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현수막, 아버지 바지가 하나밖에 없는 디자인 상품으로

6·2 지방선거 때 거리마다 나붙었던 현수막. 선거가 끝난 후 그 많던 현수막들은 어디로 갔을까. 사람들이 갈수록 유행에 민감해지면서 얼마 입지 않은 옷들도 수없이 버려진다. 지구환경의 ‘짐’이 되어버린 이런 물건에 디자인을 가미해 ‘하나밖에 없는 명품’으로 신분 상승시키자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른바 업사이클(upcycle). 버려지는 트럭 덮개로 가방을 만들어 세계 패션리더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스위스의 가방 브랜드 프라이타크(freitag) 등 세계 곳곳에서 재활용 디자인 업체들이 속속 생겨나는 가운데, 우리나라에도 ‘재활용 디자인’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터치포굿’의 현수막으로 만든 백팩.
우리나라에서 재활용 디자인의 물꼬를 튼 것은 헌 물건을 기증받아 판매하는 ‘아름다운 가게’가 2006년 재활용사업부 ‘에코파티메아리’를 만들면서부터. ‘에코파티메아리’는 유행이 너무 지나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물건을 리폼해서 판매한다. 버려진 물건이라는 한정된 재료를 가지고 갖가지 아이디어를 짜내다 보니 상상력이 넘치고 독특한 디자인의 상품이 탄생해 젊은 패션 리더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서울 인사동 덕원갤러리 2층에 자리 잡은 ‘에코파티메아리’ 매장. 매장을 둘러보는 내내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죽 재킷으로 만든 가방은 재킷의 깃 모양이나 주머니가 그대로 남아 있어 ‘출처’가 뚜렷하다. 재킷 안에 셔츠를 받쳐 입은 모양 그대로 박음질해 만든 ‘재킷 토트백’도 재미있다. 아버지들의 헌 양복 바지는 가죽 조각을 덧대 수납공간이 넉넉한 백팩이 됐다. 재킷이나 바지의 주머니는 그대로 가방의 주머니로 활용됐다.


재활용 물건이라고 쉽게 구입해 얼마 쓰다 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 그러기에는 우선 가격 부담이 만만하지 않다. 가죽 재킷으로 만든 가방은 10만 원이 넘기도 한다. 재활용 소재라 재료값이 많이 들지 않지만, 만드는 과정에서 들어가는 비용이 일반 신상품보다 훨씬 많이 들기 때문이다. 각각 재료의 특징에 맞춰 디자인하고, 하나하나 손으로 재단하고 바느질하다 보니 대량생산보다 몇 배의 공임이 든다. 그 과정을 거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 탄생하는 것. 수거한 물건들을 분리해 일일이 세척하고 복원 처리하는 공과 비용도 많이 든다고 한다. 실제 물건을 꼼꼼히 살펴보고 만져보니 ‘명품’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마무리가 깔끔하고 튼튼하다. 가죽 재킷으로 만든 가방은 일반 가죽 가방보다 질감이 부드럽고 매끌매끌해 어깨에 둘러메자 몸에 착 감긴다.

안전벨트로 만든 파우치와 미니백.
‘에코파티메아리’는 재활용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폐기물이나 오염이 발생하지 않도록 디자인과 생산 공정을 단순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재킷 토트백 등 독특한 디자인으로 외국에서까지 각광받고 있는 물건들은 최대한 원형을 살리기 위해 고심하는 과정에서 나온 제품이라 한다. 가죽 제품은 더 이상 입지 않는 가죽 의류나 폐기되는 소파의 가죽, 대량생산 과정에서 버려지는 자투리 가죽 등을 활용하는데, 먼저 가방 제작을 위해 재단하고, 남은 원단은 가죽 소품, 그러고도 남은 자투리 원단은 휴대폰 줄 등 액세서리 제품의 부속품으로 알뜰하게 쓰인다. 자투리 가죽으로 만든 카드 지갑은 색색이 다른 가죽들을 이어 붙여 더욱 개성 있어 보인다.

(좌) 현수막, 넥타이, 지퍼 등 버려지는 물건들로 헤어 액세서리를 만드는 이영미 씨.
(우) 현수막으로 열쇠고리, 휴대폰 고리 등을 만드는 박민지 씨.
‘에코파티메아리’ 디자이너들은 우리 주변의 버려지는 물건들을 어떻게 재활용할까, 항상 고심하면서 소재와 디자인을 개발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안전벨트를 활용한 제품을 내놓아 호응을 얻고 있다. 안전벨트는 자동차 생산에 사용되는 모든 부품 중 유일하게 재활용이 불가능한 재료. 자동차가 폐기될 때 소각하거나 매립해야 해서 공해의 원인이 되어왔는데, 심플한 디자인의 필통, 파우치 등으로 되살아나 눈길을 끈다. 재질이 튼튼해 오랫동안 쓸 수 있을 것 같다.

‘소비하고, 또 소비하라’고 부추기는 다른 제조업체들과 달리, 재활용 디자인 업체들은 “이 물건이 정말 필요한지, 거듭 생각한 후 구입을 결정하라”고 말한다. 고객이 다시 새로운 물건을 사러 오기보다 이미 사간 물건을 소중히 쓰기를 권장한다. 오래 사용할 수 있도록 애프터서비스도 보장한다. ‘에코파티메아리’의 제품은 인사동 매장뿐 아니라 디자인 상품 편집숍인 ‘A land’의 명동, 홍대 앞, 압구정동, 신사동, 부천 중동 매장에서 팔리는데, “독특한 물건을 찾는 감각적인 젊은 층이 좋아한다”고 말한다.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물건’이라는 게 매력적이라는 것. 미국과 호주에도 수출하는데, “한글이 들어간 현수막으로 만든 가방, 재킷 토트백이 특히 인기 있다”고 한다.


디자인에 민감한 감각적인 젊은 층에 인기

‘에코파티메아리’ 인사동 매장에는 재활용 재료로 작업하는 디자이너들의 제품도 함께 입점해 있다. 그곳에서 만난 이영미 씨는 현수막과 넥타이, 지퍼 등을 이용해 머리띠와 머리끈 등 헤어 액세서리를 만드는 디자이너다. 지난해 말 처음 선보인 이 브랜드의 이름은 ‘프크레타 코코브’. 아프리카 말로 ‘나의 사랑, 나의 별’이란 뜻이다.

“대학에서 의류학을 전공한 후 3년 반 동안 아동복 디자이너로 일했어요. 그런데 대학 졸업하던 해 아프리카에 봉사활동을 하러 갔다 만난 아이들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어요.


그곳 아이들은 평생 옷 한 벌 사 입기 어려운 처지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수많은 옷들이 대량생산, 판매된 후 또 쉽게 버려지고 있잖아요? 이 괴리를 어떻게 해소할까, 생각하다 우리의 소비에 물음표를 던지는 디자이너가 되기로 했지요.”

그는 버려진 현수막, 넥타이, 지퍼를 이용해 머리띠와 머리끈을 만드는데, 디자인이 산뜻하고 독특해 눈길을 끈다. 의류업체에서 버려지는 자투리 지퍼를 얻어와 만든 머리띠는 다양한 색상에 깔끔한 디자인으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헤어 액세서리는 몸에 늘 지니고 있잖아요? 자연스레 환경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라는 게 그의 바람이다. 제품을 판매해 생긴 수익의 30%는 기증한다는 계획.

현수막을 재활용해 가방, 파우치, 카드지갑 등을 만드는 ‘터치포굿’의 박미현, 박인희, 이준희 씨(왼쪽부터).
‘에코파티메아리’ 매장 한켠에 자리 잡은 ‘페니 캔디’. 현수막으로 만든 열쇠고리, 휴대폰 고리 등 소품을 판매하는데, 단색의 현수막 천에 팔색조, 긴점박이올빼미, 크낙새, 삼광조, 새끼황제펭귄 등 멸종되어가는 다섯 종류의 새 캐릭터를 인쇄해 넣었다고 한다. 인쇄 잉크가 손의 땀과 열에 반응해 만지면 만질수록 선명해지는 게 특징. 지난해 10월 ‘페니 캔디’를 론칭한 디자이너 박민지 씨는 “제가 만든 물건을 사용하면서 사람들이 환경문제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애정을 기울일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페니 캔디’의 제품은 디자인 편집숍인 아이띵소, 텐바이텐, 1300K, 디자인태그와 A land, 앤서울타워 등에서 팔리고 있는데, 얼마 전 도쿄의 숍에까지 진출했다.

‘터치포굿’은 20대 여성 5명이 꾸려가는 재활용 디자인 업체로, ‘재활용계의 소녀떼’란 별명으로 불린다. ‘터치포굿’이 처음 출발한 것은 2008년 여름. 사회적 기업을 연구하는 대학 연합동아리 ‘넥스터스’에서 만난 박미현, 이화영 씨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좁은 문을 뚫고 큰 기업에 들어간다 해서 과연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와 신념을 조직 안에서 지킬 수 있을까, 의문이었지요. 삶의 의미와 일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희는 일 속에서 의미를 찾고 싶었고, ‘우리가 꿈꾸는 회사를 만들자’고 결심했습니다.”

G마켓 재능기부 공모전에 재활용 디자인 상품으로 참여했던 이들은 2008년 여름부터 2009년 초까지 이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중간에 사업자 등록을 하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각각 정치외교학과 대기과학을 전공했지만, 재봉틀로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했던 이들은 손으로 뭔가 만들면서 환경과 공익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재활용 상품을 만들기로 한 것. 이들이 주목한 것은 현수막과 광고판이었다. 2006년 지방선거 후 나온 폐현수막은 약 205t으로 축구장 25곳을 덮는 양이었다고 한다. 수없이 걸리는 현수막과 광고판을 수거해 태워버릴 경우 탄소와 다이옥신 등 유해물질을 대량 방출하고, 땅에 묻을 경우 썩는 데 50년 이상 걸린다. 이들은 골칫거리 현수막을 ‘업사이클링(upcycling)’하여 ‘하나뿐인 디자인 상품’을 만들기로 했다.


“현수막마다 두께, 강도, 질감이 달라 각각의 특성에 맞는 제품 개발을 연구했습니다. 수거된 현수막을 세척하는 과정에서 추가 오염이 발생하지 않도록 계면활성제가 들어간 세제 대신 친환경 미생물 세제로 세척하지요. 인쇄가 들어가는 제품의 경우, 화학물질로 만든 잉크 대신 친환경 잉크를 사용합니다. 현수막은 바깥에서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견디는 소재라 질기고 가벼워서 가방 소재로 좋아요.

제가 가지고 다니면서 찬물, 뜨거운 물에 모두 빨아보고, 비벼 빨아도 봤지만 변형 없이 튼튼했어요. 빨자마자 잘 말라 여행용으로도 좋습니다.”

‘터치포굿’은 현수막과 지하철 광고판으로 숄더백과 백팩, 각종 파우치, 카드지갑, 명함첩, 넷북과 부속품을 집어넣을 수 있는 파우치 세트 ‘악어와 악어새’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디자인을 전공한 박인희, 하명희 씨를 영입하면서 디자인을 더욱 발전시켰고, 이준희 씨는 새로 만든 제품을 그때그때 촬영해 홈페이지(www.touch4good.com)에 올린다. ‘터치포굿’의 사훈은 ‘이러다 환갑 된다.’

“서로 이야기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샘솟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이러다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릴 것 같아 ‘이러다 환갑 된다’는 사훈을 써서 붙였죠.”

이들은 “우리가 꿈꾸는 것들을 실천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폐현수막이나 광고판으로 만들었지만, ‘터치포굿’의 물건들은 독특하고 산뜻한 디자인에 튼튼하고 꼼꼼한 마무리가 탐이 났다. ‘오래 쓰겠다’는 생각에 기자도 몇 점 구입했다. 박미현 씨는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진 상품이라도 가격과 품질 모두 소비자를 만족시켜야 판매할 수 있지요. 처음에는 그저 물건이 좋아서 산 사람들이 환경까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말한다.

‘터치포굿’은 매달 넷째 주 토요일, 고객들을 초청해 현수막이나 광고판으로 상품을 만드는 과정에 직접 참여시킨다. 현수막의 어떤 부분을 잘라내 어떤 제품으로 만들지 직접 선택하게 하는 것. 자신이 제작에 참여한 제품을 구입할 경우 50% 할인혜택도 준다. 재활용 디자인 업체들은 재활용 DIY과정을 운영하면서 ‘다시 쓰고 되살려 쓰기’ 교육을 함께하고 있다. 요즘은 기업이나 단체들로부터 대량 주문이 늘어나는 추세. 행사 때 나눠주던 종이가 방을 현수막 가방으로 대체하거나, 프로모션 행사에 사용했던 현수막을 가방으로 만들어 소비자나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이를 통해 ‘친환경 기업’ 이미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 건축 전문업체 ‘공간그룹’은 사옥을 레노베이션하면서 설치했던 가림막을 직원들을 위한 가방으로 만들기도 했다.

재활용 디자인이 우리 생활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사진 : 안영민・이광재
  • 201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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