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라스리첸(유리공예) 공예가 김주은

15세기 베네치아에서 시작된 글라스리첸을 한국 전통문화와 접목시킬 거예요

빨간색을 내는 루비 글라스, 검은색을 띠는 히야리스(hyalith, 그리스어로 ‘유리’라는 뜻), 유리 사이에 금을 넣는 ‘이중벽 유리’ 등 체코의 유리는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아 ‘프라하의 빛’이라는 아름다운 별명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런 크리스털과 유리 등에 문양이나 그림을 넣어 조각하는 고급 수공예 ‘글라스리첸’(glasritzen)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유리(glas)’와 ‘긁는다(ritzen)’라는 단어의 합성어인 ‘글라스리첸’은 독일어로 ‘유리를 긁는다’는 뜻. 다이아몬드 펜으로 크리스털 표면을 긁어 문양·그림·문자를 섬세하게 새겨 넣는 공예다.
김주은(36) 씨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활동하고 있는 글라스리첸공예가다. 지난 2002년 일본글라스리첸협회에서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서울 서초동에서 아르떼월드(www.arteworld.com)라는 공방을 운영하고 있다. 글라스리첸 코엑스 초청전시, 일본의 대표적인 글라스첸 공예가 이노우에 씨와 합동 전시를 해온 그는 올해 일본의 스승과 함께 ‘한일글라스리첸’ 전시를 열 예정이다.

“유리의 투명하고 차가운 빛에 마음이 끌려요. 유리에 조각해서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어요. 저처럼 유리에 차츰 빠져드는 제자들을 보는 것도 행복하고요.”

어릴 적부터 손으로 하는 일은 뭐든 좋아했던 그녀는 유리공예 외에도 플라워, 테이블세팅, 리본플라워, 파치먼트공예(Parchment Craft), 메모리얼아트 등 각종 자격증을 지니고 있다.

일본에서 글라스리첸을 배우고 돌아왔을 때, 사람들에게 크리스털을 조각한다고 하면 대개 ‘상패 조각하는구나!’ 하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분야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작품은 백화점에서 판매될 뿐 아니라 고급 가구매장, 와인숍 디스플레이로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 글라스리첸의 역사는 15세기 베네치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크리스털 글라스에 자신의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나 그림, 초상화 등을 새겨 넣으면서 시작했다고 해요. 베네치아의 유리 장인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서 15세기에는 영국과 독일 등지에도 그 기술이 소개됐고, 유리에 새겨 넣는 그림이나 문양이 다양해지면서 그 전통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18세기 네덜란드에서는 뛰어난 기술을 자랑하는 장인들이 많았다고 해요.”

크리스털은 투명도가 뛰어나고, 높은 굴절률과 고급스러운 중후함, 경쾌한 소리 등이 매력적이라 수정과도 비견되는 매력을 지녔다. 가공 시 잘 부서지지 않고, 부드러운 재질이라 문양을 새기거나 자르는 데 수월하다는 게 크리스털의 특징. 장인이 아닌 일반인이 글라스리첸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1930년대 스위스에서 다이아몬드 펜이 개발되면서였다.

“패턴을 대고 유성 펜으로 그림을 그린 후 조각을 시작해요. 글라스리첸의 매력은 만든 사람만의 손맛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요즘 여성들은 옷도 남과 똑같이 입는 걸 싫어하잖아요? 글라스리첸을 배우면 자신만의 손맛이 담긴 유리그릇을 소장할 수 있어요. 자신만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것이지요.”


와인잔에 우리 집 문양이나 이니셜 새겨 넣을까?

김주은 씨는 “글라스리첸은 귀족적인 공예로 인식하기 쉽지만 집에서 쓰는 와인잔, 유리그릇 등 생활용품에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울할 때 집에서 작은 파티를 열어보세요. 식탁을 꾸미면서 남편 이니셜이 새겨진 샴페인잔을 올려놓으면 금방 특별한 분위기가 되지 않겠어요?”

서툴더라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든 것만큼 소중한 게 있겠느냐며 그녀는 “그런 작은 노력들이 생활을 좀 더 로맨틱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후 패션 디자이너와 아동 미술교사로 활동하던 그는 남편과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가 글라스리첸과 인연을 맺었다.

“2002년 결혼하면서 남편을 따라 도쿄에서 살게 되었어요. 남편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랜드 스케이프를 공부한 후 다시 일본으로 조경 공부를 하러 간 거였고, 전 평범한 주부였어요.”

도쿄의 마츠야에 살던 그녀는 워낙 책을 좋아해 서점에 가서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녀는 신주쿠, 오모테산도 등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이세탄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글라스리첸’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글라스리첸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당장 배우고 싶은 마음에 어쩔 줄 몰랐어요. 일본어가 익숙지 않을 때였지요.”


휴일에는 남편이 동행해 통역해주었다. 그녀보다 더 놀란 것은 스승인 모리야마 씨다. 그때까지 한국인 제자는 한 명도 없었는데, 숙제를 하나 내주면 10개를 해오는 열정을 보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임신 중이던 그녀는 새벽 4시까지 작업에 몰두했다 한다. 문화센터 수강을 마친 후에는 모리야마 공방에서 2년 반 넘게 배우면서 일본글라스리첸협회 자격증을 취득했다.

“모리야마 선생에게 한국에 가서 글라스리첸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더니, 일본에서 내로라하는 장인인 이노우에 선생님을 소개해주셨어요. 그분을 다시 스승으로 모셨지요.”

그녀가 두 스승에게서 배운 것은 전통을 현대에 접목시키는 정신이었다.

“글라스리첸의 종주국은 유럽이지만, 요즘은 일본의 글라스리첸이 유럽 사람들을 놀라게 하죠. 일본의 전통적인 미소 그릇을 크리스털로 만들어 일본 문양을 조각하는데, 충격적이었어요. 유럽의 크리스털이 일본 그릇으로 새롭게 태어났는데, 그게 정말 잘 어울리는 겁니다.”


스승이 그녀에게 요구한 것도 “너희 나라 전통을 찾아 새로운 크리스털을 만들어내라”는 것이었다.

“2004년, 궁중 혼례복을 입은 여인과 한국 정원을 소재로 한 글라스리첸을 내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가진 전통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해석하느냐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전통 문양을 재해석하는 게 저에게도 숙제예요.”

크리스털 기업이나 유리공예와 협업해 일본처럼 자신들만의 글라스리첸, 즉 한국의 문화가 담긴 글라스리첸 작품을 세계시장에 내놓는 것, 그것이 그녀의 꿈이다. 그녀는 이 매력적인 길을 더디더라도 오래오래 걷고 싶다고 말한다.

사진 : 김진구
  • 2010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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