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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feature] 대한민국을 지킨 참군인 백선엽 장군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 당시 부산 교두보 방어작전의 최대 결전이었던 다부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만약 다부동전투에서 우리가 패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전쟁 중 평양에 첫 번째로 진군했고 서울 재수복의 선봉에 섰던 명장이기도 하다. 32세의 나이로 국군 최초로 대장에 오른 ‘최고의 야전사령관’이기도 했고 휴전을 전후해 두 번이나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사진 : 백선엽 장군 제공
올해는 6·25전쟁 발발 67주년이 되는 해다.

전쟁을 체험했거나, 체험하지 않은 세대라고 하더라도 6·25전쟁 하면 떠올리는 인물이 있다. 백선엽 장군이다. 그의 이름은 지금도 참군인의 전형으로 6·25전쟁의 영웅으로 회자된다. 우리 대한민국이 6·25전쟁에서 적화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백선엽 장군 같은 참군인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백선엽 장군. 그는 6·25전쟁 당시 부산 교두보 방어작전의 최대 결전이 벌어진 다부동전투에서 ‘세계 전사상 최후의 사단장 돌격’을 감행했던 인물이다. 만약 다부동전투에서 우리가 패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전쟁 중 평양에 첫 번째로 진군했고 서울 재수복의 선봉에 섰던 명장이기도 하다. 32세의 나이로 국군 최초로 대장에 오른 ‘최고의 야전사령관’이기도 했고 휴전을 전후해 두 번이나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백선엽 장군은 올해 97세다. 건군(建軍)에도 참여한 백 장군은 60년 전인 1950년 6월 불과 서른 살의 나이에 1사단장으로 6·25를 맞았다.

1950년 8월 낙동강 방어선상의 다부동전투는 미국 전사에도 6·25전쟁 최악의 전투로 기록됐다. 그는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가 지휘한 1사단은 다부동전투에서 8000명가량의 병력으로 북한군 2만여 명의 총공세를 한 달 이상 막아냈다. 그는 6·25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1000일 이상을 전장에서 보낸 야전군 사령관이었다.


부친 사망 후 집단 자살까지 생각했던 백 장군 가족


백선엽 장군은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백윤상·방효열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인엽(후일 육군 중장으로 예편)은 1923년생인데 동생이 태어난 그 2년 후에 아버지가 별세했다.

부친이 사망한 이듬해 백 장군의 가족은 고향 덕흥리를 떠나서 평양으로 갔다. 모친이 어떻게든 아들 둘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겠다는 일념에서였다. 평양에서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생활비가 바닥났다. 어머니가 선택한 길은 가족 4명의 집단자살이었다. 백 장군의 회고다.

“뒷날, 어머니와 누나에게 들은 얘기지만, 일가 넷이 대동교에서 투신하려고 집을 나섰어요. 죽으러 가는 길에 누나가 어머니에게 ‘나무도 3년이 되어야 뿌리를 내리는데, 우리도 3년은 견뎌야 할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대요. 어머니는 열세 살 딸의 하소연을 듣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귀가했다고 합디다.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던 어머니와 누나는 그로부터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어머니는 ‘평안고무’에 취업해 고무신을 만드셨고, 누나는 ‘산십’이라는 견사 회사에 취직했어요. 어느새 안정을 찾았지요.

저축도 늘어나 신리에다 집 한 채를 사서 이사하게 되었죠. 누나는 곧 석탄 판매상을 하던 댁으로 시집을 갔는데, 어머니가 그 사업을 도우면서 경제적 여유도 생겼습니다.”


소학교 졸업 후 그는 평양사범학교와 평양상업학교 두 곳에 합격했는데 결국 평양사범을 선택했다.

백 장군은 1939년 평양사범을 졸업하고 1940년에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한다. 1941년 12월에 제9기생으로 졸업했는데 그가 졸업한 시기는 이른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시기였다. 그는 ‘견습 사관’으로 동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군 보병 제28단(연대급)에서 근무했다. 이어 소위로 진급해 1943년에는 함경북도와 접하는 간도성, 즉 현재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던 간도특설대로 전임됐다.

그는 그곳에서 많은 한국인을 만났다. 그곳 군관의 대부분이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부대는 후일 국군 장성을 다수 배출했다. 한국전쟁 중 제1군단장으로 전투를 벌였던 김백일(1군단장 재임 중이던 1951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전사) 장군은 그곳 중대장이었다. 한국 해병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현준 장군과 김석범 장군, 그리고 훗날 육군대장으로 진급한 임충식 장군도 그곳 출신이었다. 그 부대 출신으로 6·25전쟁 중 연대장급으로 활약한 이는 부지기수다.


6·25전쟁에서 만나게 될 적장들을 평양에서 미리 만나다

1951년 7월, 망중한을 즐기는 유엔 측 휴전회담 대표들. 왼쪽부터 미8군 참모부장 행크 호디스 소장, 알레이 버크 제독, 연락장교 이수영 대령, 백선엽 장군.
광복 후 그는 부대를 탈출해 아내와 어머니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 평양으로 돌아왔다.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외가 쪽 친척인 송호경씨의 소개로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조만식 선생은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해 평양 일대의 치안 유지에 힘쓰면서 장차의 독립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김일성도 자주 봤다고 한다.

“당시 저는 사무소 입구에 책상 하나를 놓고 접수계 역할을 했는데, 김일성은 사무실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그때 본 김일성은 호리호리하고 머리를 바짝 치켜 깎은 30대 청년으로서 양복 차림이었죠. 조만식 선생은 그를 ‘김일성 장군’이라고 깍듯하게 불렀지만, 저는 너무 젊은 그와 1910년대부터 명성이 높았던 ‘항일의 노영웅 김일성 장군’을 연결해서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내가 복무하던 간도특설대에 쫓겨 소련으로 도피했던 중국 동북항일연군의 조선계 부대의 김일성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와 행동을 함께했던 최현(후일의 인민군 대장), 최용건(후일의 인민무력상), 김책(6·25 남침 시 전선사령관) 등도 우리 사무실에 들락거렸는데, 이름이 귀에 익어 백두산 일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사람들이라고 확신은 했습니다.”

6·25전쟁 당시 남북의 군대를 각각 이끌던 적장들과의 숙명적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물론 훗날 동지가 된 사람들과의 만남도 있었다.

“연락이 편리한 사무소여서 많은 옛 전우와 지인이 찾아왔습니다. 정일권(만주군 대위 출신, 후일 육군대장·육군참모총장·국무총리·국회의장 역임)씨도 여기서 처음 만났습니다. 정일권씨와 얘기하고 있는 중에 그 옆으로 김일성이 지나갔는데,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백일 선배도 나의 소개로 김일성과 서로 인사 정도의 얘기를 했습니다.”

소련군이 진주한 평양에서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이 공산세력을 등에 업은 김일성을 대적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평양에서 민족주의자의 중심은 조만식 선생이 이끌었던 평안남도인민위원회의 사무소였다. 그러나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11월 하순, 김일성의 친위대인 적위대가 사무실을 덮쳐 백 장군의 동생 백인엽씨가 대장이던 경호대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정일권씨가 찾아와 함께 월남할 것을 권했다. 백 장군은 우선 동생(인엽)부터 데리고 월남해달라고 부탁했다.

김일성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된 후 백 장군은 조만식 선생에게 월남을 권했다. 조만식 선생과 백선엽은 고향이 평안남도 강서군으로 같았다. 조만식 선생은 백 장군의 월남 권유에 “나는 북쪽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 이들을 버리는 일은 할 수 없다. 자네 같은 젊은 사람은 남으로 가야 한다”면서 백 장군의 월남만 권했다.

백 장군은 김백일 장군과 협의한 후 같은 간도특설대 출신인 최남근 등과 함께 월남했다. 월남 후 이들 셋은 훗날 국방경비대가 되는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갔다. 영어를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입교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부대 창설이었다.

백 장군은 부산 제5연대로 갔다. 서류상 임관 날짜는 1946년 2월 26일자였다.

때가 때였던 만큼 백 장군의 승진은 빨랐다. 1946년 2월 보병 제5연대 A중대장, 그해 9월 제5연대 제1대대장, 1947년 1월 1일 중령 진급과 동시에 제5연대장이 되었다. 1947년 12월에는 부산 주둔 제3여단(여단장 이응준 장군)의 참모장으로 전출되었다가 1948년 4월 11일 통위부(미 군정기의 국방과 경비를 전담하던 기구) 정보국장 겸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으로 상경했다.

1949년 7월 30일 백선엽 대령은 광주 주둔 제5사단장이 되었고, 1950년 4월 23일에는 서부전선 최일선을 담당하는 제1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전임 2개월 후 일어난 6·25전쟁 발발 당시에는 경기도 시흥에 있던 육군보병학교에서 ‘고급간부 훈련’을 받던 중이었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사단 사령부로 복귀해 전쟁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로부터 약 1000일 이상 최전선에서 무용(武勇)을 떨치며 ‘한국군 최고의 야전사령관’이란 명성을 얻게 된다.


“내가 물러서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1951년 2월 제1사단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앞줄 중앙). 그 오른쪽이 백선엽 장군.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의 기습은 속도전이었다. 개전 3일 만에 의정부-미아리로 진격한 북한군에 의해 서울이 함락됐다. 개성-임진강 정면을 방어하던 제1사단은 서울이 떨어진 다음 날인 9월 28일 오전까지도 서부전선에서 적과 싸웠다. 그 결과 적의 포위에 빠진 1사단은 행주나루에서 한강을 도하해 부대를 재편성하고 후퇴 중에도 지연전을 전개했다.

전쟁 발발 1개월도 안 된 7월 20일에는 대전이 함락됐다. 닷새 후인 7월 25일에 백선엽 대령은 준장으로 진급했다. 한강 이북에서 남은 최후의 사단으로서 선전하고 건제(建制)를 유지한 채 도하한 전공이 장군 진급 사유였다. 그 직후 백 장군에게는 자신의 운명은 물론이고 조국의 운명을 건 혈전을 벌여야 했다. 다부동전투가 그것이다.

북한군은 ‘8월 공세’를 벌이며 국군과 미군을 밀어붙였다. 당시 백 장군의 제1사단은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8월 중순, 제1사단의 정면에는 북한군 제3사단, 제13사단, 그리고 제1사단의 1개 연대가 공격을 해오고 있었다.

다부동전투는 부산을 사수하려는 국군과 미군의 운명을 건 결전이었고 8월 15일은 그 위기의 절정이었다. 곳곳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북한군은 8월 15일까지 부산을 함락시키려던 당초 계획을 수정해 8월 15일을 ‘대구 해방의 날’로 정하고 총공세를 펼쳤다. 치열한 방어전으로 한국군의 피로도는 한계점에 도달했다. 적은 화력이 우세한 미군 방어지역을 회피해 제1사단 정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백 장군의 회고다.

“피아가 너무 가까이서 대치해 사격보다 수류탄을 주고받는 혈투가 사단 정면 20km 전 전선에서 밤낮으로 계속됐습니다. 고지마다 시체가 쌓이고 시체를 방패 삼아 싸운 겁니다. 드디어 한계 상황에 이르렀어요. 저는 8월 15일 즉시 대구의 미 8군사령부와 2군단사령부(군단장 유재흥 준장)에 증원부대를 요청했습니다. 곧 ‘미 25사단 27연대와 국군 8사단 10연대가 증원부대로 투입될 테니 그때까지 전선을 지탱하라’는 회신이 날아왔습니다.”

증원 부대가 도착한 후 상황은 외양상 대등한 결전이 됐다. 이어지는 그의 회고다.

“우리 1사단은 산 위에서 싸우고 미 27연대는 도로상에서 전차 대 전차로 싸우는 대등한 결전의 양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적은 18일부터 단말마적인 공세로 나왔어요. 다시 전선에서 육박전이 전개돼 수류탄과 총검으로 싸우며 일진일퇴를 거듭했죠. 적의 포로와 부상병 입에서는 술 냄새가 났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직후인 1950년 9월 16일 대구 동촌에서 모처럼 여유를 찾은 백선엽 장군.
8월 19일 낮에는 미 23연대도 증파되어 1사단의 뒤를 받쳤다. 이렇게 한국전쟁 중 국군사단에 미군이 두 겹으로 투입된 것은 다부동전투가 유일한 경우였다.

8월 20일에는 미 27연대 좌측 능선을 엄호하던 국군 11연대 1대대가 고지를 탈취당하고 다부동 쪽으로 후퇴한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미 8군으로부터는 ‘한국군은 도대체 싸울 의지가 있느냐’ 하는 질책이 들려왔다. 측면이 뚫린 미 27연대는 퇴로가 차단되기 전에 후퇴하겠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다부동이 뚫리면 50리 남쪽 대구는 곧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마련이다. 대구가 함락되면 미군은 울산-밀양-진해를 연결하는 데이비드슨선 아래로 물러나게 되어 있었다. 데이비드슨선은 미군 철수의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 확보용이었다.

백 장군은 미 27연대장에게 ‘기다려달라. 내가 직접 가보겠다’고 말하곤 현장으로 달려갔다. 우리 군 2대대는 뿔뿔이 흩어져 후퇴하고 있었다. 장병들이 계속된 주야격전으로 지친 데다 보급이 끊겨 이틀째 물 한 모금 못 마셨던 것이다. 그때 그는 후퇴해 오는 병사들 앞에 버티고 서서 병사들을 땅바닥에 앉히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이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 여기가 격파되면 나라가 망하고, 우리들에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대한민국이 멸망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은 모두 같다. 보라, 우리를 돕기 위해 지구 저쪽에서 온 미군이 저 아래 골짜기에서 싸우고 있지 않는가. 그들을 버리고 우리만 살겠다고 하는 것은 대한의 남아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선두에 서겠다. 내가 물러서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백 장군은 돌격 명령을 내리고 자신이 선두에 섰다. 곧 병사들의 함성으로 골짜기가 진동했다. 2대대는 삽시간에 488고지를 재탈환했다.

일본의 군사 저널리스트 이노우에 와히코(井上和彦)는 “백선엽 장군이 세계 전사상(戰史上) 최후의 장군 돌격을 감행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다부동전투의 고비이자 전환점은 8월 21일이었다. 그날은 피아간에 기습에는 기습, 돌격에는 돌격으로 맞서며 고지와 능선마다 시체가 쌓여 갔다.

백선엽 장군의 증언이다.

“적은 일몰 직후부터 공격 준비 사격을 개시하더니만 T34/85형 탱크 14대를 앞세우고 미 27연대의 방어선을 돌파해 왔어요. 피아 모두 모든 중화기를 최대 발사 속도로 발사했습니다. 다부동 골짜기는 발사음과 작렬음의 지옥이었습니다. 탄약 무제한의 싸움이었죠. 교전은 다섯 시간 동안 계속됐어요. 적은 맹렬한 탄막(화력의 벽을 만들어서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물러갔어요.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전지 앞에 적 전차 7대를 비롯해 중장비, 차량 등이 다수 버려져 있습디다. 미군 추산으로는 적 전사자가 1300명이었어요.”

8월 22일에 마침내 전세는 아군 쪽으로 기울었다. 팽팽한 접전이 균형의 고비를 넘긴 것이다.


평양 최초 입성

1953년 3월 26일 미8군사령부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테일러 장군이 백선엽 장군에게 미 공로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8월 말 1사단은 다부동 지역을 미 1기병사단에 이양하고 팔공산 북쪽으로 이동했다. 1사단은 다부동전투에서 장교 56명을 포함, 2300명의 전사자를 냈다. 적군은 2배 이상인 5690명이 전사한 것으로 집계됐다. 백 장군은 이 전투를 이렇게 평가한다.

“살아남은 자의 훈장은 전사자의 희생 앞에 빛을 잃습니다. 매일 주저앉아 울고 싶을 심경 정도의 인원 손실이었습니다. 그러나 후방의 청년·학생들은 전선을 자원하여 그 틈을 메워주었습니다. 인근 주민들은 지게를 지고 나와 포화를 무릅쓰고 전방 고지에 탄약, 식량, 물과 보급품을 져 올렸습니다. 이 전투는 나의 1사단뿐만 아니라 국군 1개 연대, 미군 2개 연대 등 3개 연대가 증원부대로 가담했습니다. 국군, 우방, 국민의 승리였습니다.”

이후 1사단은 승승장구했다. 1950년 10월 한·미 양군은 38선을 돌파, 드디어 평양 공략에 나섰다. 미 1기병사단과 1사단이 ‘평양 제1번 입성’을 사단의 자존심, 나아가 나라의 명예를 걸고 경쟁했다. 백 장군은 선두 전차부대의 1번 탱크에 탑승해 진격을 독려했다.

‘평양 입성 제1번’은 백 장군의 1사단이 차지했다. 대동강에서 멱을 감으며 자란 백 장군은 평양 접근로를 꿰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1사단은 청천강을 넘어 평안북도 운산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대거 개입으로 전 전선이 무너졌다. 적의 대부대에 포위된 1사단은 다행히 미군의 엄호를 받아 이번에도 부대의 건제를 유지하며 후퇴했다.

3월 15일 우리 국군과 미군은 서울을 재탈환했다. 그 영예도 한강 도하작전을 감행한 1사단이 차지했다. 그로부터 꼭 한 달 후인 4월 15일, 그는 소장으로 진급해 동해안 지역을 담당하는 국군 제1군단장이 되었다. 그때 북진을 선도한 것은 백 군단장의 1군단이었다. 오늘의 휴전선이 38선을 넘어 강원도 북부 해안 고성까지 치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1군단의 전공을 짐작할 수 있다.

1952년 1월 12일, 그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4월 5일에는 새로 창설된 제2군단장이 되어 중부전선을 담당했다. 이어 7월 23일에는 육군참모총장에 오르고, 1953년 1월 31일 국군 최초의 대장으로 진급했다. 주한 미 군사고문단(KMAG)이 1951년 말에 작성하여 미 정부에 보고하고, 1992년에 비밀 해제된 문건이 있다. 이 문건에는 이승만 대통령부터 일선 주요 사단장까지 한국의 전쟁지도부 28명에 대한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이승만, 장면, 이기붕 등 정치인에 대한 평가와 이종찬 장군 등 군인들에 대한 평가가 있는데 백선엽 장군에 대해서는 최상의 평가를 하고 있다.

〈소장. 33세(실제 만 31세, 너무 젊었던 그는 당시 대외적으로 자신의 나이를 두 살 올리고 있었다). 일본 만주군관학교.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육군 중위. 한국 육군에서 최상(best)의 야전지휘관으로 평가됨. 참모와 지휘관 양쪽 모두 탁월한(exllent) 기록 보유. 친미적.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말하고 읽고 씀. 한국 육군에서 가장 걸출한(most outstanding) 장교임〉

1954년 2월 14일 155마일 전선을 전담하는 제1야전군 사령부가 창설되자 그는 육군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 그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3년 9개월 동안 야전군을 키우고 1957년 육군참모총장으로 복귀했다.

두 번째 육군참모총장을 약 2년간 역임한 그는 연합참모본부 의장으로 전임해 1년 남짓 근무하다가 4·19가 일어났던 1960년 5월 31일 군복을 벗었다. 군인 백선엽은 국내에서도 존경을 받았지만 우방국에서 더 존경을 받았던 것 같다. 아이젠하워, 아버지 부시, 아들 부시 등 미국의 역대 대통령이 그를 ‘백악관의 귀빈’으로 맞았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본의 자위대 고급장교들과 군사연구가들도 ‘실전에서 배우기’ 위해 계속 백 장군을 찾았고 그의 전투는 주요 연구의 대상이었다. 오카자키(岡崎) 연구소의 주임연구원 오가와 아키라(小川彰)는 이런 말을 했다.

“백 장군에게 한국이 구원받은 것은 1950년 8월 21일 다부동전투다. 만약 이 전투에서 다부동이 뚫렸다면 그 후 부산까지의 함락은 한순간이었을 것이다. 만약 개전 2개월인 이 시점에서 북조선군이 부산을 점령했다면 미군의 본격적인 지원은 시기를 놓쳐 오늘날 조선반도는 전부 북조선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평가받는 그이지만 전장에서의 공포는 없었을까. 백 장군은 이런 대답을 내놓았다.

“공포심을 극복하는 것은 책임감과 의지입니다. 전투는 피아 지휘관이 벌이는 의지의 충돌인데, 누가 책임감이 강하냐에 따라 승패가 판가름 납니다.”

역시 그는 참군인이다.
  • 2017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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