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시티 운동의 발상지 이탈리아 그레베 인 키안티

‘쇠고기 찬가’ 부르는 푸줏간 주인을 만날 수 있는 ‘느린 마을’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심장부에 있는 그레베 인 키안티(Greve in Chianti)는 르네상스 문화도시 피렌체의 그늘에 묻혀 있던 인구 1만4000여 명의 특별할 것 없는 산촌타운(고을)이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이 타운은 인구와 소득 감소, 고령화 등 우리네 농어촌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타운은 활기가 없었으며, 이렇다 할 만한 대표 산업도, 내세울 관광지도 없었다. 소득원은 해발 500~700m 산간에서 계단식 경작을 하는 포도원과 올리브 농장이 전부였다.
조용한 산촌타운이었던 그레베 인 키안티.
파올로 사투르니니 시장이 이곳의 예스럽고 시골스러운 모습을 부각시키면서 슬로시티 운동이 시작됐다.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장을 역임하고 있던 파올로 사투르니니(Paolo Saturnini) 시장은 이 타운의 갈 길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대단위 도시 개발, 공단 유치 등을 통해 대도시에 통합되거나, 정반대로 아주 시골스럽고, 예스러움을 표방해 ‘작은 타운’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랜 고심 끝에 후자를 선택했다. 작은 타운만이 갖고 있는 아기자기한 자연, 사람들의 정신적 풍요와 여유, 대도시와 떨어져 있는 점을 지역의 ‘상품’으로 연출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당시 화제가 되고 있던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에 참여하면서 단지 먹을거리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방식과 환경을 함께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먹을거리야말로 인간 삶의 총체적 부분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지역사회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진정한 슬로푸드 운동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오르비에토・포시타노・브라라는 몇몇 작은 타운들과 함께 처음으로 ‘슬로시티 운동’을 전개하면서 파올로 시장은 주민들에게 슬로시티의 구체적 역할과 타운의 정책 방향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대도시가 물질과 기계의 속도에 맞추는 패스트 시티(Fast City)라면 이와 반대로 인간과 자연 환경의 속도를 존중하는 삶이 유지되는 슬로시티(치타슬로, cittaslow는 이탈리아어와 영어의 합성어로 국제적인 공식 용어임)를 주창한 것이다.


그는 타운의 모든 정책과 행정을 슬로시티에 맞춰 진행했다. 타운의 토착 상점가를 살리기 위해 외부 자본의 대형 슈퍼마켓 유입을 막았고, 외부인의 부동산 소유를 제한했다. 농축산물과 수공예품 생산도 옛날 방식을 고수해줄 것을 당부했는데, 수제품 스파게티, 전통 방식의 와인 생산 등이 그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당장 생활이 불편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파올로 시장은 중소 도시들이 모두 대도시를 표방한다면 그 도시의 정체성을 잃게 됨은 물론, 대도시에 예속된 경제체제로 가게 돼, 결국은 경제개발로 인한 혜택이 지역 주민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슬로’(느림)라는 말은 단순히 속도가 아니라 자연을 이해하고 순리를 기다릴 줄 아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즐거운 기다림’이라고 말했다.

그레베 인 키안티에 있는 성당 거리.
파올로 시장의 끈질긴 주민 설득, 체계적이며 일관성 있는 정책과 시책으로 슬로시티 운동은 인근 지역과 유럽 전체로 확산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늘면서 지역에서 나는 산물들의 판매량이 증가했다. 주민들은 자부심이 생겼고, 지역이 지닌 전통과 자연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다.


슬로시티에서는 천천히 머물며 슬로 투어리즘을 해야 제맛

현재 그레베 인 키안티가 자랑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고용률 100%로 전 주민이 직업을 갖고 있으며, 소득 수준이 이탈리아의 중소 도시 평균보다 훨씬 높고, 관광타운으로서 명성이 날로 높아가지만 범죄율은 전국에서 가장 낮은 타운 중 하나라는 것이다. 키안티 지방에는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특산품이 있는데,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 와인은 키안티 지역 중 특히 토양과 기후 조건이 좋은 데서 생산되는 와인으로 그레베 인 키안티에서 많이 생산된다.

이 지역은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와인 ‘키안티 클라시코’의 산지로도 유명하다.
이 지역을 찾는 여행자에게 최고의 쇼핑 품목 중 하나는 8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팔로니 마을 푸줏간에서 2년간 숙성시킨 햄 프로슈토(돼지 뒷다리)다. 또 인구 1200여 명이 사는 판자노 마을에 가면 조그마한 푸줏간과 유명 인사가 된 쇠고기 명인 다리오 체치니(Dario Cechini)를 만날 수 있다. 광우병으로 세계가 들썩거리던 해, 피렌체 스테이크 장례식을 치러 유명 인사가 된 그는 오페라 CD를 틀어놓고 일하는데, 단테의 《신곡》을 읊조리며 ‘쇠고기 찬가’를 발표하기도 했다.

“피렌체의 불고기(roast)를 아는가. 만약 키안티의 붉고 두툼한 로스트가 없었다면 르네상스의 열정, 예술과 시가 꽃피었겠는가. 나는 최고 품질의 쇠고기를 손님에게 제공하는 예술장인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그의 푸줏간은 유럽 각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영국의 엘튼 존도 이 집 고기를 주문해 먹을 정도라고 한다.

2년간 숙성시킨 햄 프로슈토도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특산품. 영국의 엘튼 존도 이 지역에서 고기를 주문해 먹는다.
요즘 여행 패턴은 패스트 투어리즘(Fast Tourism)에서 슬로 투어리즘(Slow Tourism)으로 변화하고 있다. 7일 동안 7개 도시를 숨 가쁘게 돌아보는 여행 대신, 한곳에 오래 머물며 그곳 생활과 정서를 경험하는 게 여행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고 있다. 슬로시티 관광 마니아들은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머물며 그곳만의 정취를 느끼려 한다. 천천히 걸으며 찬찬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슬로시티로 지정된 곳이 얻는 최대 혜택이 관광산업이다.

그레베 인 키안티 지역은 농업과 관광이 잘 융합되어 새로운 관광도시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관광객이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고유성(originality), 진정성(authenticity), 다양성(variety)을 느끼고 갈 수 있도록 배려한다. 20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명품 와인을 가지고 있다는 ‘고유성’, 환경이나 기후, 산물뿐 아니라 오랜 세월 변치 않고 내려오는 정신이나 인간미 넘치는 분위기 등 이 지역의 ‘고유성’, 언덕과 아름다운 편백나무 숲, 포도원, 성당, 성채, 빌라, 농장, 흰색의 작은 타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명화 ‘모나리자’의 배경이 된 전원적인 풍경 등을 지닌 ‘다양성’ 모두를 만끽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언덕의 평화로운 풍경, 편백나무 숲, 포도원, 성당 등 ‘다양성’이 이곳의 매력이기도 하다.
1999년 이탈리아의 몇몇 시장들이 중심이 되어 슬로시티 운동을 출범시킨 후 2009년 12월 현재, 전 세계에서 슬로시티로 지정된 곳은 19개국 126개 타운이다. 한국도 전남 신안군・장흥군・담양군・완도군과 경남 하동군, 충남 예산군 등 여섯 군데가 가입되어 있다. 한국슬로시티본부는 우리나라에서 슬로시티 후보지로 인증 받을 만한 곳을 본부에 추천하며, 슬로시티 운동 홍보와 인식 확대, 한국슬로시티와 국제슬로시티의 상호 협력, 슬로푸드 운동 확산 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2010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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