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슬로시티로 지정된 청송 덕천마을을 가다

99칸 한옥 송소고택에서의 하룻밤…

경북 청송 덕천마을로 가는 길은 고즈넉했다. 길목에서 맞은 드넓은 안동호와 임하호는 도시에서의 가쁜 마음을 내려놓게 했다. 9월 초, 늦여름 기세를 이기지 못한 산들은 여전히 짙은 녹음을 뿜었고, 듬성듬성 와 있는 가을은 어정쩡한 기운을 내뱉었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려 일조량이 부족한 사과는 이제야 불그스레 익어간다. 사과밭이 점점 촘촘해지는가 싶더니, 청송이다.
청송 덕천마을에 겹경사가 생겼다. 99칸짜리 한옥 송소고택(松韶古宅)이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2011 한국 관광의 별’에 뽑힌 데 이어 올 6월에는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우리나라에서 아홉 번째이자 경북 최초의 슬로시티다. 덕천마을은 청송 심씨의 집성촌으로, 송소고택 외에도 송정고택, 찰방공종택, 창실고택 등 아름다운 한옥이 즐비하다. 사방이 완만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 앞에는 신흥천이 졸졸졸 흐르는 덕천마을은 엄마 품처럼 아늑하다.

청송의 대표적인 볼거리는 송소고택과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로 유명한 주산지, 그리고 폭포들이 절경을 이루는 주왕산 등이다.

둘째 아들이 살았던 송정고택으로 통하는 쪽문이 보인다.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 만석의 부를 누리던 청송 심씨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1880년에 지은 집으로 ‘청송 심부잣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 송소고택이 고택체험으로 인기가 높은 이유는 몇 안 되는 99칸짜리 한옥 중 유일하게 안채와 사랑채를 모두 체험용으로 개방했기 때문. 다른 99칸 한옥의 경우, 개방하더라도 일부만 개방하거나 고택 앞에 별도의 체험형 한옥을 지어 운영한다.

송소고택 대문에서 들어서면 보이는 사랑채.
송소고택을 지키는 이는 심호택의 4대손 심재오씨다. 개량한복을 차려입은 그는 걸음걸이며 표정에서 품위가 넘쳤다. 송소고택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서울로 올라가 살다가 지난해 부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대기업 간부를 지낸 그는 ‘지금이 귀향의 적기’라고 생각했다 한다. “너무 젊어서 내려오면 할 일도, 배울 것도 없고, 너무 늦게 오면 힘이 달린다”는 게 그의 말이다. 그가 송소고택에 내려와 살면서 집 안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관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덕천마을에 경사가 터졌으니 그의 공이 적지 않다. 그가 송소고택 건축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는 옛날이야기처럼 구전(口傳)으로 전해 내려온다.

장자가 기거했던 작은 사랑채.
“이 집을 13년에 걸쳐 지었다고 합니다. 30~40명의 인부가 13년간 집 앞에 움막을 짓고 먹고 자고 했죠. 재미있는 건 안채와 사랑채, 바깥채를 지은 목수가 다 다르다는 겁니다. 경상도에서 이름난 목수가 안채를 먼저 지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셨대요. 전국의 솜씨 좋은 목수를 수소문하던 중 마침 경복궁 재건을 도맡았던 도목수를 찾아냈죠. 바깥채는 그 도목수의 솜씨예요. 바깥채가 무척 맘에 들어서 안채를 부수고 다시 지으려 했답니다. 그런데 적송을 구하기 쉽지 않아서 몇 년간 자재를 구하다 결국 포기했대요.”

큰 사랑채 큰방.
대청마루로 통하는 문은 궁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팔각무늬문을 달았다. 그러나 지금은 팔각무늬문이 한 짝도 남아 있지 않다. 25년간 이 집을 비워뒀는데, 그간 문화재 도둑이 들어 팔각무늬문 8개를 죄다 떼어 갔기 때문이다. 그 수준으로 복원하려면 한 짝에 300만원 정도 든다고 한다. 현재 그 자리에는 완자문이 달려 있지만, 언젠가 팔각무늬문으로 복원할 생각이라고 한다.

큰방 미닫이문에 달린 창문으로 대문을 드나드는 사람이 한눈에 보인다.
송소고택은 송정고택과 나란히 연결돼 있다. 송정고택은 송소 심호택의 둘째 아들 송정공 심상광이 기거하던 곳으로 1914년 건립됐다. 심재오씨는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제 증조부가 130년 전 이 집을 지으실 때 아들이 네 명 있었습니다. 맏이 옆집에 둘째, 그 옆에 차례로 셋째, 넷째 아들의 집을 지었습니다. 이 집들은 쪽문으로 연결돼 있어요. 아쉽게도 셋째와 넷째 집은 6·25 때 불타 없어졌습니다. 인민군이 불을 질렀죠. 이 집은 6·25 때 인민군 중대본부로 쓰였는데, 만석꾼 집이지만 인심을 잃지 않아서인지 전화를 입지 않았습니다.”

송소고택의 주인 심재오씨와 그의 아내.
송소고택의 방은 모두 14개. 한 개는 심재오씨 부부가 쓰고 나머지 13개는 모두 체험형으로 개방했다. 옆집 송정고택 역시 6개의 방에서 고택체험이 가능하다. 기자는 큰 사랑채 큰방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바깥채 가운데에 있는 이 방은 집안의 큰 어른들이 기거하던 방이다. 이 방의 오른쪽에는 집안 손님들이 기거하던 누마루방이, 왼쪽에는 장자가 기거하던 작은 사랑채가 있다. 안채에는 여자들이 기거하던 방이 쪼르르 있다. 안채로 드나드는 여자들이 보이지 않도록 사랑채 앞마당에 담장이 가로질러 있는 구조가 재미있다. 큰 사랑채 미닫이문 창문으로 보니 대문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훤히 보인다. “에헴” 헛기침을 하며 창문으로 집 안 풍경을 한눈에 내다봤을 그 옛날 어른들을 상상해본다.

다슬기 잡기 체험장.
매주 토요일 오후 8시, 덕천마을 광장에는 사람들이 모인다. 번갈아가면서 진행되는 다슬기 잡기 체험, 별동산 달맞이 체험, 초롱불 행렬을 하기 위해서다. 이번 주는 다슬기 잡기 체험 차례다. 체험하러 온 관광객과 마을 주민들이 하나가 되어 헤드랜턴을 쓰고 마을 앞 신흥천에 다슬기를 잡으러 간다. 인공의 가로등을 두지 않은 마을을 밝히는 건 고택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다. 밤하늘의 별들도 총총 빛을 낸다. 손톱 같은 초승달은 구름 뒤에 숨었다. 체험자들이 종이컵 한가득 잡은 다슬기를 마을의 유일한 식당인 소슬밥상에 갖다주면, 식당 주인은 20분 만에 다슬기를 삶아 내온다. 옹기종기 모여 청송 막걸리를 곁들여 먹는 다슬기 맛은 기막히다. 옆에는 송소고택에 사는 삽살개 껌껌이와 송정고택에 사는 복돌이 커플이 듬직하게 지키고 있다. 고택에서의 밤은 그렇게 저물었다.

체험장에서 마을 주민과 고택체험 관광객은 하나가 된다.
안개 낀 주산지를 보기 위해 아침 일찍 서둘렀다. 뒷짐 지고 나타난 심재오씨는 “새벽에 보니 덧문까지 걸고 자더군요. 그러면 안 됩니다. 텁텁합니다. 덧문은 영하 20도 이하의 한겨울을 대비한 것이지요. 평소에는 미닫이문 하나만 닫고 자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송소고택에서 주산지까지는 약 20km, 자동차로 20여 분 걸린다. 이른 아침 주산지의 느낌은 특별하다. 흐린 날씨 탓에 물안개는 없었지만 산등성에 걸린 구름을 배경으로 호수가 펼쳐져 있다. 주산지 군데군데 솟은 왕버들나무가 신령스럽다. 시간의 흔적을 머금은 채 굽고 뒤틀린 왕버들나무 가지들은 태곳적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호수에 고스란히 비친 나무들의 형상을 보고 있자니 190년간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 없다는 호수 속으로 빨려들 것 같다.



주산지.
슬로시티 덕천마을로 돌아오는 길, 과수원 여기저기에서 청송사과를 팔고 있다. 비가 적고 일조량이 풍부한 데다 일교차가 크고 해발 250m의 산간지방에 펼쳐진 청송은 당도 높은 사과를 재배하기에 천혜의 조건을 지녔다. 새빨간 홍로를 한입 베어 물었다. 말간 꿀이 박혔다. 새콤달콤한 과육과 과즙이 입안 가득 퍼진다. 송소고택 안주인이 그날 만든 식혜를 내왔다. 갈 길이 멀다며 서두르는 기자 일행에게 심재오씨는 이렇게 말했다.

“천천히 쉬었다 가세요. 여기는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습니다. 서울에 살 때에는 복잡한 일도 많고 하루가 빨리 갔는데, 여기 와서는 급한 일이 없어요. 마음이 편안하고 무엇보다 건강이 좋아졌습니다. 공장 하나 없는 청송은 공기가 아주 맑습니다. 흙길을 걸으면 나무 향기, 풀 향기가 콧속으로 솔솔 들어오지요.”

가는 길
◎ 수도권에서 영동고속도로로 강릉 방향 → 중앙고속도로 대구 방향 → 서안동 나들목, 34번 국도 → 안동 임하호 지나 청송 진보면 소재지 진안사거리에서 31번 국도 따라 우회전
◎ 수도권에서 청송읍까지 자동차로 4시간 거리. 서울에서 청송읍으로 가는 버스는 하루 5회 운행한다.

먹거리
◎ 신촌약수탕과 달기약수탕 부근에서 파는 토종닭백숙이 유명하다. 약수의 철분 함량이 높아 위장에 특히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녹두를 듬뿍 넣어 담백하고 깊은 맛이 난다. 오가피, 박쥐나물, 곰취, 산마늘 장아찌에 닭고기를 싸먹으면 감칠맛이 난다. 떡갈비에 가까운 닭불고기, 주왕산 기슭에서 채취한 산나물을 가득 넣은 산채비빔밥도 일품.

송소고택(054-874-6556)
◎ 고택체험을 하려면 최소 1주일 전에 예약해야 한다. 1박에 5만~10만원선. 별채는 20만원. 사랑채 앞마당에서 한 달에 한 번 송소음악제를 연다.
  • 2011년 10월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보내기
  • 목록
  • 프린트
나도 한마디
이름      비밀번호  
스팸방지 [필수입력]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더 볼만한 기사

10개더보기
상호 : ㈜조선뉴스프레스 / 등록번호 : 서울, 자00349 / 등록일자 : 2011년 7월 25일 / 제호 : 톱클래스 뉴스서비스 / 발행인 : ㈜조선뉴스프레스 이동한
편집인 : 이동한 / 발행소 : 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34, 13층(상암동, 디지털큐브빌딩) Tel : 02)724-6875(독자팀) / 발행일자 : 2017년 3월 29일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민희 / 통신판매신고번호 : 2015-서울마포-0073호 / 사업자등록번호 : 104-81-59006
Copyright ⓒ topclass.chosun.com All Rights Reserved.

조선뉴스프레스 | 광고안내 | 기사제보 | 독자센터 | 개인정보 취급방침 | 인터넷신문윤리강령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위원회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