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64) 밀짚모자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자전거야, 우리 한번 달려야 하는데… 이런, 이게 다 돌돌이 녀석이 물어뜯어놓은 거야?… 어라, 매화꽃이 자꾸자꾸 피어나네!”

중얼중얼, 어슬렁어슬렁, 한여름 밀짚모자를 쓴 채 현관 앞뜰에 건조대를 내놓고 빨래 너는 일이 더딥니다. 밤낮 빽빽한 일정표에 휘둘려 지내다 보니 이런저런 살림이며 풍경이 주말에나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눈 녹은 지 오래인데도 꼼짝 못하고 묶여 있는 자전거는 토라진 기색이고, 남편의 운동기구 옆 바구니엔 슬리퍼며 구두가 돌돌이한테 물어뜯긴 채 그득히 쌓여 있습니다. 더디 핀 설중매 꽃은 쑥스러운 빛도 없이 햇살을 마음껏 들이켜는 참이고, 홍단풍나무는 무슨 미련 탓인지 지난 가을의 낙엽을 여태 매달고 있습니다.

문득 맹렬히 짖어대는 낯선 소리에 놀라 꿈을 깨듯 사방을 둘러봅니다. 아래 뜰 호돌이 곁에서 돌돌이가 나를 향해 젖 먹던 힘을 다해 왈왈 짖어대고 있습니다.

“아니, 돌돌이가 왜 나를 보고 저렇게 짖어?”

뜰을 돌아다니며 나무를 돌보고 있던 남편은 녀석이 신통해 죽겠다는 듯 나를 돌아보며 소리칩니다.

“세상에, 우리 돌돌이가 짖을 줄도 아네!”

어이없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녀석을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다가 드디어 이 기묘한 상황의 원인을 파악했습니다.

“아하, 우리 돌돌이가 밀짚모자 쓴 엄마를 처음 봐서 그러는구나!”

몇 차례 맨 얼굴로 봄볕 쏟아지는 뜰에 나섰다가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긴 터여서 밀짚모자를 챙겨 썼더니, 돌돌이 눈엔 그렇게나 내가 낯설었던 모양입니다.

“야아, 든든하다. 이 정도면 도둑이 왔다가도 놀라 달아나겠네!”

남편이 쏟아붓는 칭찬을 알아들었는지 돌돌이는 더욱 맹렬하게 짖어댑니다.

슬그머니 서운한 마음이 솟아나는 채 밀짚모자를 벗습니다. 그러자마자 다시 한 번 어이없게도, 녀석은 당장 짖기를 멈추고 꼬리를 흔들며 달려옵니다.

“돌돌이, 너… 섭섭하다. 엄마가 모자를 썼을 뿐인데, 몰라보니?”

내가 소심하게 굴건 말건, 돌돌이는 자기를 이뻐하는 이가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 더 바랄 게 없는 듯합니다. 겅중겅중 뛰어오르고, 핥아대고, 열정적으로 꼬리를 흔들어댑니다. 이쯤 되면 나를 몰라봤다고 서운해한 것이 미안해집니다.

남편은 돌돌이가 짖은 사건에 계속 감동된 상태입니다.

“설마 우리 돌돌이가 수의사 헤리엇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개 이야기》에 나오는 ‘평생 딱 한 번 짖은 개’ 지프 같은 경우는 아니겠지요?”

나도 읽은 책이라 그게 무슨 얘긴지 금세 알아듣습니다. 윌킨 씨의 농장에서 자라는 개 지프와 스위프는 한배의 새끼 중에서 가장 우수한 두 마리로, 주인의 열정적인 훈련에 의해 양치기 개 경연대회에서 우승합니다. 이 둘은 믿기 힘들 정도로 사이가 좋아서 늘 함께 돌아다니거나 나란히 멈춰 선 채 무엇인가를 바라보곤 해요. 그러던 어느 날 윌킨 씨가 오랜 친구한테 스위프를 넘겨주는 바람에 개들은 헤어지게 됩니다. 지프의 간질 증세를 치료하러 윌킨 씨의 농장에 드나들던 헤리엇은 우연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 지프가 태어난 이후로 여태껏 한 번도 짖지 않았다는 거지요. 그 후 헤리엇은 정말 그 매력적인 개가 틀림없이 짖을 만한 상황인데도 짖지 않는다는 걸 여러 차례 확인합니다. 지프의 증세가 호전되어 한동안 윌킨 씨네 농장에 가지 않게 된 헤리엇은 어느 해 양치기 경연대회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는데, 주인에게 이끌려 구경 온 지프가 대회에 출전한 스위프가 멋진 과제를 해내는 걸 지켜보고는 ‘컹’ 하고 짖은 겁니다. 모두 그 사건을 계기로 지프가 여느 개들처럼 짖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예상은 빗나가지요.

나의 낯선 모습을 보고 짖었으니, 우리 돌돌이는 지프의 경우와는 틀림없이 다를 테지요. 그런 믿음을 말없이 주고받은 다음 순간, 내외는 똑같이 짓궂은 생각을 거의 동시에 내보였습니다.

“온갖 모자를 번갈아 써봅시다!”

“모자란 모자는 다 꺼내 써봅시다!”

치사한 음모를 알 리 없는 돌돌이는 꼬리를 흔들며 까만 눈망울로 내외를 말똥말똥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글쓴이 원재길·이상희 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살며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12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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