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원도심 대흥동

젊은 문화예술인들의 놀이터가 되다

대전역과 가까운 대흥동 일대는 한때 번화한 대전의 중심지였다. 행정기관, 주요 상점들이 둔산동 신도시로 이전함에 따라 이곳은 이제 원도심으로 불린다. 돈과 사람이 빠져나가며 나날이 쇠락해가던 이 거리가 다시 북적이고 있다. 낡고 오래된 것이 주는 특유의 온기, 저렴한 임대료에 매료된 젊은 문화예술인들이 하나둘 둥지를 틀면서부터다. 주말이면 크고 작은 공연이 열리고, 곳곳에 보석처럼 숨어 있는 작은 갤러리와 북카페들이 색다른 즐거움을 선물하는 곳, 대전 대흥동 여행기!
지난해 가을 대전시립미술관 창작센터가 주관한 <예술을 통한 도시 재생> 전에 참여한 구헌주 작가는 빛바랜 산호다방 벽면을 캔버스로 삼았다.
대흥동 탐방의 출발점은 우리들공원으로 잡았다. 옛 중구청 자리에 조성된 우리들공원은 1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극장을 갖추고 있어 각종 문화행사가 자주 열린다. 공원 입구에는 방문객을 환영하듯 ‘반갑습니다’라는 빨간색 문구가 커다랗게 붙어 있다. 이것이 단순한 환영인사가 아님은 나중에야 알았다. 지난해 가을 대전시립미술관 창작센터가 주관한 <예술을 통한 도시 재생>전에 참여한 서상호 작가의 작품이었던 것. 예술을 매개로 특정 장소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관람객 간의 소통을 주제로 한 전시인 만큼 작가들은 대흥동 내 오래된 건물, 골목이나 담벼락, 상점, 가로수 등을 전시 공간으로 삼았다.

대전시립미술관 창작센터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근대 건축물이다. 1958년 건립된 것으로, 아치형 출입구와 돌출된 창틀,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수직 블라인드가 특징.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충청지원 건물로 쓰이던 것을 2008년 리모델링해 전시와 작업을 함께 할 수 있는 창작센터로 만들었다.

‘반갑습니다’라는 문구는 서상호 작가의 작품이다.
대흥동 일대에는 창작센터 같은 근대 건축물이 많다.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대전여중 강당(현 대전교육청 갤러리), 지금은 내포신도시로 이전해 비어 있는 옛 충남도청, 1930~50년대 고위 관료를 위해 지은 관사촌 등이 모두 등록문화재다. 근대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들로 원도심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색다른 볼거리다. 골목 안쪽으로 접어들면 다방, 여인숙, 이용원 등 연륜이 느껴지는 간판들이 현대식 카페나 갤러리, 음식점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중장년층에게 원도심은 깔끔하게 차려입고 나가는 ‘시내’였다. 그 시절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종종 대흥동 일대를 찾는다. 그래서 대흥동은 주말이면 10대 청소년들에서부터 70대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로 북적인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대전여중 강당. 등록문화재로, 지금은 대전교육청 갤러리로 쓰인다.


등록문화재인 옛 충남도청사.


농산물품질관리원 충청지원이었던 건물을 리모델링해 문화 공간(대전시립미술관 창작센터)으로 만들었다.

해마다 마을축제 열고, 대안화폐 운동도 시도

대흥동을 문화예술의 거리로 각인시킨 데는 2008년 시작한 마을축제 ‘대흥동립만세’의 역할이 컸다. 마을(대흥동)을 세운다는 뜻에서 독립이 아닌, ‘대흥동립’으로 이름 붙였다. 문화운동단체이자 프로그램인 ‘대흥동립만세’는 마을 안에서 개별적으로 작업하던 젊은 문화예술가들을 모아 ‘판’을 벌였다. 문화기획자, 인디밴드, 작가, 마임이스트, 화가, 설치미술가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은 그 위에서 신명나게 ‘놀았다’. 곳곳에서 전시와 공연을 볼 수 있었고, 예술품을 파는 아트플리마켓도 열렸다. 주민과 격리된 것이 아니라 주민의 일부가 되어 치러낸 문화예술축제는 예술가와 관객 모두를 즐겁게 했다. 이후 ‘대흥동립만세’는 대흥동을 대표하는 연례행사로 해마다 치러지고 있다.

대흥동 거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재미있는 공공 디자인.
그런가 하면 지역 품앗이 공동체인 한밭레츠가 운영하는 원도심레츠는 이곳에서 대안화폐 ‘두루’를 사용하며 공동체 삶을 실험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1주일에 세 번, 회원들을 위해 현미밥에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는 반찬으로 소박하지만 건강한 밥상을 차려낸다. 밥값 5000원 중 3000원은 현금으로, 2000원은 두루로 낸다. 회원들은 돈이 없어도, 자신이 가진 재능이나 물건을 나누며 화폐처럼 사용한다.

대흥동 거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재미있는 공공 디자인.
바로 옆 건물에는 ‘도시여행자’라는 카페가 있다. 축구 마니아이자 프로축구팀 대전시티즌 서포터즈 단장인 김준태 대표가 여자친구인 박은영씨와 함께 운영하는 곳이다. 그는 축구와 여행을 접목한 독특한 콘셉트의 여행을 기획하고 실행한다. 대전시티즌의 원정 경기 때 서포터즈 회원들을 이끌고 현지를 찾아 응원 겸 여행을 하는 것. ‘전통 시장을 지켜주어서 고맙다’고, ‘힘내시라’고, 전국 5일장을 돌며 상인들에게 미숫가루를 전하는 ‘장터 유람기’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그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해 작품으로 만들어 지난해 올레 스마트폰 영화제, 서울초단편영화제에 본선에도 진출했다. 김 대표의 꿈은 대전을 찾는 국내외 여행객을 안내하는 ‘대전 가이드’가 되는 것이다.

01. 축구와 여행을 결합시킨 여행상품으로 눈길을 끄는 카페 ‘도시 여행자’.
02. 갤러리 ‘키 낮은 하늘보기’.
03. 북카페 ‘느린나무’
옆 골목에 새로 들어선 갤러리 ‘키 낮은 하늘보기’는 건물 주차장을 갤러리로 바꾼 재생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대관 전시가 아닌, 관객들이 참여하는 전시가 열린다. 갤러리 한쪽에서 연주자가 연주를 하고, 그 모습을 그림으로 완성하는 드로잉 콘서트 같은 색다른 전시가 1년 내내 이어질 예정이다.

오래된 주택 너머로 우뚝 솟은 고층 빌딩. 대흥동은 이렇게 한 공간에 근대와 현대를 품고 있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북카페 ‘느린나무’는 주인이 직접 구입한 신간들을 비치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인기다. 최근에는 주택을 개조한 느린나무 2호점을 개설해 모임 공간으로 대여하고 있다.

이처럼 대흥동에는 독특한 색깔을 가진 공간과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곳에 세든 예술가들은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다. 충남도청 이전 후 대전시가 이와 관련한 원도심 개발정책을 뚜렷하게 내놓지 않은 상태인데다 낡은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지으려는 건물주가 많기 때문이다. ‘뾰족집’으로 불리던 근대 건축물은 이미 철거됐다. 지금의 이 모습을 얼마나 간직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여행객의 마음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오래된 것들이 들려주는 옛이야기, 그 위에서 새로운 문화를 꽃피우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이 있어 희망을 품는다.

이들의 실험적인 작업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대흥동 여행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미슐랭가이드에 이름을 올린 빵집 ‘성심당’, 다문화 음식점 ‘아임아시아’, 당일 판매를 원칙으로 하는 과일가게 사과나무의 ‘컵과일’ 등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은 덤이다.



대흥동에서 만난 사람 1

월간 〈토마토〉 편집장 이용원

대흥동 문화예술 부흥의 기수가 되다


대흥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문화예술전문잡지 〈토마토〉다. 월간 〈토마토〉는 대흥동의 문화예술인과 그들의 작업을 꾸준히 소개하는 한편, 대전시가 추진하는 원도심 활성화 정책에 참고가 될 만한 현장의 목소리를 전하며 대흥동의 ‘부흥’에 기여했다.

〈토마토〉는 올해로 창간 6주년을 맞는다. 책이 팔리지 않는 출판시장의 사정을 감안하면 지방에서 발행되는 유가지(권당 7000원)가 이 기간 동안 한 번의 결호도 없이 발행되어왔다는 것은 놀라운 기록이다. 이용원 편집장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온 힘을 다해 버틴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토마토〉를 창간한 발행인이기도 하다.

지난해 창간 5주년 기념 행사로 진행했던 사옥 벽화 그리기.
“전국에 있는 정기구독자들이 가장 큰 힘이죠. 대흥동에 기반을 두고 있고, 이 지역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지만 저희는 전국의 독자를 대상으로 합니다. 제호에서 지역성을 드러내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고요. 취재 역시 대전에 한정하지 않고, 저희가 관심 있게 봐야 할 만한 곳이나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갑니다.”

충남대를 졸업한 그에게 대흥동을 비롯한 원도심 지역은 20대를 함께 보낸 추억의 공간이다. 하루가 다르게 쇠락해가는 원도심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던 그는 비어 있는 젊은 공간을 젊은 예술가들이 하나 둘 채우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잡지를 구상했다.

“지방신문 기자로 일했는데, 30대 초반에 접어들면서 삶의 방식과 가치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그 무렵 저렴한 임대료와 이 거리가 가지고 있는 향수에 이끌린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여기서 뭔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글 쓰고, 사진 찍는 일을 접목해 할 수 있는 게 잡지였어요. 그동안 힘들게 끌어왔지만 <토마토>가 대흥동을 문화예술의 거리로 활성화하는 데 한 축을 담당했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보람을 느낍니다.”

그는 잡지 발간 외에도 대흥동의 브랜드가 된 ‘대흥동립만세’를 공동 기획했고, 사무실 옥상에서 수시로 ‘옥상 공연’ 같은 문화행사를 여는가 하면, 월간 토마토문학상을 제정해 신진 작가를 발굴하고 있다. 북카페 ‘이데’를 운영하며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좌나 지역대학 강좌도 연다. 지역대학 강좌에는 유명 인사가 아닌, 한 분야에서 오랜 경력을 가진 사람이 강단에 선다. 가령 칼국숫집을 30년 넘게 운영한 손맛 좋은 할머니가 칼국수 맛있게 만드는 법을 강의하는 식이다. 잡지 제작을 비롯해 이러한 활동을 위한 재원은 별도로 운영하고 있는 광고·사보 제작대행 사업을 통해 마련한다.

‘이데’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할 수 있다.
“대흥동이 한때는 20대에게 버림받은 공간이었는데 최근엔 문화기획자들이나 문화기획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고 있어요. 아직 활짝 꽃핀 상태는 아니지만 곳곳에서 새싹처럼 자라고 있는 그들이 있으니 몇 년 안에 새로운 문화적 기류가 만들어지리라는 기대를 합니다. 지금껏 그래왔듯 〈토마토〉도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되겠지요.”



대흥동에서 만난 사람 2

폐허가 된 여인숙을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으로 만든
산호여인숙 주인 송부영·서은덕씨 부부


산호여인숙 주인인 송부영·서은덕씨 부부.
고풍스러운 이름의 ‘산호여인숙’은 대전의 유일한 게스트하우스다. 1977년에 문을 열어 한동안 전성기를 누렸던 실제 ‘여인숙’ 건물. 여관·모텔의 등장 이후 사양길을 걷다 폐업해 10년 넘게 비어 있던 것을 2011년 송부영·서은덕씨 부부가 임대해 게스트하우스로 변신시켰다. 공공미술을 전공한 송부영씨와 시민운동단체에서 일하며 연극 기획을 하던 서은덕씨는 2010년에 열린 제3회 대흥동립만세 축제 때 처음 만났다. 함께 축제를 준비하던 문화예술가들은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산호여인숙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인테리어, 설비 등 각자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재능을 보탠 덕분에 리모델링 작업은 큰돈 들이지 않고도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사이 두 사람은 사랑을 키워 부부의 연을 맺었고, 산호여인숙의 주인이 되었다.

산호여인숙 1층은 복합문화공간으로, 2층은 숙박시설로 사용된다. 얼마 전까지 이곳에서는 <4인의 서재전>이라는 독특한 전시가 있었다.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 4인을 선정, 4개 방에 그들의 서재를 옮긴 것. 방이 많은 ‘여인숙’의 구조를 재미있게 활용한 전시였다.

숙박시설에는 ‘산호주민’이라고 불리는 장기 투숙객과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일반 여행객이 있다. 산호여인숙은 몇 개의 방을 작업실이 필요한 예술가들에게 저렴하게 장기 임대한다. ‘산호주민’은 현재 네 명이다. 여행객의 경우 하룻밤 숙박비는 2인실 기준 1인당 1만5000원, 6인실은 1인당 1만2000원을 받는다. 라면이나 토스트 등 간단한 아침도 제공돼 대학생들에게 인기다. 서은덕씨는 “성수기인 방학 때는 2주 전에 예약해야 한다”며, “지금도 주말이면 빈 방이 없다”고 한다.


“좋은 숙소는 아니에요. 오래된 건물이라 외풍도 세고, 화장실도 공용이고, 불편한 게 많지요. 그런데도 일부러 산호여인숙에 묵으려고 오시는 분도 있어요. 입소문이 많이 나서 그런지 숙박하지 않더라도 대흥동에 오면 꼭 들러보고 가는 명소가 됐어요.”

산호여인숙은 대흥동에서 활동하는 문화기획자들의 사랑방 역할도 하고 있다. 그 안에서 탄생한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공연이나 전시로 이어지기도 한다.

‘빈티지’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산호여인숙 안팎 풍경.
“그들이 만나는 것만으로도 제3의 결과물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많지는 않지만 기념품도 판매하고 있는데, 여기 묵고 있는 친구들이 재능 기부 형태로 만들어준 것들이에요. 연극하는 사람의 포스터를 만화가가 그려주기도 했고요. 플랫폼의 역할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판을 벌려놓으니 알아서 잘 놀더라고요. 저희도 그들과 함께 어울려 즐겁게 놀아요.(웃음)”

서은덕씨는 “앞으로는 수익에도 신경 써야 할 것 같다”며, “방 한 개를 아트숍으로 꾸며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5월부터는 대전문화재단의 작가 레지던스 사업에 참여해 ‘대전’을 주제로 작업하는 몇 명의 작가가 이곳에 머물 예정이다. 젊은 작가들과의 교류와 실험을 즐기는 이 부부가 있는 한, 산호여인숙의 진화는 계속될 것 같다.

사진 : 김선아
  • 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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