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58) 맨발의 배드민턴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해 뜨자마자 싸늘한 기운이 순식간에 가시더니, 단숨에 한여름 땡볕 못지않은 열기가 쏟아집니다. 잠깐 빨래를 너는 짧은 시간에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참입니다.

“어이쿠, 아직 선크림이 필요한 시절이네!”

혼잣말을 하며 빈 빨래 바구니를 안고 서둘러 현관으로 뛰어드는데, 아래 뜰에서 호돌이 밥을 주고 있던 남편이 소리칩니다.

“배드민턴 한판 해야지?”

좀처럼 운동할 짬을 못 내는 채 기운이 달려 쩔쩔매는 내게 지난 주말부터 남편이 배드민턴을 강권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관둘까 봐. 한판 치고 나면 땀날 테고, 땀나면 샤워해야지, 샤워하고나면 나른해져서 한숨 자야지… 안돼, 안돼, 할 일도 많은데 큰일 나. 배드민턴 칠 새 없다고.”

하지만 남편은 어느새 라켓을 꺼내어 셔틀콕을 튕기고 있습니다.

“땀 안 나게 살살, 딱 열 번만 치자고. 나도 할 일 많아.”

난감한 얼굴을 하고는 있지만, 발은 벌써 신발을 벗어던집니다. 현관 앞뜰 잔디밭을 맨발로 뛰고 구르는 기분이 근사하다는 걸 기억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딱 열 번만!”

맨 얼굴에 가을 햇볕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는 금세 까맣게 잊고 맙니다. 오직 날개 달린 하얀 공만 쫓고 쫓습니다.

가을 구름 사이로 잠깐잠깐 어릴 때 오빠들과 언니와 아버지와 주고받았던 플라스틱 날개 공이 떠오릅니다. 아버지도 내게 운동을 시키느라 열심이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약골이어서 걸핏하면 자리보전하고 누워 지내던 막내를 튼튼이로 만들려 애썼습니다. 새벽마다 2km 넘는 길을 구보 행진시키기도 하고, 오빠 언니와 집 앞 골목길에서 배드민턴 시합을 벌이게도 했지요. 그 덕분에 사시사철 골골대는 말라깽이치고는 강단이 있어 학급 대표 달리기 선수까지 지냈습니다.

“집중합시다아?”

연거푸 공을 놓쳐 계단 아래로 주우러 내려가면서 왜 자꾸 아버지 생각이 날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찰나 답이 튀어나옵니다.

아버지 기일이 얼마 전이었는데, 부산 오빠 댁까지 갈 시간을 못 잡아 건너뛴 것이 마음에 걸려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제 다시 오직 하얀 날개공에만 집중합니다. 맨발이 즐겁도록, 등줄기에 땀이 배도록, 놓치지 않고 하얀 날개 공을 받아치려 뛰고 구릅니다. 한순간 맨발에 밟히는 초록 생명이 혈관을 타고 함께 달립니다. 생생한 바람이 폐에 그득히 담기고, 열렬한 햇빛이 얼굴을 달굽니다. 엊그제부터 읽고 있는 《아이들은 왜 자연에서 자라야 하는가》의 한 구절, “해와 바람, 개구리, 나무 등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고, 우리를 강하게 만들며, 활기차게 한다”가 몸 어딘가에 또렷이 아로새겨지는 듯합니다.

처마며 지붕 모서리를 스치며 용케 땅으로 떨어졌던 날개 공이, 드디어 지붕 위로 올라가버렸습니다. 그것으로 오늘의 맨발 배드민턴도 끝이 났습니다.

“나중에 내가 사다리 타고 올라가서 꺼낼게.”

남편 얘기에, 어릴 때 공놀이며 배드민턴 치다가 이런 식으로 공이 높은 데 올라가면 으레 아버지며 오빠들이 나를 무동 세웠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지붕 위를 엉금엉금 기어 공을 찾아 들면 와, 하고 짐짓 놀라워하며 쳐주던 박수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한바탕 땀을 씻어낸 다음 커피 한 잔 들고 다락방 책상으로 돌아가며, 역시 자기 책상 앞에 가 앉은 남편을 향해 소리칩니다.

“집중합시다아?”

남편이 노트북만 바라보며 복창합니다.

“그러게, 집중합시다아?”

바깥은 가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글쓴이 원재길·이상희 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살며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1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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