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68) 참외의 성공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아직 푸른 기가 채 가시지 않은 참외를, 손바닥으로 한번 쓱 문지르고 껍질째 베어 먹습니다. 흥이 날 때면 곧잘 자연의 맨발 아이가 되곤 하지만, 그보다는 남편이 석 달 남짓 애면글면 일궈 건넨 이 열매 선물에 대한 경의에서입니다. 또 이 산골짜기 땅의 무해유익함을 믿어서겠지요. 무엇보다 참외 껍질이 속살이나 다름없이 야들야들한 덕분이고요. 아삭아삭 연하게 씹히면서도 싱그러운 과즙과 향내가 달콤하기 그지없습니다.

“아아, 난 이제 수퍼에서 파는 비닐하우스 참외 못 먹어! 진짜 맛나다아.”

“어? 그 정도라니, 흠… 보람차다!”

지난해 “참외 실컷 먹게 해줄게요”라고 호언장담하며 남편이 처음 시도했던 참외 농사는 대실패였습니다. 어린 시절 시시때때 제철 과일을 빠짐없이 먹여주신 어머니 덕분에 몸속에 과일 주머니를 따로 지니게 된 나로서는 수퍼마켓 과일 매대에서 실패와 결핍을 해결했지만, 남편은 조용히 참외 관련 정보를 샅샅이 뒤져가며 패인을 분석했던 모양입니다.

“참, 그 그림! 그 그림대로, 진짜 그대로 한 거예요?”

언젠가 남편의 컴퓨터 책상에 앉았다가 벽에 붙여놓은 펜 그림을 발견하고 눈이 동그래졌던 기억이 납니다. 땅에서 뻗어 나온 식물 줄기, 일일이 번호 매긴 이파리들, 이파리들 위에 빨간 엑스 자 표시….

“그럼.”

“거기, 또 뭐라고 뭐라고 써 있었던 것 같은데?”

“‘어미 줄기가 다섯 장 나왔을 때 일 번 이 번 곁순을 자르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만 키운다. 아들 줄기 넉 장 나왔을 때 곁순을 자르고, 여덟 번째 잎 나오면 끝순 자른다. 손자 줄기 첫 번째부터 세 번째 곁순까지 자르고, 열매가 달리면 그다음 나오는 끝순은 자른다… 이런 걸 지난해엔 전혀 몰랐지.”

5월 초에 모종 심고부터 석 달 남짓 이 두어 평 한해살이 덩굴풀밭에서 아침마다 잘 놀았다며 텃밭 농부는 싱긋 웃습니다만, 풀 한 포기에서 한 주먹 크기 열매가 자라고 키워내고 한 시간과 수고를 생각하니 참외 한알 한알이 위대한 성공의 산물 그 자체입니다.

“막 베어 물 게 아닌데… 두 손으로 받들고 절이라도 하고나서 먹을걸.”

“오리 지키느라 그쪽도 얼마간 일조했지.”

미안해하는 단순 포식자를 위로하느라 남편이 한 말이 영 빈소리는 아닙니다.

보름 전쯤, 한창 참외 알이 굵어지는 참인데 어디서 길 잃은 어린 거위 하나가 들어온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기가 어디냐는 듯, 엄마가 어디 있느냐는 듯 저 아래쪽 건수씨네 논에서부터 앞뜰을 가로질러 이 뒤뜰까지 종횡무진 뒤뚱거리며 꽥꽥거리는데, 돌돌이까지 월월거리며 쫓아다니는 통에 반나절 내내 숲골짜기 집이 떠들썩했지요. 남편이 동네 소식통에게 물어 뒷집 거위라는 게 밝혀지고 뒷집 인석씨에게 거위 데려가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성당에 다녀오느라 느지막이 메시지를 확인한 주인이 거위를 데려가기까지, 남편의 요청에 따라 무엇보다 참외밭을 사수했습니다. 모자를 쓴 채 의자를 갖다 놓고 책을 읽으면서요.

“참, 그런 일도 있었네!”

꽥꽥거리고 월월거리던 어린 동물 둘이 내가 앉은 의자 앞에서 나란히 걸음을 멈추고 두리번두리번, 마침내 돌돌이는 주저앉고 거위는 선 채로 꾸벅꾸벅 졸던 장면이 떠올라 문득 ‘하하’ 웃음이 터집니다.

“돌돌이 조는 거야 여러 번 봤지만, 거위가 조는 건 그날 처음 봤어요. 기다란 목을 아주 꼿꼿이 세운 채 고장난 셔터처럼 딱 눈꺼풀만 스르르 내려오더라고.”

이제 곧 도착할 어머니와 딸아이 몫의 참외를 따서 챙기며 남편도 따라 웃습니다.

“참외 드실 때 거위 얘기를 꼭 곁들여야겠네요.”
글쓴이 원재길·이상희 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살며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12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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