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55) 어떤 무시무시한 폭풍우가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어젯밤부터 비가 한숨 쉬지도 않고 계속 내립니다. 지붕이 뚫어질지도 몰라 지난밤 잠들 무렵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하, 그래서 꿈도 사나웠던 모양입니다. 간단히 씻고 아침을 먹고, 뜰에 나가보지도 못한 채 노트북에 매달려 일을 합니다. 비에 떠내려가다 보니 어느 섬에 이르렀다는 듯이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칼국수를 잠깐 떠올리다가 내 몸에 안 맞는다는 밀가루 맛을 잊으려 애쓰는 참이라 메밀냉면으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남편도 냉면은 언제든 좋다는 주의라 물어보지 않아도 되고요. 비빔냉면에 넣을 채소를 구하러 우산 받쳐 들고 장화 신고 텃밭으로 갑니다. 어이쿠, 어제 저녁 식탁에 오이가 넉넉하다 했더니 그게 다였던 모양입니다. 빗물 흥건한 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오이・가지를 살피자니, 엄지손가락만 한 오이들만 조랑조랑 매달려 있습니다.

맵지 않은 고추 좀 따고, 상추 좀 솎고, 그러는 짬짬이 채소 잎줄기마다 온갖 벌레들이 비를 피해 오글거리고 있는 데 마음이 팔렸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정도로 세찬 비가 계속 내리면 이 작은 것들은 어디라 오갈 데가 없겠지요.

“비 그칠 때까지 벌레들이 편안히 지내게끔 방 한 칸을 내주면 어떨까…”

혼자 중얼중얼하는데, 남편 소리며 호돌이 깽깽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디 갔다 와? 난 방에서 일하는 줄 알았는데.”

빗소리에, 개울물 내려가는 소리에 도무지 대화가 안 됩니다.

집 안에 들어와서야 그사이 일어난 얘기를 듣습니다.

“소라 할머니네 논물 봐주고 와서 참외밭 들여다보고 있는데, 뭐가 옆에 쓰윽 와서 할딱거리는 거야.”

목 끈이 풀린 호돌이가 빗속의 자유를 만끽하며 제 주인 냄새를 쫓아왔던거지요.

“어, 하고 붙잡으려 했더니 녀석이 소라네 집 쪽으로 휙 달아나지 뭐야.”

“불러도 대답도 않고!”

호돌이가 순하게 대답하고 얌전히 돌아오길 바라는 건 순전히 우리의 바람일 테지만, 호돌이 탈출 사건 때마다 우린 똑같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배신감을 나누곤 합니다.

몸을 씻고 온 남편이 냉면 삶고 비비는 걸 거들며 계속 얘기합니다.

“그렇게 돌아치며 날뛰면 붙들기 힘들어. 소라네 큰아버지가 도와줬기 망정이지.”

“그러게, 빗속에… 고마운 분이네. 여름 내내 자기네 논에 물 대느라 당신이 도맡아 고생하는 걸 아는 거지?”

“뭐, 원 작가 덕분에 올 농사가 잘되고 있다고 그러지.”

원고 쓰기며, 텃밭농사며, 집 안 관리며, 출퇴근하는 월급쟁이들 못지않게 빡빡하게 사는 남편이지만 걸핏하면 119에 실려 가는 할머니 혼자 농사짓는 걸 몰라라 할 수가 없습니다. 소라네 큰아버지는 멀리 살면서 잠시 들여다보러 왔다 가는 아들일 뿐이고요. 드디어 비빔냉면에 감자전 접시가 차려졌습니다. 내외가 나란히 비 내리는 숲을 바라보며 식탁에 앉습니다.

“뭔가 빠졌지?”

“그래, 감식초!”

남편이 감식초 단지를 가지러 갑니다. 지난 가을에 담고 올 5월에 걸러서 좀 덜 되긴 했지만, 한 국자 떠서 두 그릇에 나눠 넣습니다. 역시 이제야 감칠맛이 제대로 납니다. 지난주에 캐낸 햇감자로 부친 따끈한 감자전도 맛납니다.

짐승들은 지붕 위에서 킬킬대고/ 그리고 공중에서 휘파람 불고/ 그리고 주먹을 흔들어대며/ 그리고 이빨을 악물며/ 그리고 미쳐 날뛰는 머리칼을 흔들었네…(에밀리 디킨슨의 시 <어떤 무시무시한 폭풍우가> 중에서)

에밀리 디킨슨이 말한 그 ‘무시무시한 폭풍우’ 속에서도 숲골짜기 작은 집은 아늑합니다.
글쓴이 원재길·이상희 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살며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11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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