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의상 디자이너 김영지

작품과 캐릭터의 성격을 한눈에 보여주는 무대의상 만들어요

뮤지컬이나 연극 무대에 오르는 배우들의 캐릭터를 살려주는 의상. 캐릭터의 성격을 설명해주면서, 관객의 눈까지 즐겁게 만들어주는 무대의상은 어떤 제작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걸까. 뮤지컬 〈댄스레슨〉 〈김종욱 찾기〉 〈파리의 연인〉 〈풍월주〉 〈스프링 어웨이크닝〉과 연극 〈돈키호테〉 등 다수의 작품에서 의상을 담당하며 색다른 발상의 의상으로 관객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김영지 디자이너를 연극 〈댄스레슨〉 공연장에서 만났다.
두산아트센터 〈댄스레슨〉의 의상실에 들어서자 극중 릴리 역할을 맡은 고두심씨가 입는 오렌지색과 보라색 드레스가 한눈에 들어왔다. 인생의 황혼기를 맞은 여주인공 릴리가 댄스강사 마이클로부터 춤을 배우며 변화해가는 모습을 그려내는데, 이 연극에서 릴리는 스윙·탱고·비엔나 왈츠·폭스트롯·차차차·컨템포러리 등 여섯 가지 춤을 선보인다. 무대의상을 디자인하기 전 김영지씨는 이 여섯 가지 춤을 먼저 이해하기 위해 댄스를 공부하고, 배우들이 연습하는 현장도 빠짐없이 찾았다.

“옷의 모양도 중요하지만, 배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파악해야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는 옷을 만들 수 있어요. 〈댄스레슨〉은 춤추는 동작이 많기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레이스와 프릴이 드러나도록 해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국립 무대의상 자격증(DMA Costume)을 딴 디자이너다.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는 3개월 가까이 대본을 분석하고 연구를 거듭한 후 무대의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작품을 맡으면 그는 우선 대본을 읽으며 캐릭터 분석에 들어간다. 연출가와 함께 콘셉트를 잡고, 영화・잡지・미술작품 등 여러 가지 자료를 참고해 일러스트 작업을 거친다.

“무대의상 디자인은 등장인물에 대한 분석뿐 아니라 작품 전반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무대에서 옷은 그저 옷으로만 보여서는 안 됩니다. 작품의 전체 분위기와 내용, 공연 무대의 형태와 색깔, 이야기와 어우러져 작품을 설명하는 요소가 되어야 합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대학에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웨딩드레스 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유학을 결심했다. 부푼 꿈을 안고 도착한 파리에서 불어를 공부하던 그는 우연히 함께 불어를 공부하던 일본인 친구와 함께 발레를 보러 갔다. 그때 본 발레 공연이 〈라 바야데르〉였다.

“당시 발레는 잘 몰랐지만, 발레 의상이 멋져 보였어요. 그때 처음 무대의상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이후 매주 일본인 친구를 따라 발레를 보러 다녔어요. 제가 공연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 교수님이 작은 공연에서 의상을 맡도록 기회를 주셨고, 그게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무대의상을 직접 만들면서 더 흥미를 느꼈고, 무대의상으로 전공을 바꾸기에 이른다. 프랑스 파리의 리세 쥘 베른 국립대에서 무대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뒤, 오페라・뮤지컬・연극 무대의상 디자이너로 꾸준히 활동하던 그는 2006년 귀국했다. 경력은 화려했지만, 막상 한국에서 일하려니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무작정 포트폴리오를 들고 대형 뮤지컬 제작사를 찾아다니며 자신을 알렸다.

“처음에는 우리나라 시스템은 외국과 달라서 어렵다며 숱하게 거절당했어요. 그래도 굴하지 않고 계속 찾아다녔더니 기회가 오더군요.”

2007년 유니버설발레단이 공연하는 뮤지컬 발레 〈심청〉의 외국 의상 디자이너가 갑자기 펑크를 내는 바람에 평소 부지런히 얼굴을 알리고 다녔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그동안 〈춘향〉 〈바리〉 〈배비장전〉 등 한국적 소재를 가지고 창작발레를 할 때는 한복을 개량해 입는 것이 기본이었는데, 그는 완전히 다른 제안을 했다.

“발레는 손목・발목・쇄골 등 몸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것이 핵심인데, 한복을 입고 춤을 추면 그게 다 가려지잖아요?”


그는 튀튀(발레 의상) 아랫단에 색동 디자인을 넣고, 한복의 옷고름을 다는 방식으로 기존 발레의상과 한복을 융합한 새로운 의상을 선보였다. 역발상으로 만든 그녀의 무대의상에 호평이 이어졌고, 이후 다양한 작품을 맡게 됐다. 무대의상은 우선 예쁘고 편안해야 하지만, 캐릭터를 설명해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그는 “작품을 분석하면서 고민하는 게 재미있다”고 말한다.

뮤지컬 〈풍월주〉의 경우 대본상 나와 있는 신라시대 대신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를 의상 콘셉트로 택했다. 등장인물인 진성여왕이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삶과 다른 듯 닮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외사촌이자 남편이었던 앨버트 공이 죽자, 거의 40년을 홀로 살면서 평생 검은 옷을 입고 미망인을 자처했대요.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장례식 때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게 됐죠. 신라시대 복식을 고증하는 대신, 빅토리아 시대 옷으로 그런 분위기를 살리고 싶어 중세풍 옷으로 바꿔 만들었죠.”


6년 동안 60여 편의 공연 무대의상을 맡았던 그는 디자이너 후배를 양성하는 데도 힘쓰고 싶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무대의상은 아직 생소한 분야입니다. 저 역시 가이드라인도 없고, 가르쳐줄 스승도 없어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지요. 무대의상 디자이너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전문적인 학위 과정도 없고, 관련 부문 시상식도 찾아보기 힘들어요. 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무대의상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유학을 가지 않아도 좋은 커리큘럼으로 교육을 받고 마음껏 역량을 펼칠 수 있는 무대의상 디자인학교를 만들고 싶습니다.”

무대의상 디자이너는 리허설 기간이 제일 바쁘다. 무대에서 옷을 입고 움직이다보면 손볼 부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성된 무대를 볼 때는 에너지가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무대의상을 준비하는 동안 고생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제가 만든 옷을 배우들이 입고 공연하는 모습을 보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기회가 되면 영화 쪽 일도 해보고 싶지만, 아직은 무대의상 디자인이 제일 좋다는 그는 “제 전공은 중세의상입니다. 그런데 〈돈키호테〉 이후로 그런 공연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스타일로 시대적인 작품을 좀 더 해보고 싶은데, 내년에는 기회가 올 것도 같아요”라고 말한다.

예순이 넘어서도 무대의상을 디자인하고 싶다며 매 작품 ‘이 작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열심히 일한다는 김영지 디자이너.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드는 무대의상은 무대의 또 다른 주인공임에 틀림없다.

사진 : 김선아
  • 201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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