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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세계에서 바라본 현대미술

《그림의 맛》 최지영 작가

그야말로 미식의 시대다. 텔레비전에는 먹방과 쿡방이 넘쳐나고 스타 셰프는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다. 이런 요즘 눈에 띄는 책 한 권이 있다. 현대미술과 음식을 통해 삶을 통찰하는 《그림의 맛》이 바로 그 책이다. 레이디 가가, 잭슨 폴록, 무라카미 하루키 등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현대의 예술가가 현대미술과 음식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함께 버무려진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현대미술과 집밥에서 분자요리까지 난해한 미식의 세계를 쉽게 풀어낸다.

사진제공 : 홍시
《그림의 맛》을 쓴 최지영씨는 책의 내용만큼이나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대학에서 교육학과 영어교육을 전공한 후 로레알, 필립모리스 등 외국계 기업에서 일했다. 주로 조직개편, 기업문화 혁신 등 기업의 가시적인 경영성과를 내야 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사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할 당시에는 내가 원하는 일이 뭔지 알지 못했어요. 그땐 단순히 취업하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죠. 어찌하다 보니 내 선택과는 상관없이 뽑아주는 회사에 입사했고 부서 배치를 받았죠. 이론상으로는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면 얼른 풀고 다시 끼워야 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쉽지 않더라고요.”

더 많은 연봉과 승진을 바라보며 달려가던 어느 날,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는 회사원이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정해진 가이드라인과 룰 안에서 얌전히 지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박차고 나오는 성향이 무지 강한 사람이었어요. 갇힌 생각을 끔찍이 싫어하고 새로운 것, 파격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후 내적 갈등이 심했어요.”

미로에 갇힌 채 빠져나오지 못하다 보니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번아웃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일을 계속할수록 조직의 소모품으로 자신이 마모돼버리는 것 같아 절망감에 빠졌다. 삶에 대한 불안과 자괴감, 허무감이 따라왔다.

“전환점을 찾으려고 부단히 애써봤는데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문득 요리하는 걸 좋아한다는 게 떠올랐어요. 창의적인 일을 너무 하고 싶었는데 요리가 그런 면이 농후하잖아요. 그런 생각이 들자 바로 결단을 내린 거지요. 요리로 업을 바꾸는 게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해답이란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지만 나름 유일한 차선책이었어요. 다시는 그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과 함께 앞으로는 나눌 것만 있는 인생을 살고픈 내 안의 강렬한 소망을 담은 대안적 선택이었어요.”


뚱뚱한 요리사 vs 비쩍 마른 요리사

회사를 그만두고 세계 3대 요리학교로 꼽히는 뉴욕 CIA로 유학을 떠났다. 이 같은 결정에 주저함이 없진 않았다. 유학이라는 오랜 시간과 큰돈이 들어가는 일이었으니까. 결정을 미루고 있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읽고 답을 얻었다.

“책 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도 유럽으로 떠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어요. 그의 머릿속에서 쉬지 않고 윙윙대던 두 마리의 벌이 내 머릿속에서도 똑같이 미친 듯이 윙윙대고 있었어요. 무라카미는 두 마리의 벌을 무시하지 않았고 결국 유럽으로 떠났죠.”

유학을 떠나기 전 몇 년 동안 소식과 채식을 했기에 몸무게가 40kg밖에 나가지 않았다. 덩치 큰 사람이 많은 요리학교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마른 학생으로 각인됐다.

“특히 뚱뚱했던 셰프는 나만 보면 비쩍 마른 요리사는 믿을 수 없다고 놀려댔어요. 난 정반대로 뚱뚱한 요리사는 믿을 수 없다고 대꾸했죠. 물론 속으로만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이탤리언 최초로 미슐랭 쓰리 스타를 받은 괄티에르 마르케시의 음식은 그림 같다고 해서 개스트러나믹 페인팅(gastronomic painting)으로 불린다. 토마토 살사로 만든 냉수프 가스파초 로소 에 네로. 빨강과 검정의 색 대비가 강렬하다(위).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메뉴인 리소토 리조오로에자페라노. 샤프란을 넣어 지은 밥 주위에 오징어 먹물로 테두리를 두르고 금박을 올렸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강남에 아담한 규모의 레스토랑을 차렸다. 청담동과 삼성동의 경계라지만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의 골목길이었다. 제철 식재료를 사용한 컨템포러리 퀴진을 지향한 레스토랑에서 인도 커리, 비건을 위한 피자, 건강식 현미덮밥 등을 제공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온 동네 주민부터 스님, 수녀님까지 성별과 연령, 종교까지 초월한 많은 단골이 생겼다.

완벽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는 셰프를 미치게 한다.
– 《그림의 맛》 p.46


마음에 쏙 드는 동네였지만 그렇기에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주차장이 없다는 것은 식당 운영에 큰 문제였다. 외국인 손님이 오면 영어가 서툰 홀 직원 대신 주방에서 요리를 만들다 말고 뛰어나가야 했고 까다롭게 와인을 고르는 손님이 오면 소믈리에로, 커피 마니아 손님을 위해선 바리스타가 돼야 했다. 요리에만 집중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오너 셰프’였다.

“오너 셰프는 단순히 주방의 요리 수장이 아니라 한 회사의 대표, 사장과 같은 위치예요. 재무, 회계, 재고 관리, 식재료 구매 등 매일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았어요. 직원이 많고 시스템이 갖추어진 대형 레스토랑이 아니다 보니 책임 요리사인 제가 빠지면 인력에 큰 공백이 생기고 돌발 상황이 발생해도 처리하기 쉽지 않았어요.”

레스토랑을 찾은 손님의 행복을 위해 요리하고자 했던 마음을 배반하는 날들이 이어지자 주방은 점점 ‘헬스키친’으로 변해갔다.

어릴 적부터 워낙 요리를 좋아했기에 이모작 인생을 꿈꾸며 삶의 터닝포인트로 선택한 결정이었지만, 막상 경험해 보니 식당 운영이 내 남은 인생을 쏟아부을 만큼 나에게 잘 맞는 직업이 아니었다.
– 《그림의 맛》 p.52



명사가 아닌 동사로 생각하기

최지영 작가의 드로잉 작품.
“진로를 고민할 때 명사가 아닌 동사로 생각하면 선택의 스펙트럼이 보다 넓어지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명사인 요리사보다 동사인 ‘요리하다’로 생각해 보는 거예요. 요리하는 일이 꼭 요리사일 필요는 없거든요. 동사는 더 많은 가능성과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요.”

회사원과 셰프에 이은 새로운 직업으로 ‘그리는 사람, 쓰는 사람’을 택했다. 운영하던 레스토랑을 정리한 후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던 시기에 예전부터 좋아하던 현대미술 관련 저서, 논문 등을 탐독했다. 갤러리와 아트페어도 맛집 순례하듯 다녔다. 읽고 보고 듣다보니 예술과 요리 사이에 공통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술가 아르망의 ‘집적 예술’과 요리계의 ‘피에스 몽테’는 쌓아올리는 경향이 비슷했다. 또 아상블라주 계열의 작품들을 감상할 때면 ‘와인 양조기업에도 아상블라주가 많이 쓰이지’ 생각했다.
– 《그림의 맛》 서문


요리를 공부한 그만이 볼 수 있는 독특한 시각과 분석이었다. 여기에 그간의 다독으로 쌓은 식견이 덧붙여져 《그림의 맛》이 탄생했다.

조리법을 소개하는 책이나 음식을 직접적으로 다룬 푸드 에세이는 좋아하지 않고 음식에 대한 남다른 통찰과 철학이 담겨 있는 책을 좋아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해 요네하라 마리, 아멜리 노통브, 헬렌 니어링, 브리야 사바랭 등의 책은 늘 곁에 두고 읽는다.

‘그리고 쓰는 사람’이라는 자기소개처럼 다음 책도 구상 중이다. 디지털 아트에 관심이 많아 학원을 다니며 태블릿 페인터 수업을 들었다. 새로운 책은 직접 그린 그림과 짧은 글이 어우러진 여백 많은 책이 될 거라고 한다.

“내가 부족한 것, 잘하지 못하는 것이 99개이고 잘하는 게 딱 한 가지라면 그 한 가지를 붙들고 그것을 더 잘하기 위해 연마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 생각해요. 또 꼭 한 번 뭔가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너무 이 생각 저 생각 하지 말고 일단 실행에 옮겨보세요.”

무엇을 할 것인지, 혹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라 답보 상태에 빠진 사람이라면 그녀의 말에 한 번쯤은 귀 기울여 봐도 좋겠다.
  • 2017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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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단비랑   ( 2017-02-25 ) 찬성 : 6 반대 : 4
책 꼭 읽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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