’가 있다. 1994년 고려인들의 청원을 카자흐스탄 정부가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인물이 오히려 타국에서 인정받고 있다니 기쁨보다는 왠지 우울함이 앞선다.


돌피를 뽑아 먹으며 살았다

우즈베키스탄의 각 지역으로 이주한 시발역인 아리스역 전경.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17만여 명의 고려인은 대부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집중적으로 배정되었다. 우즈베키스탄으로는 7만 3000여 명이 이주되었는데, 그 시발점이 된 기차역이 아리스역이다.

아리스역은 심켄트의 북서쪽, 자동차로 1시간 30분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1904년에 건설된 이 역은 ‘중앙아시아의 출입국’으로 불린다. 이는 아리스역이 유럽과 시베리아, 우즈베크와 카스피해 및 키르기스와 극동을 연결하는 허브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리스역은 오늘날에도 그 명성에 걸맞게 거대하다. 20여 개의 철도 라인은 각 지역에서 모인 화물차량들로 빼곡하다. 가히 중앙아시아 철도의 중심지임에 손색이 없다.

1937년 9월, 연해주의 각 지역에서 출발한 열차들은 20일 내외에 걸쳐서 아리스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틀 이내의 대기 시간을 거쳐 우즈베키스탄의 각 지역으로 수송되었다. 고려인들은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나만강, 안디잔을 비롯하여 우르겐치, 아랄해 인근의 군드라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으로 이주되었다.

“배고프고 먹을 것이 없어서 돌피를 뽑아 먹으며 살았다오.”

5살 때 우르겐치로 강제 이주된 강조야 할머니는 당시의 시절을 회상하며 마른 눈물을 훔쳤다. 돌피는 묵정밭이나 들녘에서 자라는 야생 잡초다.

하지만 고려인들은 절망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의 강인함과 지혜로움은 마침내 황량한 벌판을 옥토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돌피 대신 벼 이삭이 출렁이는 황금벌판을 일궈냈다. 우르겐치에서 누쿠스로 향하는 들녘에는 황금빛으로 여물어가는 벼들이 출렁이고 있다.

“우즈베크인들은 고려인을 일컬어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준 형제’라며 고마워합니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지 80년,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 소수민족 중 단연코 으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고려인들에게는 아직도 걱정거리가 많다. 타슈켄트에서 《고려신문》을 발간하는 고려인 2세 김 부라트 편집장은 뿌리를 잊어가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1세는 거의 노령으로 죽어가고 있고, 자신의 역사를 기억조차 못 하는 뿌리 없는 고려인들은 오늘도 러시아로 한국으로 또 머나먼 이국으로 떠다니고 있습니다.”

호텔로 향하는 마음이 무겁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디아스포라. 이는 비단 고려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중국의 조선족, 하와이와 남미로 노동이민을 떠난 동포들까지 한민족 디아스포라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 201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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