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71) 흙집에 바치는 노래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호돌이 월월거리는 소리가 코앞에서 들린다 싶은데, 개울물 흐르는 소리도 유난히 가깝습니다. 웬일인가 싶어 흙집 안방에서 벽지에 풀칠을 하다 말고 창밖을 내다봅니다. 집 지어 이사하기 전에 내외가 번갈아가며 작업실로 쓰던 이 흙집을, 위치조차 잊고 지냈던가 봅니다. 호돌이집이며 개울가 뽕나무가 빤히 보이는데, 그제야 요란한 물소리에 한밤중에 자다 말고 깨었던 기억이 새삼 떠오릅니다.

“야아, 우리 호돌이가 코앞에 있네! 호돌아, 호돌아?”

호돌이 녀석은 두리번두리번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다 말고 ‘우두커니 먼 산 바라보는 개가 있는 뜰’ 풍경화, 그 속으로 돌아갑니다. 나 좀 보라고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는 데도 영 못 알아봅니다.

“나도 못 알아보던 걸요. 유리에 얼비쳐서 잘 안 보이나 봅디다.”

그러면서 남편이 풀비 좀 집어달라는 몸짓을 합니다. 얼른 건네주고, 나도 내 할 일로 돌아옵니다. 닥나무 껍질 조각이 별처럼 흩뿌려진 한지에 직접 쑨 밀가루풀을 풀비에 묻혀 쓱쓱 칠하던 참입니다.

바깥일에 지쳐 집안일에 좀처럼 힘을 못 보태던 터라, 함께 하자고 미리 약속한 흙집 단장 일이 반가웠습니다. 서울 일 보고 딸아이한테 다녀오느라 새벽에 도착, 몇 시간 못 자고 일어나 도서관 강의 마치고 장 봐서 시간 맞춰 들어오느라 고단한 몸이 부서지는 듯한데도 반복되는 이 단순노동이 아주 신납니다. 묵은 빚 갚는 기분인 데다, 일 잘한다고 틈틈이 추켜세워주는 덕분일까요.

“풀칠의 대가일세! 북아트 덕분?”

“북아트 제본과정에 풀칠 일이 많긴 하지만… 대가라면, 온갖 집안일을 척척 해내는 그쪽!”

칭찬이 고마워서 그저 듣기 좋게 화답하는 소리가 아니라, 도배에 앞서 남편이 해놓은 밑준비가 대단했습니다. 방문 네 짝의 낡은 창호지 뜯어놓기, 두 칸 방의 너덜너덜한 벽지 뜯어내고 흙물 들이기, 닥지 도배지 사다 놓기…

“이 흙물은 어떻게 들인 거예요?”

“아, 그게 좀 공이 들었지요. 돌돌이와 함께 황토를 찾아 뒷산 앞산 헤매길 여러 날 만에 퍼날라서… 저기 저 체, 보이지요? 그걸로 걸러낸 황토를 물에 개어 일일이 칠했습지요.”

남편이 짐짓 말꼬리를 익살스레 늘이는 끝에 “그랬지, 돌돌아?” 하고 마루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돌돌이를 돌아봅니다만, 그 사고뭉치 천방지축에게 이 느닷없는 동조 요청이며 흙집 단장이 궁금할 리 없습니다.

“우리 예쁜 흙집이 기뻐하겠네요. 거처가 아쉬운 한알학교 선생님들도 와서 묵고, 친구들도 와서 묵고… 아아, 좋아라 할 몇몇 얼굴이 벌써 떠올라요.”

흙집은 대들보에 1956년 상량했다는 기록을 지닌 두 칸짜리 예쁘장한 고가(古家)입니다만, 새집 지어 관리하고 사는 데 바빠 내버려두게 되었습니다. 언제든 장작 군불 때면 아랫목이 설설 끓는 이 집에 아버님 어머님을 비롯한 본가 일족이 오글오글 하룻밤 지내기도 했고, 남편의 은사가 하룻밤 묵기도 했고, 내 친구가 자기 어머님을 모시고 와서 이틀쯤 쉬었다 가기도 했습니다. 남편이 친구들과 왁자지껄 술잔치를 벌이며 밤을 새기도 했고요.

“이런!”

남편이 탄식하는 소리에, 주섬주섬 뒷정리를 하다 말고 벽을 둘러봅니다. 닥지 한 장의 원래 크기를 살려 붙이다 보니 창틀이 있는 벽은 한 뼘쯤 처진 꼴이 된 겁니다.

“자연스레 멋진데요, 뭘. 울퉁불퉁 나무가 드러난 삿갓 천장이랑 잘 어울린다니까.”

잠시 갸웃거리던 고개를 순하게 끄덕여주는 모습에, 조금 전 이런저런 얘기 끝에 문득 함께 “내일이네!” 하고 떠올리며 웃었던 결혼기념일을 생각합니다. 울퉁불퉁 조금 어긋난 채 자연스러운 이 흙집처럼, 내외 또한 낡고 바래가면서도 세상의 필요에 쓰이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잘 어우러지면 좋겠다고요.

말끔해진 방을 새 창호지 바른 문으로 잘 닫아놓고 나서는데 또다시 호돌이가 월월, 개울물이 찰찰, 소리칩니다.
글쓴이 원재길·이상희 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살며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1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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