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73) 눈 치우기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하는, 백석의 시구 그대로의 밤을 이어 아침이 밝았는데도 눈이 계속 내려 쌓이는 모양입니다. 난롯가에 앉은 채로도 사락사락, 눈 내리는 기척이 귀에 그득합니다.

잠든 딸아이 귀에도 엄마 아빠 소리가 그렇게 들릴지 모릅니다. 짧은 휴가를 받아 모처럼 귀가한 딸내미 덕분에 이른 아침 내내 두런두런 얘기가 끊이지 않는 참입니다.

“쟤 어릴 때엔 이런 날, 틀림없이 눈사람 만들러 나가자 했는데….”

“한번은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 ‘떡눈사람 만들었어!’ 그러기에 무슨 소린가 했더니, 할머니가 잘 뭉쳐지는 눈을 떡눈이라고 말씀하신 걸 듣고 그랬더라고요.”

“참, 어머닌 다리가 아프신가 봐.”

“쟤한테 들었어요. 어디가 아프시단 말씀, 생전 안 하시는데….”

“여기저기 탈 나실 연세지.”

“졸업 전에 취업한 게 기특해서 재미나다고 하시지만, 손녀 밥이며 빨래며… 힘드실 거야.”

잠시 머무는 할머니댁을 나와 직장 가까운 곳으로 거처를 마련해야 해서 내외도, 딸아이도 머리 맞대고 연구하고 발품 팔며 할 일이 많습니다.

“어제… 그냥 하는 소리겠지요? 여기서 엄마 아빠랑 살면서 출퇴근하고 싶다대요.”

“큼지막한 제 방을 다시 보니, 잠깐 그런 생각이 든 거겠지요.”

“수행비서들까지 딸렸으니!”

“그나저나 이 딸내미가 오래 주무실 참인가 봐.”

“자게 놔두고 우리 먼저 아침 먹읍시다. 눈도 치워야 하고요.”

간단히 아침을 먹고 나오니, 땅 한 뼘 흙 한 줌 안 보이게 숲골짜기가 하얗습니다.

“이게 다 가난한 시인이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한 까닭인데… 가만 놔둬야 할 듯.”

남편이 싱긋 웃으며 비를 건네더니 보란 듯이 눈 치우기에 돌입합니다.

“내가 넉가래로 밀어내면, 이 비로 쓸기.”

길이라고 따로 구분할 것도 없는 산속이지만 그래서 더욱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손대야 할지 아득합니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는 답답이 아내에게 저만치 나아간 남편이 외칩니다.

“자동차 드나들 길 만든다고 생각해요.”

내일 아침 출근해야 할 딸아이를, 어두워지기 전에 터미널로 실어 날라야 한다는 현실이 눈앞에서 반짝 불을 켰습니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몸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가난한 엄마가 딸을 사랑해서… 눈을 싹싹 쓸어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비가 뜻밖입니다. 그다지 힘들이지 않아도 흙바닥이 드러나게 눈이 싹싹 쓸립니다. 시내에서 써봤던 플라스틱 유사품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하도 신통해서 비질을 하다 말고 곰곰 살펴보니 과연 대나무 잔가지를 일일이 엮어 만든 수제품입니다.

그러느라 또 우두커니 서 있었나 봅니다. 어느새 남편이 다 치워놓은 자동차길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는데 다시 폴폴 눈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해찰꾼인 내가 부지런한 남편한테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폴폴 눈이 내리는 것입니다. 눈이 오는 이유가 있고, 눈을 치우는 이유가 있고, 눈길을 달려가야 하는 이유가 있고… 삼라만상과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글쓴이 원재길·이상희 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살며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13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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