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60주년 장미라사 이영원 대표

슈트는 자신에게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

글 : 변희원 조선일보 기자  / 사진 : 장련성 

영화 〈킹스맨〉(2015)의 비밀요원 해리(콜린 퍼스)는 신입 요원 에그시(태론 에거튼)를 데리고 영국 런던 새빌로에 있는 맞춤 양장점부터 간다. “슈트는 현대인의 갑옷”이라고 말하는 그는 신분 위장을 위해 양장점에서 일하는 ‘슈트 전문가’다. 한국에 ‘킹스맨’이 있다면 그건 ‘장미라사’의 이영원(63) 대표일 것이다.

사진제공 : 장미라사
성공한 정・재계 인사들이 찾는 맞춤 정장

정・재계 인사들의 정장을 만들어온 것으로 유명한 ‘장미라사’가 설립 60주년을 맞았다. 과거 여의도 대형 음식점들에선 국회의원들끼리 ‘jangmee’라고 쓰인 이 가게 양복 윗도리를 잘못 바꿔 입는 일이 많았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장미라사’는 삼성물산이 만드는 원단과 옷을 시험하기 위해 1956년 만들었다. 이 대표는 1977년 삼성물산에 입사하면서 장미라사에서 일을 하게 됐다. 1988년 장미라사가 삼성에서 분사한 이후 1998년부터 이곳의 대표이사를 맡았다. 그는 ‘장미라사’ 60주년을 맞아 최근 《성공하는 남자는 수트를 입는다》는 책을 냈다. ‘장미라사’의 역사와 맞춤 정장, 남자의 멋을 다뤘다.

6·25전쟁의 폐허 속에서 제일모직은 1956년 국내 처음으로 양복지 ‘골덴텍스’를 생산했다. 하지만 과연 이 소재로 옷이 잘 나올지 알 방법이 없었다. 삼성은 직접 양복점을 내기로 했다. 장미는 제일모직의 심벌이자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이 좋아했던 꽃이다. 라사(羅絲)는 원래 구라파(유럽) 양복지를 뜻하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당시 을지로에 있던 제일모직 사옥 1층에 ‘장미라사’ 간판이 걸렸다. 다른 양복점은 원단을 구하지 못해 쩔쩔매던 시절, 장미라사는 제일모직 원단으로 성장일로를 걸었다. 미군 PX에도 매장을 냈고, 신세계백화점 3층 전 층을 사용한 적도 있다. 이후 삼성물산으로 잠깐 소속이 바뀌어 삼성의 첫 남성복 브랜드인 ‘댄디’(나중에 ‘버킹검’으로 이름이 바뀜) 양복이 나올 때 산파 역할을 했다. 이 대표도 이 무렵인 1977년 입사해 장미라사에 배속됐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이 대표는 일본 방송과 잡지를 보면서 패션을 접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수입 청바지를 수선해 입거나 정장, 구두를 맞출 정도로 옷을 좋아했다. 그는 첫 월급을 ‘버킹검’ 정장 한 벌 사는 데 다 썼다. 당시 ‘장미라사’가 맡은 중요한 역할은 이병철 회장의 정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대표의 업무 중 하나가 이 회장에게 정장을 갖다주는 것이었다. 그가 지켜본 이 회장은 “탐미주의자”였다.

“회장님이 옷을 워낙 좋아해서 장미라사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었어요. 옷 한 벌로 하루를 나질 않고, 근무 중 옷을 갈아입을 정도였으니까요. 1년에 70벌 정도의 정장을 맞췄죠. 슈트를 가져가면 일단 걸어놓고 감상부터 합니다. 당시에는 그 감각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어요. 한창 반도체에 빠져 있을 땐 머리를 은회색으로 염색하고 메탈릭(금속성의) 그레이나 메탈릭 핑크색 정장을 입었어요.”

1988년 장미라사는 삼성에서 완전히 독립한다. 이건희 회장 취임 이후 전 계열사에 걸쳐 ‘초일류, 월드 베스트’를 추구하던 시절 ‘수제 양복’이 설 자리는 없었다. 당시 지배인이었던 이 대표는 장미라사에 그대로 남아 경영권을 인수했다. 세상은 기성복의 시대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외환위기를 맞던 무렵 시내 유명 양복점들의 명맥도 하나둘 끊어지고 있었다. 그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래서 일부러 손님을 줄였다. 생산 규모를 줄여 이탈리아 공방(工房)식으로 제작했고, 원단도 이탈리아에 직접 주문해서 썼다. 단추도 물소 뿔, 흑니켈 등 비싼 소재를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인수 당시는 40만~100만원대 중・고가 양복이 주종이었으나 이 대표가 맡으면서 200만~300만원대 초고가 브랜드로 변신했다.

‘장미라사’에서 제작하는 맞춤 정장을 가리켜 ‘비스포크’라고 한다. ‘말하는 대로(be spoken for)’라는 영어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패턴을 두고 사람의 사이즈에 맞춰 조금씩 변형하는 반 맞춤 제작 방식과 달리 비스포크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시작한다. 이 대표는 “입는 사람의 몸은 물론 일, 생활 방식, 성격이 다 반영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하루에 몇 백 벌을 공장에서 기계로 찍어내는 기성복과 달리, 정통 비스포크 방식으로 재킷 한 장 만드는 데 최소 5일이, 슈트 한 벌을 만드는 데에는 최소 2~3주 정도가 소요됩니다. 100% 핸드메이드 슈트란 가격 이상의 가치를 지니죠. 원단을 고르고 몸에 맞게 여러 차례의 가봉을 거치는 과정이 수고스러울 수 있어요. 하지만 한 벌의 슈트 가격이 일반 기성복보다 비싼 이유는 누구라도 경험해본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습니다. 슈트는 까다롭고 어려운 옷이거든요. 전통을 지키면서 트렌디해야 하고, 클래식하면서도 개성이 드러나야 하죠. 그래서 슈트를 입는다는 건 자신에게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이며 상대를 대하는 최고의 신뢰와 존경을 의미합니다. ”

제작 기간만 2~3주가 걸리고, 가격도 기성 정장의 최소 두세 배다. 시간, 공, 돈을 더 들여서까지 이런 맞춤 정장을 입어야 할까. 이 대표는 자신의 책 제목으로 대답을 시작했다. “성공한 남자 중에는 슈트를 잘 입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슈트는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적극적인 표현이에요.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상대가 있을 때 입는 옷입니다. 남을 위해 입는 옷인 거죠. 그리고 슈트란 옷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자기의 모습을 한 번은 더 보게 됩니다. 자기에게 관심을 갖고 자기 관리란 걸 하게 되는 거죠.”

이 대표는 ‘장미라사’에서 성공한 남자를 많이 만났다. 전두환・이명박 전 대통령,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남편인 필립 공, 성악가인 고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지휘자 정명훈 등이 이곳에서 정장을 맞췄다. 방한한 외국 지도자들이 들르기도 하고, 이 대표가 직접 그들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중에서 그가 꼽은 가장 인상적인 두 사람이 고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과 고 안영모 동화은행장이다.

“박태준 회장은 최고・최선이 돼야 만족하는 완벽주의자였어요. 연구하고 배우라고 일본 정장을 갖다주시기도 했죠. 눈썰미가 굉장히 정확하고 흐트러진 걸 싫어했어요. 안영모 행장은 옷을 많이 짓지 않았지만, 한 벌을 하더라도 좋은 것을 원하셨어요. 그걸 자기 자신에게 주는 큰 선물이라고 여기셨죠. 그래선지 여든이 넘어도 정장을 입은 모습에서 빛이 났어요.”


클래식을 완성하는 건 결국 예절


‘장미라사’에 최근 70대와 함께 30대 남녀 고객이 늘어났다. 그는 “사회생활 하는 여성이 늘어나다보니, 정장에 관심을 많이 갖는 것 같다”고 했다.

“요즘 70대는 자기에 대한 관심이 많아요. ‘자식한테 돈 벌어줘봤자 뭐하나’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거죠. 30대는 유행 따라 비스포크를 찾는 경우가 많지만, 그중에는 궁극의 멋을 추구하는 마니아도 많아요. 그들을 보면 한 달 월급보다 비싼 구두를 샀던 제 젊은 시절이 떠올라요.”

이 대표를 인터뷰한 날, 그는 옅은 파란색 재킷을 입고, 그보다 더 짙은 파란색 안경을 썼다. “원단 개발을 위해 만든 시험용 재킷”이란다. 가게 곳곳에 그런 시험용 재킷이나 해외에서 맞춰온 옷들이 걸려 있었다. 그가 꼽는 단 한 벌의 정장은 ‘네이비 스트라이프’다. “신뢰감과 힘을 주는, 가장 멋있는 옷”이기 때문이다. 그는 “〈킹스맨〉이란 영화 자체는 재미없었다. 하지만 가장 균형잡힌 정장을 보여줘서 좋았다”고 했다.

“간혹 비스포크를 입으면 뭐든 다 될 줄 알고 기대했다가 막상 기대한 자기 모습이 안 나와서 실망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때 제가 ‘옷은 옷일 뿐이다’라고 얘기해요. 좋은 사람이 입는 옷이 좋은 옷입니다. 클래식을 완성하는 건 결국 예절이거든요.”

영화 〈킹스맨〉의 해리도 “예절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이영원 대표는 한국의 ‘킹스맨’일지도 모른다. ‘장미라사’를 나서기 전, 신사들이 드나드는 ‘비밀의 방’이 있지 않을까 해서 한 번 더 둘러봤다.
  • 2016년 06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는 로그인 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201907

201907

구독신청
낱권구매
전체기사

event2019.07

event
event 신청하기
영월에서 한달살기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