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만년필 동호회 ‘펜후드’ 박종진 회장

잉크로 길을 내는, 인생의 동반자 ‘만년필’

글 : 유슬기 TOPCLASS 기자  / 사진 : 하지영 

종이에 글씨를 쓸 때 펜이 종이를 훑는 ‘사각사각’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른바 ‘손글씨’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만년필의 인기도 높아졌다. 국내 최고, 최대 만년필 동호회 ‘펜후드’를 이끄는 박종진 회장을 만났다.
평일엔 회사원, 주말엔 만년필연구소 소장

“이 만년필 한번 써보세요.”

백번 설명을 듣는 것보다 한번 손으로 써보는 게 낫다고 했다. 만년필은 손에 힘이 가장 덜 들어가는 필기구다. 볼(ball)의 구르는 힘을 빌리지 않고, 펜 끝과 지면이 바로 맞닿아 ‘물 흐르듯’ 글씨가 써진다. 잉크가 종이에 침투하면서 농담(濃淡)도 생긴다. 만년필 애호가들이 사랑하는 건 푸른 잉크다. 검은색보다 잉크 고유의 질감이 더 잘 살고, 살아 있는 느낌이 들어서다. 힘을 주면 조금 더 진하게, 힘을 빼면 또 연하게. 이 과정에서 쓰는 이의 필력에 따라 만년필이 길든다. ‘고유의 손맛’이 생긴다는 건 그런 의미다. 낚시꾼이 손맛을 잊지 못하듯, 만년필이 손에 착 감기는 손맛을 한번 알면 다른 류의 필기구는 쓰지 못한다.

국내 최대 만년필 동호회 ‘펜후드’의 회장이자 만년필 사랑꾼인 박종진씨의 손에는 잉크가 마를 날이 없다. 10년 전 만년필 동호회를 찾다가 펜후드에 몸담게 됐다. 당시 1000여 명이던 회원은 지금 1만6000여 명으로 늘었고, 그는 그사이 평회원에서 회장이 됐다. 만년필 연구소 소장도 겸하고 있는 평범한 회사원이다. 일주일의 근무를 마치고 연구소의 문을 여는 토요일은 그가 전국에서 올라온 만년필을 수리하는 시간이자, 일상 중 가장 충만해지는 순간이다. 정식 업체에서 고치지 못한 만년필, 오래돼 부품이 없는 만년필들의 최후 종착지가 바로 이곳, 을지로3가에 있는 만년필 연구소다. 묵묵히 앉아 막히고, 고장 난 만년필을 고치면서 박종진씨는 “수양의 시간”을 갖는다고 했다. 세상도, 시름도 잊고 오직 나와 만년필만 남는 시간이다.

“처음에는 동호회 분들과 카페에서 만나서 만년필 이야기를 나누다가 수리도 해줬어요. 동호회 활동이 단순해요. 만년필로 글씨를 쓰고 서로 궁금한 점을 질문하고 대답하죠. 품평도 하고요. 보통 오후 6~10시에 만나는데 네 시간 꽉 차게 필기구에 관한 이야기만 해요. 음주가무로 연결되는 일은 없습니다. 수리할 경우 워낙 오래 걸리는 데다 테이블에 잉크가 묻으니까 카페에 민폐더라고요. 한 달에 쓰는 커피 값으로 임대료를 낼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찾다가 만년필 연구소를 열게 됐어요.”

만년필과 함께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그와 만년필 애호가들에게 연구소는 아지트가 됐다. 중소형 인쇄소가 밀집한 을지로의 조붓한 골목, 그보다 더 좁은 계단을 오르면 잉크 냄새가 훅 하고 끼친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그에게 배달된 만년필이 한 꾸러미다. 펜촉의 구멍은 아주 미세한 이유로 막히거나 휘어진다. 이 길을 터주는 게 그의 일이다. 잘만 사용하면 수명이 100년도 간다는 만년필은 한 사람의 일생을 함께하는 ‘인생펜’이 될 수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손에 잡히는 막대기 같은 걸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때는 아버지가 쓰시던 만년필을 써본 기억도 나고요. 20대 때 여행을 떠나면 풍경이나 음식보다 만년필이 더 눈에 들어왔어요. 이 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만년필은 뭔가, 어떻게 만들어지나… 그러다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하나에 꽂히면 끝을 봐야 하는 성미인데, 만년필은 지금도 끝이 안 나요.”

어느 정도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면 다른 벽에 부딪힌다. 이제 만년필 수리하는 데는 웬만큼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 새로운 만년필을 수리하다가 조그마한 부속이 떨어져 나간 걸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박종진씨는 다시 겸손해졌다.

“한 분야에 깊어지면 다른 분야랑 통한다는 게 어떤 건지 잘 몰랐는데 얼마 전부터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한 분야에서 장인의 경지에 이른 분들을 보면, 굉장히 간결하고 우아하거든요. 신달자 선생님의 글이 그렇고, 김연아 선수의 점프가 그래요. 오랜 세월에 걸쳐 군더더기가 사라지고 정수만 남아서 우아해진 느낌이에요. 좋은 만년필도 딱 그렇거든요.”

최근 펜후드에는 20~30대 회원 수가 대폭 늘었다. 일본의 만년필 동호회와 함께 1년에 두 차례씩 ‘펜쇼’를 개최하는데, 고령화된 일본과 달리, 한국은 회원들이 연령이 점점 더 어려지고 성비에서도 균형을 이루고 있다. 디지털이 융성하자 아날로그로 회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탓이다. 사람은 그렇게 “균형을 맞춰간다”고 박종진 씨는 말했다.

“펜쇼는 자기 소장품을 내놓는 자리예요. 맡겨진 데스크는 개인의 전시 공간이 됩니다. 주로 해외 구매를 통해 구입하지만 오래된 문구상을 돌며 구입하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해외여행 중 구입하는 경우도 있고요. 세계사에서도 보면, 그 민족의 문화가 가장 융성한 시절에 가장 좋은 만년필이 탄생했어요. 만년필에는 편리하고 우수하면서 아름다운 필기구를 갖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이 담겨 있거든요.”


역사의 기록, 그 현장에 만년필


폰트로 인쇄된 글씨가 아니라, 손으로 필사한 글씨를 사랑하는 이들이 늘면서 필기구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커졌다. 만년필은 1883년 미국의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0년부터 20년간이 만년필의 황금기였다. 그리고 이때 만년필의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고 알려진 ‘파커 51’이 등장한다. 이 절정의 시기를 지나 만년필은 볼펜에 왕좌를 내준다.

“‘파커 51’은 만년필 역사상 가장 성공한 만년필로 꼽혀요. 1941년에 만들어졌는데, 지금 쓰기에도 무리가 없어요. 내구성과 디자인이 훌륭해서죠.”

그는 2013년 《만년필입니다》라는 책을 펴냈다. ‘만년필 사용자를 위한 입문서’인데, 책 내용은 만년필의 등장과 발전사, 한 도구의 흥망성쇠를 담는다. 만년필 사용법뿐 아니라 만년필에 담긴 인류의 역사를 함께 읽기 바라서다.

“1920년대와 30년대에는 펜 클립이 길어요. 40년대에는 짧아집니다. 전쟁기에 접어들면서 주머니에 꽂아둔 펜에 빛이 반사돼 적에게 노출될까 봐 조심한 거죠. 만년필을 공부하면 당대의 역사와 철학까지 공부하게 됩니다.”

인류라는 거시사가 아니더라도, 한 개인의 미시사를 기록하는 데도 만년필은 알맞은 도구다. 펜촉은 쓰는 이의 습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길이 난다. 처음에는 펜과 주인이 서먹서먹하다가 마침내 친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의 희열을 맛보면 만년필을 놓을 수 없게 된다.

“저는 메모광이라 시도 때도 없이 메모를 해요.
그때마다 만년필을 찾고요. 만년필은 여러 개일 수 있지만 나에게 길든 만년필은 하나거든요.”


고장 난 만년필을 들고 박종진씨를 찾는 이들의 마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오랜 친구를 되살려주기를 바라는 마음,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 그 간절한 마음을 알기에 그 또한 성심을 다해 죽은 만년필을 살려낸다. 수리비는 잉크 한 병이 전부다.

“잉크를 나눠 쓰는 이들간의 교분도 각별합니다. 좋은 만년필을 만나면 알리고 싶고,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 솟아나죠. ‘펜쇼’를 개최하면 가장 뿌듯할 때가 모두가 ‘자발적으로’ 쇼에 임한다는 겁니다. 첫 준비부터 마지막 정리까지 모든 회원이 솔선수범해요. 2016년 펜쇼도 동대입구역 인근 우리함께 빌딩에서 열릴 예정이에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동호회의 저력은 이 ‘자발성’에 있었다. 이들이 개최한 펜쇼는 ‘펜후드’의 시간과 기술을 축적하는 시간이다.

“여건과 기술이 성숙하면 언젠가는 만년필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아직은 공부가 더 필요하지만 언젠가는 회원들과 함께 ‘궁극의 만년필’을 제작할 날이 오지 않을까요.”

중국에서는 몇 해 전부터 금성, 영웅, 영생 등의 만년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미 파이로트, 커스텀 등의 만년필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산 만년필로 종이를 물들일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 2016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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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건의 글이 있습니다. 작성일순 | 찬성순 | 반대순
  박기태입니다   ( 2018-03-27 ) 찬성 : 4 반대 : 4
2018춘게 펜쇼는 없나요
  박종남   ( 2017-02-18 ) 찬성 : 16 반대 : 26
만년필뚜껑에 왕관심볼이있는 금장만년필인데..심볼 양쪽에 글씨가박혀있는데 돋보기로도 잘 안보여요.노안이라.브렌드를 알 수 있을까요??
  소명   ( 2016-09-19 ) 찬성 : 31 반대 : 22
만년필 입문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좋은 글 감사해요- 언젠간 동호회 회원으로 한 번 뵀으면 좋겠어요ㅎㅎㅎㅎ
  이종환   ( 2016-02-26 ) 찬성 : 82 반대 : 69
만년필 펜촉을 수리할려고 합니다 어디서 하는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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