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41) | 꽃그늘에 앉아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돌배나무 꽃그늘 아래 앉아 점심을 먹습니다. 마을의 일흔 넘은 어르신들 어릴 때도 지금만큼 컸더라는 100년 넘은 나무가 꽃만큼은 여리디여린 아기 눈꺼풀 같습니다. 젓가락질 한 번 하고 꽃구름 뭉게뭉게 서린 먼 숲 한번 바라보고, 물 한 모금 마시고 돌배나무 꽃가지 한 번 올려다보자니, 한 주간 내내 서울로 원주 시내로 종종거린 일들이 오래전 옛꿈인 듯싶게 아득합니다.

“어찌하여 산에 사느냐 묻길래/ 웃기만 하고 아무 대답 않았지/ 복사꽃잎 아득히 흘러 떠가는 곳/ 여기는 별천지, 인간세상 아니라네” 했던 이백의 시가 그대로 내 마음이랄까요.

아침나절에 남한강으로 흐르는 개울 따라 한 시간 남짓 달려 목계 지나 엄정 장에 가서 모종을 사온 일도 꿈만 같습니다. 숲골짜기 뜰 한켠 텃밭에 포기포기 심고, 팔이 아프게 물 길어다 뿌려주고 다독거린 일도 꿈같고요. 흙 속이 후끈후끈 뜨겁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고, 그렇게 흙을 헤집고 다독거리느라 손톱 밑이 새까매진 것을 보면서도 말이지요.

지난해 모종 사러 갔던 일이 재미나서 올에도 그날 오기만 기다렸더랬습니다. 이번 주말에 장에 갈까 하면 누구네 누구네가 달력만 보고 고구마 모종 심었다가 죄다 얼어서 망쳤다는 얘기 들리고 들리고, 그러고 나니 어느새 ‘패랭이꽃그림책버스’ 개관 기념 행사가 닥치는 바람에 또 한 번 미루게 되었습니다. ‘염불보다 잿밥’인 나와 달리, 농부 4년차 남편은 오로지 모종 심는 때를 놓칠까 봐 애태웠겠지요.

그러나 벼르고 별렀던 장 구경은 결국 못 하고 말았습니다. 장터로 들어서자마자 다음날이 장날이라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커다란 안내판이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고 거짓말처럼 썰렁한 장터를 여기저기 돌아다녀봤지만 가게들마저 꼭꼭 문을 닫은 터였어요. 다행히 남편이 모종 비닐하우스를 떠올린 덕분에 모종은 구할 수 있었습니다.

“맞아, 지난봄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사서 싣고 가다 보니 그런 비닐하우스가 보였지. 한꺼번에 살 데가 있었네, 했던 기억이 나네요.”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의 소녀같이 몸집이 가늘고 작은 비닐하우스 아주머니는 손님들이 자꾸 몰려드니 마냥 신이 나는 모양입니다. 혼자서 비닐하우스 두 동을 번갈아 드나들며 이 모종 저 모종을 내와서는 비닐이며 상자에 담고, 셈을 하고, 돈을 받아 세고, 전대에서 거스름돈을 꺼내주면서도 우리 같은 풋내기 농사꾼이 묻는 것마다 빠짐없이 대답을 해줍니다.

“고추 한 판이랑 밤고구마 한 단이요!”

“호박고구마 말고?”

“밤고구마요.”

남편이 주문하는 사이에 나도 한마디 끼어들었습니다.

“농사꾼이 시원찮으니까 좋은 모종으로 주세요!”

그러자 살짝 날선 남편 목소리가 내게로 향합니다.

“어허, 시원찮은 농사꾼이라니!”

아주머니가 벌쭉 웃으면서도 못 들은 척 대답합니다.

“아, 내가 지금 다 좋은 걸로 주잖아요!”

빈 상자 하나에 고구마 모종 한 단, 고추 모종 한 판, 토마토 모종 열 포기, 방울토마토 모종 서너 포기에다 가지와 오이 모종은 딱 식구 수만큼 두 포기씩만 담았습니다. 방학 때 잠깐 와 있을 딸아이 몫은 빼고요. 첫해에 넉넉히 사다 심었다가 풀 뽑고 물 주느라 허덕이면서 얻은 교훈인즉슨, ‘먹을 만큼만 심고, 알뜰히 돌봐서, 남김 없이 먹자’라는 것이었으니까요.

지금쯤 모종들은 낯선 흙 속에서 자리를 잡으려 애쓰고 있겠지요. 그리고 눈 깜박할 사이에 돌배나무 꽃 떨어지고 땡볕 퍼붓고 장맛비 쏟아지는 날이 닥치겠지요. 독한 풀들이며 성가신 벌레들이 엄습할 때마다 ‘잘 싸워 이겨내라’고 내가 일일이 소근거린 얘기를, 잊지 말고 기억해주길 바랄 뿐입니다.
글쓴이 원재길·이상희 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살며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10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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