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완주군 삼례문화예술촌

일제강점기 수탈의 상징인 양곡창고가 세련된 문화예술공간이 되다

글 : 이선주 TOPCLASS 기자  / 사진 : 김선아 

일제강점기와 해방, 비약적인 경제성장 등 우리나라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건물들이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유서 깊은 건물과 최첨단 문화의 만남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간들을 찾았다.
전북 완주군 삼례읍. 지금은 전주 북쪽의 근교 정도로 인식되지만 조선시대에는 호남 최대의 역참지로,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올라갈 때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동학농민군이 이곳에서 2차 봉기를 일으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호남평야의 젖줄인 만경강이 흐르고 있는 이곳에 1920년대 일제가 양곡창고를 지었다. 기름진 호남평야에서 난 쌀을 이 창고에 임시 보관했다가 삼례역을 통해 군산까지 기차에 실어 보냈고, 군산에서 다시 배에 태워 일본으로 가져갔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쌀 수확량의 절반 이상이 이렇게 일본에 수탈당했다.


아픈 역사를 지닌 양곡창고는 해방 후 농협 창고로 쓰였는데, 전라선 복선화 사업으로 삼례역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그 기능을 잃었다.

완주군은 폐허가 되어가던 이 창고를 농협으로부터 사들여 2년여 준비과정을 거쳐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구도심 활성화, 지역재생 사업의 일환이었다. 군과 주민, 문화예술인이 머리를 맞댄 끝에 2013년 6월 ‘삼례문화예술촌’이 문을 열었고, 옛 건물을 잘 활용한 모델로 ‘2013 대한민국 공공건축상’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삼례문화예술촌은 1920년대에 지어진 창고 6동과 1970년대 농협이 새로 지은 1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짧게는 40년에서 길게는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이 창고들은 비주얼미디어아트갤러리, 책박물관, 책공방북아트센터, 디자인박물관, 김상림목공소, 문화카페 등으로 변신했다. 눈이 흩뿌리는 겨울날, 이곳을 찾았다. 한눈에도 역사가 느껴지는 입구의 자그마한 목조 건물이 우선 시선을 사로잡았다. 일제강점기 때 창고 관리인들이 쓰던 일본 전통가옥으로, 지금은 인포메이션센터, 세미나실로 쓰고 있다. 기다란 창고들은 벽이나 철문이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녹이 슬었는데, 그게 오히려 회화적인 느낌을 더해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풍경을 자아낸다. 삼례문화예술촌 바로 옆에는 1950년대에 완공된 붉은 벽돌의 삼례성당이 있어 시간의 깊이를 더한다.


창고 문을 열고 들어서니 8~9m에 이를 것 같은 높은 층고가 시원한 공간감을 자아낸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나무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고, 쌀자루가 습기 차지 않도록 벽에 규칙적으로 붙여놓은 나무가 그대로 남아 있어 편안하면서도 독특한 분위기다. 외관은 옛 모습 그대로인데, 내부는 세련된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김진섭 책공방북아트센터 대표는 “처음 이 공간을 본 순간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이곳에 유럽의 전통적인 북아트 공방을 재현했다. 문자판의 돌출된 부분에 잉크를 발라 기계로 누르면 종이에 프린트된 잉크와 요철자국이 남아 손맛이 살아 있는 철판 인쇄인 레터프레스(letter press)를 체험할 수 있다. 누구든 직접 책을 만들 수 있는 북아트스쿨, 가죽 다이어리를 만드는 워크숍도 운영하고 있다. 납활자 주조기와 판화프레스・압착기・인쇄교정기・재단기・금박기・활판기 등 오래전에 쓰던 인쇄기계들을 모아놓아 인쇄박물관도 겸하고 있다.

책박물관.
김상림목공소는 인사동에서 20년간 공방을 운영했던 소목장 김상림씨가 꾸리고 있다. 조선시대 사랑방 가구를 현대 주거공간에 맞게 변형해 선보였던 그는 이곳에서 완주군 주민들을 대상으로 목수학교를 열고 있다. 목수가 되기 희망하는 주민들을 선발, 전통 소목기술을 활용한 전통가구와 생활가구, 액자 제작법 등을 무료로 전수하고 있다. 그 역시 “널찍한 공간에 매혹됐다”면서 그동안 만들어온 작품들과 수집해온 목공 연장들을 이곳에 진열해놓고 전시하고 있다.

책박물관은 2014년 4월 6일까지 <한국 북디자인 100년전>을 열고 있다. 1883년 박문국이 설립돼 우리나라에 서양 활판인쇄술이 처음 도입된 때부터 1983년까지 책 디자인의 변천과정을 담아낸 전시. 김환기・이인성・정현웅・노수현・이상범・김기창・천경자・박생광・전혁림・박서보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근현대 미술가들이 북 디자이너로 참여한 책들을 볼 수 있다.

비주얼미디어아트갤러리.
문화카페 ‘오스’ 역시 옛 창고의 높은 천장과 넓은 공간 덕에 독특한 느낌인데, 한켠에서는 이 지역 동호회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커피 로스팅과 추출과정을 교육하기도 한다.

삼례문화예술촌이 생기면서 한적한 시골마을이었던 삼례읍에 부쩍 외지인의 발길이 잦아졌다. 그러나 이보다 지역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마련해 주민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있다는 점이 돋보였다. 완주군 문화관광과 김미경씨는 “이곳에서 성장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양곡창고 근처에서 놀았던 기억이 많은데, 이곳이 허물어지지 않고 잘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반가워한다”고 말한다.
  • 2014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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