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동안 서울 구석구석 다니며 그린 그림으로 책 펴낸 건축가 부부 임형남・노은주 씨

우리가 사랑하는 서울을 그립니다

서울 토박이 건축가 임형남 씨와 원주에서 태어났지만 서울에서 성장한 노은주 씨 부부의 ‘서울’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부부는 서울의 실핏줄 같은 골목길을 두 딸과 함께 2001년부터 10년 가까이 누비고 다녔다. 사라져 가는 피맛길, 예지동 골목, 칠궁, 서촌, 통의동, 효자동, 북촌 등 서울의 골목길 풍경을 글과 그림으로 《서울풍경화첩》(사문난적 刊)이라는 책에 담았다.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건축설계 사무실 벽면에는 서울 풍경 그림들이 죽 걸려 있어 갤러리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그중에는 5년에 걸쳐 완성한 그림도 있다고 한다. 묵직한 이야기첩이자 그림첩인 《서울풍경화첩》은 그들의 개인적인 기억을 기록한 것이지만, ‘우리’가 사는 서울에 대한 기억이자 기록이기도 하다. 정말 소중한 기억이기에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 디지털카메라로 담기보다 정성껏 붓질해 ‘그림’으로 남기기로 했다고 한다.

그들은 궁궐과 옛집, 누군가 정답게 맞아 줄 것 같은 오래된 골목길 등 서울의 오래된 얼굴뿐 아니라 21세기 초현대식 건물, 도심의 복잡한 대로 등 지금의 얼굴까지 연필과 목탄, 물감을 이용해 주름살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표현해 냈다. 서울의 ‘오래된 얼굴’은 임형남 씨, ‘새로운 얼굴’은 노은주 씨가 맡았다. 1998년부터 건축설계 사무실 ‘스튜디오 가온’을 함께 운영하면서 모교인 홍익대학교에도 나란히 함께 출강하고 있는 임형남, 노은주 씨 부부는 건축계에서 글 잘 쓰기로 소문이 나 있다. 그동안 《나무처럼 자라는 집》 《집주인과 건축가의 행복한 만남》을 펴냈는데, 이번에는 글보다 그림이 먼저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들이 그림으로 남긴 서울의 모습 중에는 재개발로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곳도 많다.

“서울에서 어떤 특별한 곳을 찾아가라는 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책에서 소개한 장소는 짬 날 때마다 간 곳이에요. 가령 시내에 나갔다가 잠시 조계사 마당에 앉아 있는 식이지요. 그곳엔 신도도 있고, 스님도 있고, 노숙자도 있어요.”

노은주 씨는 이렇게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보다가 ‘땅에도 소위 팔자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가령 예지동 시계골목은 200여 년 전에도 무언가를 만들어 파는 곳이었다.

“몇 백 년 전 사대문 안을 그린 지도를 보면 그때 그 길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어요. 수백 년 된 옛길을 재개발 논리로 없애서는 안 됩니다. 숭례문 같은 문화재는 복원할 수 있어도 옛길을 복원하기란 어렵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역사도시 서울’에 대해 별로 의식이 없는 것 같아요. 수많은 이야기와 역사를 품고 있는 피맛길이 사라지는데도 누구 하나 나서서 말하는 이가 없었어요. 고향이 수몰된다면 화를 낼 텐데, 서울이 난자당하는 데 말하는 사람이 없어요.”

피맛길, 2009
생선 굽는 냄새가 구수하던 피맛길. 이 피맛길도 옛 모습은 아니다.
건축가 부부는 서울에 대해 “내내 구박하다 아파 드러누운 뒤에야 사람들이 ‘좀 더 잘해줄 걸’ 후회하는 존재”라고 표현한다. 숭례문도 평상시에는 소중한 줄 모르다 불타 버린 후에야 눈물 흘린 사람들이 많지 않았느냐며. “낡고 스산해 보이는 골목도 그 나름의 역사,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데, 경제 논리, 개발 논리에 휩쓸려 ‘없어져야 할 존재’로 여겨지는 게 안타깝다”고 말한다. 진관내동에 살다 이곳이 뉴타운에 편입되는 바람에 떠나야 했던 부부는 그 집을 떠나면서 땅에 대한 이별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이들 부부는 늘 건축의 기본 정신은 땅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여겼다.

“건축이라는 것은 땅의 소리를 듣는 거예요. 지금은 자본의 논리에 덮여 잊혔지만, 예전 우리 어른들은 우물을 덮을 때도 돌을 성글게 해서 덮고, 물길을 막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땅에 대해 예절을 지켰던 거지요.”

명동, 2006
예전의 명동은 낭만적인 장소였지만, 지금은 간판이 깃발처럼 나부낀다.
임형남 씨는 자신이 ‘서울 토박이’이라는 데 특별한 애착을 느낀다.

“어릴 적 방학 때 시골 친척집에 한 달 정도 다녀온 적이 있어요. 서울역에 내려 다시 매캐한 매연 냄새를 맡는데, 그것조차 좋게 느껴지더라고요. 내 자리로 돌아온 느낌이랄까? 서울 사람들은 이곳이 ‘고향’이라는 의식이 별로 없는데, 제게 서울은 분명 ‘고향’입니다.”

2원 50전을 내고 전차를 타고 내리며 을지로나 충무로의 골목길을 누비던 기억도 특별하다. 을지로 1가에서 3가까지 걸으면서 한문과 한글 간판을 읽다 글을 깨쳤다. 어린 시절부터 이곳저곳 다니기 좋아하던 그의 꿈은 여행가였다.

반면 원주에서 태어난 노은주 씨는 어릴 적 공무원이던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 곳곳을 옮겨 다니며 살다 서울 화곡동으로 이사왔다.

“검은 냇물이 흐르는 탄광촌, 극장 뒷골목에서 뛰어놀던 기억 등 워낙 어릴 때라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짤막짤막한 기억이 남아 있어요. 서울에 온 후 첫 기억은 변두리의 썰렁한 골목길이에요.”


여기저기 옮겨 가며 둥지 틀며 서울 탐색

어느 정도 성장한 후 경험한 서울이라 그녀의 눈은 남편보다는 좀 더 객관적인 관찰자의 입장에 서 있다. 가끔 남편이 “어렸을 때 우리 집에 냉장고 있었어”라며 으스대는 소년처럼 서울의 기억을 풀어놓는 게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란다. 10여 년 동안 두 딸을 끌고(?) 다녔더니 아이들이 습관처럼 생긴 버릇이 있단다.

“딸들이 어릴 때 어딜 좀 가자 하면 지겨워했어요. ‘나는 만화영화를 보고 싶은데 왜 이리 끌고 다니나’ 했겠죠. 하지만 요즘엔 친구 집에 다녀오면 그 집의 구조를 건축 도면처럼 그려내요. 자신들도 모르게 건축을 보는 눈이 생겼나 봐요. 첫째 아이 가언이는 그림을 잘 그리고, 둘째 지언이는 호기심이 많고 글을 잘 써요.”

예지동길, 2008
2008년 여름 세운상가 2층 공중가로에서 내려다본 풍경. 이곳은 재개발로 곧 사라질 운명이다.
끊임없이 서울을 탐색하는 이들 가족은 서울의 이곳저곳 맘 닿는 곳에 둥지를 튼다. 최근에는 진관내동 방아다릿골에 살았는데, 이 지역이 재개발하게 되어 다시 도심 아파트로 옮겨 왔다고 한다. 가장 좋았던 때는 효자동의 낡은 집을 고쳐 살 때였다고 한다. 집이 경복궁 후원 가까이 있었는데, 1년 내내 꽃을 볼 수 있었고 궁궐 뒤뜰에는 석물(石物)이 많았다.

“발굴한 무덤에서 가져온 석물도 있었고, 지방 어디에서인가 올라온 석물도 있었어요. 틈만 나면 경복궁 뒤뜰을 찾아 석물을 가까이 느껴 볼 수 있어 좋았지요.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이 한적했어요.”

연애할 때 이들은 직장이 잠실에 있어 코엑스 몰과 롯데월드에 자주 갔다고 한다. 책에는 빠진 정동과 홍대 앞도 이들이 아끼는 곳이다. 이들은 서울의 모든 장소를 좋아한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면 그 사람의 모든 게 좋아지죠. ‘나는 당신의 눈만 좋아해’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이들 부부는 우리가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이 만나는 지점에 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무엇인가를 오래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그 존재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서울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그들이 묻는다.

사진 : 김선아
  • 2010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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