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영화’라는 독특한 장르를 탄생시키며 새로운 창작의 지평을 연 부부 영화감독이 있다. 이들은 전국의 시골 마을을 돌며 마을의 평범한 일상을 소재로 시나리오를 쓰고, 주민들을 배우와 스태프로 참여시켜 영화를 만든다. 영화는 투박하지만 정겹고, 생활 속에서 길어 올린 대사들은 감칠맛이 난다. 상업영화의 세 축인 스타・자본・극장을 배제하고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신지승, 이은경 감독.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 경기도 양평의 산골 마을로 향했다.">

시골 마을 돌며 ‘마을영화’ 만드는 신지승, 이은경 감독 부부

‘마을영화’라는 독특한 장르를 탄생시키며 새로운 창작의 지평을 연 부부 영화감독이 있다. 이들은 전국의 시골 마을을 돌며 마을의 평범한 일상을 소재로 시나리오를 쓰고, 주민들을 배우와 스태프로 참여시켜 영화를 만든다. 영화는 투박하지만 정겹고, 생활 속에서 길어 올린 대사들은 감칠맛이 난다. 상업영화의 세 축인 스타・자본・극장을 배제하고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신지승, 이은경 감독. 두 사람을 만나기 위해 경기도 양평의 산골 마을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마을이 아니다. 10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과는 좀 떨어진, 길도 나 있지 않은 숲 속 한복판이다. 잣나무 우거진 숲에 컨테이너 박스를 놓아 살림집을 만들었고, 터를 닦을 때 나온 커다란 돌들은 객석 스탠드처럼 쌓아 노천극장으로 꾸몄다. 이곳에 대형 스크린을 걸고, 주민들과 함께 마을영화들을 감상하는 ‘숲속영화제’를 연다. 집 앞에서 만난 신지승 감독은 짧은 머리, 헐렁한 옷차림이 영락없이 속세를 벗어난 선승(禪僧) 같다. 이곳에 들어온지 벌써 11년째라는 그는 “길도 없고, 뒤에는 공동묘지까지 있어 아무도 사지 않으려는 땅이라 내 차지가 된 것”이라며 웃었다.

“예전에 절터 다큐멘터리를 찍다가 이곳을 알게 됐어요. 이 인근에 고려시대 때 지은 큰 절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영화판에서 이런저런 상처들을 많이 받아 몸도 마음도 잔뜩 지쳐 있을 때 문득 이 마을이 떠오르더라고요. 돈도 없고, 마땅히 갈 데도 없던 저에게 딱이었죠. 처음에는 한동안 마을에서 월세로 살다가 여기로 들어왔어요.”


이곳에 오기 전 그는 영화사, 독립 프로덕션 등에서 일하며 여러 편의 영화와 드라마를 찍었다. 예술영화에 관심이 많아 국내에서는 구하기 힘든 예술영화 자료들을 상당 수 수집해 이를 바탕으로 예술영화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아내 이은경 감독을 만난 것은 이 무렵이었다.

당시 독립 프로덕션 PD로 MBC의 인기 프로그램 <엄정화의 문화살롱>을 연출 중이던 이 감독이 예술영화를 공부하고 싶다며 연구소를 찾아온 것. 영화에 대한 생각이 비슷했던 두 사람은 이내 연인이 되었고, 오래지 않아 부부의 연을 맺었다. 1999년, 거대한 투기시장처럼 변해가던 영화판에 회의를 느끼고 신 감독이 귀촌을 결심했을 때도 이 감독은 흔쾌히 남편의 의견을 따랐다.

“이곳으로 온 뒤 35mm 영화 작업을 했어요. 그 과정에서 마을 아이들과 주민들도 카메라에 담았죠. 그런데 한 할머니를 찍으면 다른 할머니를 찍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한 사람 분량의 대사를 세 사람이 나누어 하는 이상한(?) 방식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곤 했어요. 그 안에서 상업영화에서는 절대 볼 수 없던 시골 사람들의 순박한 심성을 깨달았지요. 영화가 전문가의 전유물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들만으로도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평범하게 살아온 당신들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마을영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후 그는 아내와 함께 홍보영화를 찍어 마련한 돈으로 5t 트럭을 구입했고, 내부를 개조해 ‘움직이는 영화사’를 만들었다. 촬영 장비는 물론 침대, 화장실까지 딸려 있는 트럭은 일터이자 숙소였다. 지난 10년간 부부는 이 트럭을 몰고 전국 각지를 누비며 무려 70편의 마을영화를 만들었다. 그가 스스로를 ‘떠돌이 감독’이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떤 마을을 찍을지는 저희가 선택해요.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느낌이 오는 곳이 있거든요. 물론 섭외하는 게 쉽지는 않죠. 쫓겨난 적도 여러 번이에요. 그래도 막상 동네 어르신이나 아이들 몇 명을 설득해 촬영하기 시작하면 주민들이 하나 둘씩 호기심에 구경하러 오고, 그러다 보면 결국 온 마을 사람이 참여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처음부터 흔쾌히 허락해주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마을마다 다 달라요. 일단 마을이 정해지면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지 의논하지요. 최근 그 마을의 화젯거리가 될 수도 있고,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되기도 해요. 그것을 재구성해 시나리오를 만들고 그에 맞춰 연기를 합니다. 그런데 상황만 설정해주면 주민들이 얼마나 연기를 사실적으로 잘하시는지, 영화인지 다큐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예요. 영화와 농촌이 이렇게 궁합이 잘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지난해 자신들의 마을영화 제작기를 담은 책 《떠돌이 감독의 돌로 영화 만들기》를 펴내며 10년간의 영화작업을 정리한 부부는 마을영화를 만들며 느끼는 희열을 책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마을영화는) 돈을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상품적 이야기가 아닌 무념한 예술의 과정으로 일구어진 순수하고 소박한 창작의 열매였다. 난 드디어 진짜 예술과 참된 창작과 무념의 열정을 가진 새로운 영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어울려 연기하고 촬영했고, 마을의 광장에서 5t 트럭의 옆면을 스크린 삼아 광목천으로 둘러치고 마을영화제를 개최할 때는 정말 이것이 삶 속에 숨겨진 예술가적 본능을 일깨우는 몸부림이며 따분한 일상속에서 발굴해낸 드라마의 감동, 어떤 연기자들도 흉내 내지 못할 순박한 눈빛, 그을린 피부, 잔일로 단련된 손, 그리고 정을 나눌 줄 아는 심성들로부터 나온 드라마였음을 확인했다. 평범하게 살아온 당신들이 한 편의 영화이며 진짜 주인공 그 자체이며 문화와 예술 속에서의 참된 어울림과 평등이 이런것이구나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마을화폐 쓰는 영화마을에서 올여름 세계마을영화축제 개최

영화 경험이 전혀 없는 시골 노인, 아이들이 영화 제작의 주체가 되는 새로운 창작법은 오랫동안 영화 작업을 해온 그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럼에도 마을영화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폄하되는 것이 두 사람은 못내 불편하고 서운하다. 그래서 부부는 올여름(7월 30일~8월 8일) 이곳에서 세계마을영화축제를 열 계획이다. 그동안 찍은 마을영화들을 소개하고, 장르는 다르지만 한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다룬 다른 나라의 마을영화들도 상영할 생각이다.


그가 살고 있는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는 이미 영화마을로 유명한 곳. 학교에 가지 않는 토요일이면 마을에서는 영화 캠프가 열린다. 이 마을에는 마을화폐가 따로 있다.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일손을 도우면 수고비로 마을화폐를 주는데, 그 화폐로 마을에서 생산하는 농산물을 구입할 수 있고 영화 캠프 참여비로도 쓸 수 있다. 이 아이디어도 신 감독에게서 나왔다. 영화제 준비로 요즘은 ‘떠돌이’ 생활을 잠시 접고 집에 머물고 있다는 부부에게 생활비 얘기를 물었다. 마을영화 제작이 수익과는 거리가 먼 일이니 무슨 돈으로 영화를 만들고 기본적인 생활을 꾸려가는지가 궁금했다.

“안 쓰면 돼요(웃음). 2003년까지는 가끔 홍보영화, 환경 드라마 같은 것들을 찍어서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어요. 큰돈은 아니지만 요즘은 외부 강의가 가끔 있고요. 영화를 만드는 중에는 마을에서 숙식을 해결하는데, 1년 중 대부분을 그렇게 생활하니 크게 생활비 들어갈 만한 일이 없어요. 아마 아이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자포자기 심정으로 감행한 귀촌이었지만 오히려 이곳에서 사람들의 순박한 심성에 기반한 ‘착한’ 영화를 만들게 돼 행복하다는 두 사람. 돈에 기대지 않음으로써 얻은 창작의 자유, 그렇게 부부가 고군분투하며 찾아낸 마을영화가 한국 영화의 한 장르로 당당히 자리 잡을 날을 기대해본다.

사진 : 이창주
  • 2010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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