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박물관・미술관을 찾아서] 당진에서 ‘아미미술관’ 개관하는 박기호 구현숙 부부

미술가 부부가 10여 년간 폐교를 가꾸어 만든 아름다운 미술관

“조금 있으면 온갖 봄꽃이 필 텐데, 그때 오세요.”

“아직 보여드릴 만하지 않은데…. 조금 있다 오시면 안 돼요?”

충남 당진군 순성면 성북리 158번지에 자리 잡은 아미미술관. 학교 뒤에 붙어 있는 아미산에서 이름을 따왔다. 미술가 부부가 벌써 몇 년째 미술관을 만들고 있는데, 너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고 싶다고 전화를 넣을 때마다 시원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했다. 양귀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며, 그 꽃이 지기 전에 보러 오라던 약속도 결국 지켜지지 못했다. 미술관 개관 때문에 준비할 게 너무 많아 짬을 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이 미술관을 찾은 것은 신록의 잎들이 짙푸르던 6월 중순이었다.

아스팔트 싱글 지붕과 지붕 위에 올린 장독들의 색깔이 잘 어울린다.
당진터미널에서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미술관은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는데도 길가에서 보이지 않았다. 조그만 구멍가게 옆으로 난 길에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예쁜 미술관이 나타났다. 하얗게 칠한 단층 건물 3개 동이 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데, 군더더기가 없어야 더욱 아름답다는 현대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의 건축 철학 ‘less is more’를 구현하고 있는 듯했다.

박기호, 구현숙 부부.
전시장으로 쓰이는 곳은 교실 3개짜리 교사(校舍)와 4개짜리 교사가 서로 연결돼 길게 뻗어 있는 건물. 70~80m로 이어진 긴 복도는 중세 수도원이나 궁정의 회랑을 연상케 한다. 벽과 천장 모두 새하얗게 칠하고 서까래는 그대로 노출시켰는데, 원목 형태 그대로 남아 있는 서까래가 미니멀한 공간에서 독특한 조형 요소가 됐다.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옛 학교는 군데군데 오랜 역사를 노출한다. 청소 시간이면 아이들이 왁스로 열심히 윤을 내던 마룻바닥이 그대로 남아 반질반질 빛을 낸다. 바닥을 뜯어내고 다시 까는 것보다 유지하는 게 훨씬 공이 많이 드는 일. ‘아미미술관’을 만든 서양화가 박기호 씨는 “바닥이 꺼지거나 썩은 부분은 일일이 제재소에서 소나무를 켜서 교체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곳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다”며 화장실로 안내했다. 옛집 목욕탕에 어김없이 들어가던 15×15cm 흰색 타일과 잘게 나뉜 바닥 타일을 그대로 두고 개조했는데,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자재를 찾을 수 없어 중국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꽃과 나무로 가득한 바깥 풍경과 햇살을 교실과 복도로 담뿍 들여오는 창은 하얗게 칠한 격자무늬 창틀로 되어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알루미늄 새시 창으로 교체되었던 창틀을 처음 학교가 세워질 때의 나무 격자창으로 복원했다. 미술관 지붕은 옹기 색깔의 아스팔트 싱글로 덮었다.



사택으로 쓰던 한옥 복원해 바느질 공간으로

이 학교에는 교장이 생활하던 한옥 사택이 남아 있다. 다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 있던 이 한옥을 박기호 씨는 오랜 시간 하나하나 손봐 예쁘고 아늑한 공간으로 되살려냈다. 흙과 나무로 된 천장을 그대로 노출하고, 보일러로 개조했던 바닥을 뜯어내고 흙을 다시 깐 후 아궁이에 불을 땐다. 요즘 이 공간은 바느질 작업실로 쓰인다. 미술관을 찾은 날도 여성들이 마루에 둘러앉아 바느질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본·필리핀·베트남 등지에서 시집온 다문화 가정의 주부들과 우리나라 여성들이 함께 바느질하면서 공동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외국인 주부들도 “이곳에 오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진다”며 좋아한다고. 미술관 건물 중 한 교실은 지역 주민이 그림을 그리는 공간으로 내주었다. 아늑한 교실에서 격자창으로 바깥을 내다보니 절로 그림 그리고 싶은 마음이 일 것 같다. 나무로 만든 옛 학교의 꼬마 의자가 그대로 남아 화실의 의자로 쓰인다. 4715㎡(약 1426평), 옛 학교 운동장은 갖가지 나무와 꽃들로 둘러싸인 정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정원 한켠에는 연못이 있다.

“제가 프랑스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을 정말 좋아하는데, 그 정원을 생각하면서 연못을 팠죠. 오래된 잣나무가 길게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여기에 연못을 파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벚나무·은행나무·단풍나무·소나무·잣나무·배롱나무·동백나무·후박나무·무지개버들·작약·수국·연산홍·붓꽃·난장이달맞이꽃·비단꽃·줄고사리·바위치…. 미술가 부부가 10여 년 동안 하나하나 공들여 심은 나무와 꽃들이 미술관 여기저기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깥에서는 나무들에 가려 보이지 않은 이곳은 아름다움을 숨겨놓은 ‘비밀의 화원’ 같다.

박기호 씨가 모아온 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소장된 수장고.
“벚꽃·진달래가 필 때는 정말 볼만한데…. 후박나무와 산수국나무에 꽃이 필 때는 향이 너무 좋아 계속 곁에 있고 싶어요.”

미술가 부부는 기자에게 봄꽃들을 보여주지 못해 못내 아쉬워했다. 미술관 입구 7~8km 길가에도 벚꽃을 심어놓아 벚꽃 철이면 장관이라고 한다. 그러다 “은행잎이 노랗게 될 때도 예뻐요” 한다. 박기호 씨가 미술관을 만들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1983년부터였다.

지역 주민들이 그림을 배우러 오는 화실.
“그해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양화 구상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는데, 대상 수상자는 세계여행을 시켜줬어요. 동남아를 거쳐 유럽을 돌다 덴마크 바닷가에 있는 루이지애나미술관을 찾았을 때 눈물이 날 만큼 감동을 받았어요. 너무 아름다워서요. 그때부터 무인도 같은 곳에 미술관을 만들고 싶었어요.”

전시실. 바닥에 놓인 게 구현숙 씨의 설치작품이다.
이듬해 프랑스로 유학, 파리 국립미술대학교(E.N.S.B.A)에서 회화를 전공한 후 작품 활동을 하던 그는 1991년 한국에 돌아왔다. 중학교 졸업 후 떠난 고향 당진을 다시 찾은 것은 널찍한 작업장을 갖고 싶어서였다. 설치미술을 하는 아내 구현숙 씨와 함께 폐교되어 있던 이곳을 1993년부터 얻어 쓰면서 작업했다. 학교 부지 전체를 사들인 것은 2000년. 그때부터 서서히 미술관을 준비해온 셈이다. 구현숙 씨는 미술관 옆 나무를 가리키며 “이곳을 작업실로 얻어 쓸 때 심은 나무인데, 이렇게 잘 자랐다”고 흐뭇해한다. 비록 얻어 쓰는 공간이지만, 너무 황량하다는 생각에 한 그루 두 그루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질퍽거리던 운동장은 오랜 시간 부부의 손길을 거쳐 아름다운 정원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은 조각이나 설치미술을 전시하는 야외 전시장으로, 퍼포먼스나 공연을 하는 곳으로 쓰일 예정이다.

미술관 구석구석을 둘러보니, 이 공간 자체가 부부의 작품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 한 그루, 풀포기나 꽃 하나 그냥 심어진 것이 없다. 돌담 하나를 쌓아도 몇 달씩 공들여 직접 쌓아올렸다 한다. 둘 다 예술하는 사람이다 보니 의견이 맞부딪힐 때도 많았다. 박기호 씨는 “내가 여기 심겠다 하면, 아내는 꼭 옆에 심으라 했다”고 고충을 말한다. 그들은 올가을 미술관을 개관하면, 전시 기회를 갖기 어려운 젊은 작가들에게 이 공간을 내주고 싶다고 한다.

“1주일 전시하고 작품을 내리는 갤러리가 아니라 한 달 내내 작품을 걸어놓을 생각입니다.”

기획 전시가 없을 때는 부부의 작품과 소장 작품들로 상설 전시할 계획이다. 그런데 이 부부, 개관 날짜를 계속 미루고 있다. 자꾸 부족한 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긴 10여 년 공들이며 기다려왔는데, 몇 달이 문제일까? ‘벽면을 모자이크로 장식하고 싶다’ ‘지금 심어놓은 아이비가 건물을 덮으면 더 멋있을 것 같다’ ‘저 큰 나무 위에 트리 하우스를 만들겠다’ 등 계획도 많다. 미술관 만드는 게 이들에게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이자, 아름다움을 나누는 일이기도 한 것 같다. 아마추어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러 오는 교실에는 이런 글귀가 붙어 있다.

“아름다움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사진 : 전석병
  • 2010년 0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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