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한복 패션쇼 여는 전통 복식 연구가·한복 디자이너 김혜순

지난 6월 말, 서울 한남동 하얏트호텔에서 전통 복식 연구가이자 한복 디자이너인 김혜순(55) 씨가 특별한 패션쇼를 열었다. 윤석화·채시라·송일국 등 50여 명의 유명 배우들이 모델로 나선 이 무대는 그의 외삼촌이자 한복을 가르쳐준 스승인 고 허영 선생 타계 10주년을 추모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동시에 오는 10월 3일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최초로 열리는 한복패션쇼 <조선의 왕, 뉴욕에 가다>를 미리 선보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28년 동안 한복을 지어온 그에게 한복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이다. 스스로를 일컬어 “한복에 미친 사람”이라는 그의 오랜 소원은 바느질하다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나는 질퍽한 촌년이지요. 전생에는 분명 기생이었을 테고….”

새하얀 정장을 곱게 차려입고, 온화한 미소를 띤 김혜순 씨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촌년’이 맞고, 기생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아름다워 보이니, 자신이 신나게 살다 간 기생이 아니겠냐는 말이다. 재미있는 설명이다.

“증조 할머니, 할머니와 함께 3대가 한집에서 살았어요. 그 시절 우리 어머니들이 얼마나 일이 많았겠어요. 어린 시절 내가 집에서 가장 많이 본 풍경은 할머니가 베를 짜거나 바느질하던 모습이에요. 동네에서도 할머니의 옷짓는 솜씨가 하도 유명해서 다들 ‘까치 할머니’라고 불렀던 기억이 나네요.”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재능이 빛을 발한 것일까. 지금 그의 한복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인기가 좋다. 그는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개최 행사의 일환으로 열었던 의복 전시를 시작으로, 관혼상제 패션쇼(1999년), 한국 전통 복식전(2002년), 서울역사박물관 개관전 ‘구장복’ 재현(2002년), 저고리 600년 변천사 전시회(2003년), 프랑스 파리에서 연 조선시대 의복 전시회(2003년), 기생을 주제로 한 최초의 전시회(2005년), 미국 워싱턴에서 저고리에 대한 강연과 전시회(2007년), 프랑스 브랜드 펜디(FENDI)의 가방 디자인과 펜디 선정 세계 아티스트 10인에 선정(2008년), G20 정상회담 패션쇼(2010) 등에 참여했다. 또 〈토지〉 〈천년학〉 〈무인시대〉 〈황진이〉 등 역사 드라마와 영화를 위해 의복을 제작했다. 이 밖에도 중국・일본・핀란드・말레이시아・러시아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꾸준히 초청 전시와 패션쇼도 연다. 이는 그가 한복 디자이너로, 전통 복식 연구가로 성장하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노력한 결과라고 말한다.

지난달 서울에서 사진전을 연 할리우드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에게 김혜순 씨는 손수 지은 한복 5벌을 선물했다. 리처드 기어는 한복을 염색하는 방법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28년 전 외삼촌한테 한복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때 외삼촌이 제게 당부한 말씀은 반쯤 숨어서 살라는 거였죠. 가게에 간판을 걸 이유가 있느냐, 제대로 한복 짓는 한복쟁이가 되면 사람들이 너를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나서지 말고 한복 짓는 일에만 몰두하라고 하셨죠.”

그는 외삼촌인 고 허영 선생의 말처럼 독하게 한복을 공부했다. 며칠 밤을 새우며 한땀 한땀 바느질도 하고, 마음에 드는 빛깔을 위해 수백 번도 넘게 염색을 반복했다. 심지어 두 살짜리 아들을 하루 종일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맡겨놓고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아들이 그를 ‘아줌마’라고 불러 큰 상실감에 빠진 적도 있다고 한다. 그는 친구가 한 명도 없다 한다. 아들도 팽개치고 한복쟁이가 됐는데, 친구 만날 시간이 어디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내 것이 어디에 있어? 태어날 때 갖고 태어난 것 있어요? 사는 동안 하고 싶은 일하면서 사는 거지요. 나는 그래요. 옷감 만지고 바느질하는 일이 제일 신나요. 저고리가 내 친구고 치마도 내 친구예요. 나는 이렇게 살다 가려고요.”


우리 옷의 아름다움, 온 세상에 알리고 싶다

김혜순표 한복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6년 방송된 KBS 드라마 〈황진이〉를 통해서였다. 가슴 위로 짧게 올라온 저고리에는 화려하고 큼지막한 꽃문양이 가득하고, 허리를 꽁꽁 조여 매어 실루엣을 강조한 치마는 여러 벌을 겹쳐 입어 묘한 곡선을 만든다. 이전에는 볼 수 없던 그의 한복을 두고 ‘퓨전이 아니냐’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그는 16세기 실존 인물 황진이와 기녀 의복을 재현한 것뿐이라고 한다. 이는 당시 민화와 기록을 바탕으로 작업한 결과물이다.

“기막힌 우연이었죠. 2005년 기생 의복 전시를 끝내자마자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어요. 황진이를 다루려고 하는데, 내 옷을 몇 벌 가져오라고 하더라고요. 그전에도 시대극을 위한 의복을 여러 차례 제작했지만, 기생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 그중에서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황진이를 다룬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거다 싶었어요.”

이렇듯 설레는 마음을 안고 방송국에 간 그는 “어이없었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에게는 남다른 기생, 황진이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가져간 옷을 감독이 더벅머리에 맨 얼굴을 한 하지원에게 바로 입혀보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원 씨는 여자와 남자, 그 중간의 모습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배우예요. 아무리 그래도 내 한복을 더벅머리와 맨 얼굴에 입혀보는 건 참을 수 없더라고요. 한복에 어울리는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만지는 게 먼저라고 했더니, 감독이 대뜸 시간이 없다고 하대요. 나는 바로 옷을 싸들고 가겠다고 했죠. 그렇게 해서 곱게 단장한 하지원 씨에게 황진이 옷을 입혔어요. 소리소리치던 감독도 황진이로 변신한 하지원 씨를 보자마자 바로 나가더라고요. 집에 가서 푹 자야겠다면서요(웃음).”

드라마 <황진이>에서 재현한 기생 의복은 김혜순 씨의 한복을 본격적으로 알린 계기가 된다.
그는 옛 인물이나 민화, 서적을 통한 의복 연구에도 관심이 많다. 현재 원광디지털대학교 겸임교수, 원광대 동양대학원 외래교수로 활동하는 만큼 학자로서의 역할에도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기녀에게 예인의 옷을 입히다》 《왕의 복식》 《아름다운 저고리》 등 총 세 권의 책을 냈는데, 다음 책의 주제는 ‘속옷’이라고 일러준다.

“우리 민족이 입었던 속옷은 기가 막힙니다. 뭐라 설명할 수 없이 그저 묘하고, 실용적이면서 아름답기까지 하지요. 옛 의복을 연구할 때는 유물 복원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요. 2002년에는 조선시대 왕의 복식을 재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그 덕분에 국립박물관에서 직접 조선시대 왕이 입었던 옷을 만지는 영광을 얻었죠. 조선 왕의 옷을 보던 중 깜짝 놀랐는데, 바느질한 흔적이 없는 거예요. 자세히 보니 옷감의 올을 한올 한올 풀어서 옷감을 꿰맸더라고요. 조상의 지혜에 감탄만 했지요.”

지난 6월 열린 고 허영 선생 10주년 추모 패션쇼 <선과 색의 거장>에는 윤석화·채시라 등 50여 명의 유명 배우들이 모델로 참여했다. 이들은 모두 허영 선생과 깊은 인연을 가진 배우들이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사진 촬영을 위해 한복으로 갈아입겠다고 했다. 아이 같은 표정으로 기자에게 “가장 좋아하는 한복을 입겠다”고 방으로 올라가더니, 미색이 도는 저고리와 쪽빛 치마를 입고 내려왔다. 그는 저고리를 만지며, 염색하지 않은 옷감으로 만든 저고리가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며 신나했다.

“10월에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조선의 왕, 뉴욕에 가다>를 주제로 한 패션쇼를 열 예정이에요. 한복 패션쇼로는 최초라고 해서 더 긴장돼요. 하지만 이번 쇼를 마치면 수많은 외국 사람들이 저에게 연락을 할 거예요. 우리 한복의 아름다움에 반한 사람들이죠. 외국에서 한복패션쇼를 여는 일도 한복 디자이너로 계속해야 할 숙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진 : 김선아
사진제공 : 김혜순 한복
  • 2011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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