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슬로시티 기행] <천일의 앤> 생가가 있는 영국의 에일셤

인구 7000명도 안 되는 마을 에일셤을 찾는 관광객은 연간 10여만 명이다. 에일셤에서는 사시사철 축제가 열린다.
에일셤(Aylsham)은 영국 동부 노퍽 주 브로드랜드 군에 있는, 인구 6800여 명의 작은 타운이다. 이곳이 슬로시티로 선정된 것은 2004년 11월, 영국에서 두 번째다. 에일셤은 작고(small), 느림(slow)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슬로(slow)가 브랜드가 된 마을이다. 갑작스러운 변화를 싫어하는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산책과 자전거 타기를 즐기고(slow lane이라는 자전거 차선이 있다), 작고 시골스러운 카페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슬로시티가 오래된 건물들을 보여주는 단순한 진열장이 아니라는 것, ‘느림’이 옛 생활을 상기시키는 복고만이 아니라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 살아 숨 쉬며 삶을 윤택하게 하는 요소라는 것을 이곳에 가면 느낄 수 있다. 대량생산, 속도 경쟁에 맞서 지역화와 차별화, 고급화로 마을 자체를 브랜드화했을 때, 마을의 경쟁력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타운이다.

에일셤 사람은 예로부터 산책과 자전거 타기를 즐겼다.
슬로시티의 철학적 기반은 삶의 질 + 천천히 살기 + 지역공동체 정신 + 정체성 유지에 있다. 지역공동체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면 에일셤에 가보라. 에일셤이 속해 있는 브로드랜드 군은 스페인 엘 코루냐에서 매년 열리는 ‘세계에서 살기 좋은 타운 국제시상식’(International Award for Liveable Communities)에서 4년 연속 수상할 정도로 전 세계에서 지역공동체의 모델이 되는 곳이다. 세계의 많은 지역공동체들이 그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지만, 에일셤의 경우는 그 반대다. 생활권을 같이한다 해도 주민끼리 이웃에 대해 알지 못하고, 집에 틀어박혀 TV채널만 돌리며 이웃과 의사소통조차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공동체라고 할 수 없다.

무엇이 슬로시티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일까. 대부분의 타운에는 아름다운 역사 유적지나 훌륭한 푸드 마켓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슬로시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슬로시티의 요건은 주민의 ‘웰빙 라이프’에 있다. 그곳에 사는 주민, 또 그곳을 찾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해하느냐에 따라 슬로시티인지 아닌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브로드랜드는 전 세계에 웰빙 문화를 소개하고 확산시킨 발원지 중 하나로 꼽히는 곳. 그중에서도 에일셤 타운은 행정, 교통・통신, 공・사적 서비스, 환경, 평등, 경제, 주택・환경 조성, 사회・문화적 유대 등 8개 분야에서 높은 수준을 보이며 ‘지속가능공동체’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 | 에일셤의 조용한 마을 풍경. 오른쪽 | 전통적인 먹을거리(위)와 가족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들(아래)도 이곳의 매력 중 하나다.
이 마을은 또 지속가능공동체를 넘어 생태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영국을 여행하면 곳곳에서 ‘석유를 넘어, 공해 없이 일하기’(beyond petroleum, more performance less pollution)라고 쓰인 표지를 쉽게 볼 수 있다. 영국 정부는 생태타운 조성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에일셤도 그 대상 중 하나다. 영국 정부가 제시하는 생태타운의 조건은 ➊ 기존 타운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연계성이 좋은, 새로운 정착지로서의 타운, ➋ 탄소 제로 기준을 달성하는 곳, ➌ 환경 지속성을 보여줄 수 있는 곳, ➍ 주민을 위해 쾌적한 시설을 제공하는 곳, ➎ 기존 지역에 비해 주택비가 30~50%이어서 주택 비용이 싼 타운이다. 이 같은 생태공동체로 자리 잡으려면 15~20년은 걸릴 것이라 생각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에일셤 슬로시티 운동의 전위부대는 슬로시티 협의회 아줌마들이다. 이들이 앞장서고, 슬로 어린이 놀이방을 운영하는 할아버지, 동네의 기강을 바로 잡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젊은 학생 등이 힘을 합해 자신의 마을에 강한 애착을 보여준다.


인구 6800여 명의 작은 타운을 찾는 연간 관광객이 10여만 명

에일셤에서는 1회용 비닐봉투를 추방했다.
에일셤 고교와 시의회가 공동 개최하는 ‘Big Show Breakfast 음식축제’는 영국에서 가장 큰 식탁으로 영국 전체에서 주목받고 있다. 학생들이 직접 음식을 만들고 나르면서 슬로푸드의 부활을 알리는 축제. 아이들에게 영양적으로 균형이 잡힌 좋은 음식(good food), 청결하게 조리된 깨끗한 음식(clean food), 공정한 거래 과정을 거친 공정한 음식(fair food) 등의 의미를 가르치고, 식재료가 생산자의 손을 떠나 밥상에 오르기까지 이동거리(푸드 마일리지)도 교육한다. 푸드 마일리지가 짧을수록, 즉 가까운 곳에서 생산된 음식일수록 몸에 좋다고 가르친다. 3대째 내려오는 산골 타운의 전통 푸줏간도 이곳의 명소. 이 푸줏간은 농장과 연대해 전통 방식으로 처리하고 가공한 닭과 햄, 소시지 등을 판매하는 곳으로 유명한데, 웹사이트도 운영한다. 이곳을 찾은 여행자라면 영국식 아침식사와 로스트비프, 요크셔푸딩, 다양하고 신선한 야채 등 이 지역에서 생산된 건강음식을 만끽할 수 있다.

에일셤과 작은 타운들을 오가는 증기기관차.
인구 7000명이 안 되는 이 작은 타운을 찾는 방문객은 연간 10여만 명. 연평균 증가율이 10~15%로, 잠시 들르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장기 체류하는 관광객이 늘고 있다. 이 지방 역시 독특한 지역 축제가 많은데, 5월에는 음악 페스티벌, 7월초 카니발, 8월 마지막 월요일에는 에일셤 농산물 쇼, 10월 첫 주말에는 에일셤 음식 페스티벌이 열린다. 매달 두 차례 농산물 시장이 열려 이곳에서 수확한 싱싱한 유기농 농산물을 구입할 수 있다. 이 타운은 헨리 8세의 둘째 부인으로 엘리자베스 1세를 낳은 후 참수된 앤 볼린이 태어난 곳. 앤 볼린의 생가인 블리클링홀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1990년부터는 에일셤과 작은 타운들을 연결하는 증기기관차가 운행하고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또 16세기에 조성된 상점가에서는 가족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들에서 지역산물을 구입할 수 있다. 이곳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지역 예술가만 36명. 지역 전통공예, 도예, 수공예가 발달해 있다.

이곳 사람들에게 “슬로시티로 선정된 후 무엇이 가장 많이 달라졌느냐”고 물었다. 첫 번째로 든 것이 주요 언론들의 보도로 이곳이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져 방문자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먼 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야채와 과일, 음식을 사기위해 찾아온다는 것, 세 번째는 주민들이 이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커지면서 공동체 의식이 더 공고해지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과도 연대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들은 더 멋진 슬로시티의 미래를 꿈꾸며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많다고 말한다.
  • 2010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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