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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56) 땅콩밭에서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손님들이 오고, 떠나고, 또 오고, 떠나는 사이 여름이 흘러갑니다. 자유 작가들에게 휴가라는 게 따로 없으니, 손님 오는 날이 쉬는 날이지요. 그러나 금쪽같은 휴가를 즐기러 머나먼 숲골짜기로 온 친지며 친구들을 대접한다는 게 녹록지 않게 신경 쓰이는 일이어서, 손 흔들며 떠나보내고 나면 슬몃 무릎이 꺾이는 피로가 몰려오곤 합니다.

이날도 오랫동안 벼르고 별러서 다녀가는 친구 내외를 배웅하고 개울가에 잠깐 쪼그리고 앉은 참인데, 그쪽 밭 한 고랑에서 뭔가 무성하게 자라는 게 보입니다.

“어, 뭐가 이렇게 잘 자라는 거야?”

“한번 맞춰보시우.”

아카시 잎 비슷하게 갸름한 이파리가 줄기마다 총총 밭고랑 그득히 자라고 있습니다. 어느새 피었다 졌는지, 노란 꽃잎도 드문드문 이파리에 묻어 있습니다.

“아카시는 나무니까 아닐 테고… 슈퍼 네 잎 클로버? 대체 나도 모르는 뭘 심은 거야?”

남편은 싱긋 웃으며, 스무 고개라도 하자는 듯 대답을 미룹니다.

“당신이 엄청 좋아하는 거야.”

“좋아하는 거?”

“나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당신만큼은 아니고. 이거 먹다가 혼났지.”

그러자 생각이 납니다. 언젠가 내가 사다놓은 견과류 한 통을 한꺼번에 먹고는 탈이 나서 치과 나들이를 했으니, 앞으로는 숲골짜기 집에 들어올 때 사오지 말라고 했던 것.

“견과류?”

“절반 맞혔어! 자, 견과류 중에서?”

호두・땅콩・아몬드… 가운데 이런 식으로 자랄 만한 건 땅콩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땅콩밭 풍경하고는 사뭇 달라서, 우물쭈물합니다.

“땅콩?”

“응, 맞아. 낙화생이라고도 하잖아.”

“그런데, 이상하네. 어릴 때 봤던 낙동강변 땅콩밭하고는 다른걸. 어쨌든, 이건 언제 심었어?”

남편이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언제더라… 하여튼 다른 작물들보다 한 달쯤 먼저 심었어.”

이른 봄 아랫마을 황씨 아저씨네 컴퓨터 고쳐드리고 얻어와 심었는데, 싹 트는 데만 한 달이 걸렸답니다. 그러니 한창 요기조기 싹 나던 때, 이건 양배추, 이건 근대, 이건 토마토, 이건 가지… 하며 일러줄 때 빠뜨릴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어때, 이 정도면 실컷 잡숫겠지?”

양이 문제가 아닙니다. 숲골짜기 청정한 뜰에서 자란 땅콩을 먹게 되다니! 상상만으로도 흐뭇합니다. 호두며 아몬드는 나무 열매라서 괜찮지만, 땅콩같은 뿌리 열매는 신경 써서 생산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의사 친구 얘기 덕분에 예민했던 터입니다.

“와, 고마워! 그동안 땅콩 생각 간절해도 꾹 참았거든. 저렴한 중국산 땅콩은 그쪽 땅이 중금속 오염이 심하다니 찜찜해서 손이 안 가고, 국산 땅콩은 두세 배로 비싸서 손이 안 가고.”

땅콩이 주렁주렁 열리면 손님 대접에도 한몫하겠지요.

“여름 손님에겐 풋고추・토마토・참외・옥수수・감자, 겨울 손님에겐 감・고구마・땅콩!”

벌써 그림이 그려집니다. 난로 위에서는 찻물이 설설 끓고, 땅콩이 노릇노릇, 난로 속 고구마구이 통 속에서는 구수하게 고구마가 익어갑니다.

“빗방울 떨어지네. 밀린 원고도 있다면서? 어서 들어갑시다.”

“그러게… 친구들 올 때마다 마음 편히 놀려면 부지런히 일해둬야지!”

막 땅콩밭을 떠나는데 띠릭, 하고 문자메시지 오는 소리가 납니다. 방금 떠난 친구들에게서 온 겁니다.

“꿈같은 추억, 깊이 간직할게.”
글쓴이 원재길·이상희 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살며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11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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