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슬로시티 기행] 충남 예산군 대흥면

효도와 우애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의좋은 형제 마을’

가을에 거둬들인 볏단을 똑같이 나눈 형제는 서로를 생각한다. ‘아우는 새로 살림을 차렸으니 곡식이 더 필요할 거야.’ ‘형님은 식구가 많으니 곡식이 더 필요할 거야.’ 밤에 몰래 자신의 볏단을 서로의 볏단 위에 올려놓는 두 사람. 아침에 일어나 볏단이 그대로인 것을 발견한 후 며칠을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다 어느 날 달밤에 만난 형과 아우는 서로 손을 힘껏 잡는다.

교과서에 실린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쉽게 잊히지 않고 따뜻한 여운을 남긴다. ‘의좋은 형제’가 실제로 살았다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이 2009년 9월, 전 세계에서 121번째, 우리나라에서는 여섯 번째로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우화로 전해지던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로 확인된 것은 1978년, 이곳에서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두터웠던’ 이성만・이순 형제를 기리는 효제비(孝悌碑)가 발견되면서였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이곳에 살았던 형제는 만백성의 귀감이 된다 하여 세종대왕이 궁궐로 불러 상을 주었고, 연산군 때 비석이 세워졌다.

속도와 경쟁만이 ‘살길’로 여겨지는 현대사회. 환경오염과 인간성 파괴 등 이로 인한 병폐가 두드러지면서 ‘옛것의 가치를 되찾자’는 움직임이 전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다. ‘슬로시티 운동’도 이의 일환이다. 충남 예산군 대흥면은 그런 면에서 ‘슬로시티’의 취지와 꼭 부합되는 곳으로 보인다. 역사의 흔적을 켜켜이 간직한 채 옛 모습을 지키고 있는 마을. 그곳에 사는 사람들 역시 마을 공동체와 옛 미덕을 지키며 사는 것에 자부심이 강했다.

봉수산 자연휴양림에서 내려다본 예당저수지와 대흥면. 대흥면은 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렸다.
예산은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다. 시외버스로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 땅에 들어선 순간, 시간을 한참 거슬러 올라간 듯했다. 지방 교육기관인 향교(鄕校), 고을 수령이 정무를 집행하던 동헌(東軒)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여전히 마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고, 몇 백 년 혹은 1000년 된 고목(古木)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향교나 동헌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채 버려져 있거나 띄엄띄엄 관광객이 찾아드는 ‘박제된 유물’로 생명을 이어가는 게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로 남아 있다.

대흥면 교촌리, 마을회관 옆에 자리 잡은 600년 된 나무. 은행나무 중간에 느티나무가 기생하면서 두 나무가 한그루처럼 서 있다. 높이 40m, 가지 넓이 40m의 거목은 잎이 무성한 여름이면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잎이 함께 어우러져 독특한 정취를 자아내면서 농사일에 지친 사람들의 땀을 식혀 준다. 음력 정월 초하루에서 보름 사이,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 주위에 모여 ‘목신제(木神祭)’를 지낸다. 29가구 마을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그들이 1년 동안 무탈하기를 나무에 기원하는 의식. 목신제는 어두워진 후 지내지만, 마을 사람들은 동네를 정갈하게 청소하고 동네 어귀와 나무에 금줄을 두르느라 아침부터 부산하다고 한다. 제사가 끝난 다음에는 마을회관에서 떡을 나눠 먹으며 잔치를 벌인다. ‘미신이라고 배격하기에는 너무 정겨운 풍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600년 된 고목에 마을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목신제. 매년 정월에 열린다.
봄가을이면 마을 사람들이 회관에 모여 함께 점심을 먹는데,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맛있는 것을 가져오기에 항상 반찬이 풍족하다고 한다. 회관에서 먹을 김장을 함께 담그기로 했다는 사람들은 “내일, 아침 먹고 나서 모이자”고 약속한다. 몇 시, 몇 분이라고 정확히 약속하지 않아도 무리 없이 일이 된단다.

조선 태종 때인 1405년 창건된 대흥향교에 들어섰다. 강의하던 명륜당,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동재와 서재, 공자와 선현의 위패를 봉안한 대정전 등 12채의 옛 건물들이 정갈하게 보존돼 있다. 허물어진 부분은 그때그때 손보고, 사람들의 훈김과 손길이 닿아 반들반들 윤이 난다. 유림들은 요즘도 이곳에 모여 대소사를 의논하고, 음력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의관을 갖추고 제사를 지낸다. 매년 봄가을 두 차례 큰 제사인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낸다.

대흥향교에서는 매년 봄 가을 석전대제를 지낸다.


마을 수령이 정무를 집행하던 동헌.

향교와 동헌, 일제시대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 역사의 흔적을 보여주는 곳

이곳은 근대의 모습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00년 전 대흥현 최초의 민간병원으로 세워진 건물은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병원집’이라 부르는 곳. 단층으로 지어진 진료실과 입원실의 건물이나 창틀 모양에서 일제시대를 읽을 수 있다.

100년 된 대흥 최초의 민간병원.
원장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후 병원으로서 기능은 하지 않지만, 원장 사모님이 여전히 그곳에 살며 옛 모습을 보여주는 박물관으로 꾸밀 준비를 하고 있다. 대흥미용실도 40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켜온 곳. 머리를 직접 감으라고 뜨거운 물 한 바가지를 내주는 ‘셀프 서비스 미용실’이지만, 노인들이 오면 이발비를 3000원만 받을 정도로 온정이 넘친다.



지금도 마을의 정신적 지주 역활을 하는 대흥향교.


대흥면 교촌리에 살고 있는 박효신(朴孝信) 씨는 “2007년 향교에서 효녀상을 받았을 때, 나를 이곳 사람으로 온전히 받아 준 것 같아 정말 기뻤다”고 말한다. 한국일보 기자, 여성신문 편집부 부장, 한국광고주협회 상무를 지낸 그는 2004년 이곳에 정착했다.

“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이곳이 할아버지, 아버지의 고향이라 방학 때 종종 내려와 지내곤 했죠. 16년 전, 은퇴한 부모님이 낙향하셔서 저도 주말마다 내려왔습니다. 그때부터 ‘월수(月收) 100만 원만 보장되면 바로 내려가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는데, 마침 그런 기회가 왔어요. 이곳에서 30분 거리인 온양민속박물관장으로 와달라는 제의를 받은 거예요. 바로 내려와 정착했죠.”

물안개가 피어오른 예당저수지. 물고기가 많아 이를 잡아먹고 사는 새들에게도 천국이다.
온양민속박물관장을 퇴임한 후 그는 옥수수・감자・감・배를 수확하는 농사꾼이 됐다. 또 시골에서 사는 소박한 즐거움을 글과 사진으로 블로그(풀각시뜨락)에 올리고, 책도 내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를 만나고 싶다며 사람들이 불쑥불쑥 찾아올 정도. 그동안 차례로 몸져누운 아버지 어머니를 극진히 모셔 ‘효녀상’도 받았다.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그는 요즘 예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문화해설을 하느라 더욱 바빠졌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해발 484m 봉수산 정상에는 663년, 나당연합군에 무너진 백제의 마지막 성 ‘임존성’이 있다. 의자왕이 항복한 다음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백제 부흥운동을 벌인 곳. 그는 “지금도 남아 있는 임존성의 돌 위에 서면 그때 그 사람들이 생각나 눈물이 난다”면서 눈가가 불그스레해진다.

이복현 대흥현보존회 회장(광시중학교 교감). 대흥현보존회는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보존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민간단체로, 지역 주민 대부분이 회원으로 가입할 정도로 참여도가 높다. 매달 마을잡지를 발간해 주민과 향우회원들에게 발송하고, 매년 11월 ‘의좋은 형제 축제’를 연다.
예산군 대흥면은 예당저수지로도 유명하다. 1088ha, 단일 저수지로는 국내 최대 규모인 이곳은 농업용수 공급과 식수원, 홍수 조절을 목적으로 1968년 준공됐다. 넓고 풍광이 좋은데다 상류 주변에 공장이 없어 물이 오염되지 않았고, 물고기 종류가 풍부해 낚시꾼들 사이에 이름난 곳. 최경남 내수면 어업계 계장은 “이곳에는 38종의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는데, 메기와 가물치 등 재래 어종이 워낙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 외래 육식어종인 배스나 황소개구리가 활개 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곳에서 잡히는 메기・가물치는 길이가 70~80cm에 이른다고 한다.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60%가 넘는 대흥 지역이 편입돼 농지를 잃고, 대흥면은 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나뉘었다. 왕래하려면 물을 건너거나 다른 면(응봉면・광시면)을 거쳐야 한다. 주민들은 낚시꾼들을 상대로 좌대나 식당을 운영하면서 저수지를 생계 수단으로 삼았다. 저수지에서 잡아 올린 민물고기로 만든 어죽이나 붕어찜은 이 지역의 대표 음식. 동네 행사가 있으면 어김없이 어죽이 나온다고 한다. 인근 식당에서 떡붕어찜을 먹었다. 생태처럼 큼직한 떡붕어가 들어간 찜은 김치와 함께 매콤하게 조려져 나오는데, 그다지 비리지 않고 부드러운 속살이 맛있다. 최경남 계장은 “집에서는 붕어를 막걸리에 담갔다 씻어 회로도 먹는데 정말 맛있다”고 이야기한다. 예산군청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봉수산 자연휴양림에 숙박시설을 운영한다.

예당저수지와 대흥면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 1박 4만2000원(5인, 비수기 기준)에서 7만원(10인, 비수기 기준)으로 비교적 저렴한 비용에 쾌적한 시설을 갖췄다.

사진 : 김선아
  • 2010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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