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37) | 봉림산 혼자 오르기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이제 막 쏟아지는 햇살 덕분에 눈 쌓인 산길이 더욱 험합니다. 서둘지 말자고 거듭 다짐하며 따박따박 눈발자국을 찍어 가다가도 서운한 마음이 슬그머니 밀려들곤 합니다. “7시에 무조건 출발하는 거야” 했던 지난 밤 남편과의 아침 등산 약속을 못 지킨 탓에 혼자서 뒷산에 오르는 참입니다.

그 산이 그 산이고 길도 그 길이련만, 걷는 사람 마음이 달라서인지 낯설기만 합니다. 늘 호젓해서 좋던 산이 오늘은 얼마쯤 괴괴하다 싶을 정도예요. 바위며 나무며 눈길 닿는 것마다 ‘이 자리에 저런 게 있었나’ 싶게 생소하고, 부러져 떨어진 나뭇가지들과 밤송이며 돌멩이들이 얼른 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이물스럽기만 합니다. 이토록 환한 때에 산을 오른 적이 드물어서 그렇다고, 이성적인 해석을 하다가도 어느새 괴기영화 장면 속으로 꺼들리는 듯한 묘한 위기감에 발목이 잡혀 허방을 딛기도 합니다.

남편과 둘이 산을 오를 때도 각자 자기 생각에 빠진 채 앞서거니 뒤서거니 외따로 걷곤 했으니 혼자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닌가봅니다. 스무 번은 족히 올랐던 길을 수없이 의심하고 돌아보느라 가위 눌린 걸음이 더디기만 합니다. 이제라도 남편이 어디서든 불쑥 나타나주었으면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엉뚱한 결심을 합니다.

불쑥 나타나도 반가워하지 않으리라, 겁먹은 얘기도 하지 않으리라, 혼자서 치마바위까지 오르리라, 속 좁게 돋운 힘으로 타박타박 눈산을 오릅니다.

그러나 빈 나뭇가지 사이로 등성이가 훤히 보이는 자리에 와서도 남편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무슨 사고가 났나, 다리가 휘청거리는 낭패한 마음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릴 때입니다. 종아리께서 푸드득, 꿩들이 날아오릅니다. 한순간 눈산의 적막이 깨지고 무명(無明)한 마음도 깨집니다.

꿩 날아오르는 소리에 죽비 맞듯 정신이 번쩍 들고 보니 앞의 눈길이 제대로 보입니다. 흠 없이 소복한 것이, 이 아침에 앞서 간 발자국이라 할 만한 흔적이 없는 겁니다. ‘이쪽 길이 아니고, 황반장네 집 지나 임도 쪽으로 올라갔구나!’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오히려 독립 등반가로서의 결연하고도 호젓한 마음이 됩니다. 괴괴하던 산속이 비로소 근사한 설경으로 둘러싸인 채 얼마 전 얻어 듣고 베껴 적었던 옛 시 한 구절 ‘천황씨가 죽었는가 인황씨가 죽었는가 / 만수청산이 다 함께 흰옷을 입었구나’(김삿갓 시 〈詠雪 : 눈을 노래함〉 중에서)를 불러냅니다. 눈 쌓인 산속을 홀로 걸으며 뇌어보니, 시를 듣고 감탄하던 때와는 또 다른 애상이, 한겨울에도 발 녹일 데 하나 없이 떠돌았을 시인의 애수가 절절이 사무칩니다.

저만큼 치마바위로 꺾어드는 지점에 앙상한 떡갈나무 가지에 묶인 검정 띠가 보입니다. 맨 처음 이 산을 오를 때 남편이 표지 삼아 묶어놓은 검정 비닐봉지입니다. 볼 때마다 흉하다고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예쁜 리본으로 바꿔 달아야지 했는데, 나뭇잎 무성한 여름에도 그랬듯이 이제도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줍니다.

떡갈나무 낙엽밭을 지나면 볼 때마다 쑥쑥 키가 자라난 잣나무를 지나, 왕모래밭을 지나면 봉림산 중턱 치마바위(딱 한 사람이 등을 비스듬히 기대고 길게 누울 수 있는 소파 같아서 ‘소파바위’라고 부르던 바로 그 바위예요. 동네 사람들이 원래 치마바위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는 우리도 그리 부르기로 했지요)가 나옵니다.

김삿갓의 바로 그 슬픈 흰옷인 채 묵묵한 그것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골짜기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어느 때엔 저기 은사시나무 왼쪽 가지 방향으로 우리 집 현관 등이 보인다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다. 벌써 산을 내려간 남편이 전기 스위치를 내린 모양입니다. 곰돌이 호돌이 짖는 소리가 얼핏 들리는 듯도 합니다. 어쩐지 집에서 멀리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아침입니다.
글쓴이 원재길·이상희 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살며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10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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