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이천에서 개인 와이너리 운영하는 박원목(고려대 명예교수), 윤경은(전 서울여대 교수) 부부

술 빚는 남편, 꽃 가꾸는 아내

“우리나라는 위도 상 포도주를 재배하기에 딱 좋은 위치예요. 하지만 여름 장마와 겨울 한파가 문제죠. 그래서 이렇게 비닐하우스를 만들거나 비가림 시설을 해 주어야 합니다. 알이 작아서 껍질이 많이 나오는 포도를 만드려면 땅이 기름져서도 안 되고, 습해서도 안 돼요. 그렇게 키운 포도를 9월 말 쯤 수확하면 포도주로 한 500병쯤 나오는데, 저는 지인들에게 선물로 나누어 주지요.”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 주변이 온통 산과 들로 둘러싸인 이 조그만 시골마을에 독특한 포도밭이 있다. 커다란 비닐로 지붕을 만들어 비를 가린 과수원 안에는 카베르네 소비뇽, 샤르도네, 세이벨 등 이름도 낯선 품종의 포도들이 자라고 있다. 와인제조전문가인 박원목 고려대 농대 명예교수의 연구공간이기도 한 이곳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포도 재배에서부터 와인 제조까지 모두 한곳에서 이루어지는 개인 와이너리다.

박 교수의 부인은 서울여대 원예학과 교수로 총장까지 지낸 윤경은 박사. 고려대 대학원 동기로 만나 결혼한 두 사람은 남편이 2007년, 부인이 2008년에 퇴임하면서 이곳에 정착했다. 오랫동안 꿈꾸던 공간에서 남편은 포도를, 아내는 꽃과 나무를 가꾸며 산다. 부부의 집을 찾은 날, 두 사람은 수확이 얼마 남지 않은 포도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부부를 따라 과수원으로 들어서니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가 한눈에도 튼실해 보였다. 하지만 포도 알갱이가 일반 포도와 비교해 아주 작은 것이 흔히 보던 품종은 아니었다.

박 교수는 “와인의 향과 색을 결정하는 것은 껍질이기 때문에 와인용 포도는 알이 작을수록 좋다”며, “항산화작용을 하는 폴리페놀과 여러 가지 생리활성 물질이 주로 껍질에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껍질과 씨를 섞어 발효한 레드 와인이 화이트 와인이나 포도 생과보다 좋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포도 알갱이와 잎 등을 일일이 비교해 보여주며 품종의 차이를 설명하던 그는 “샤르도네는 화이트 와인, 카베르네 소비뇽은 레드 와인이 된다”며 “여러 품종을 재배해 본 결과 이 두 가지가 우리나라 토양에서는 가장 잘 자라고, 와인으로 만들었을 때 향도 좋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는 위도상 포도주를 재배하기에 딱 좋은 위치예요. 하지만 여름 장마가 문제입니다. 여름 한 달 포도가 한창 자라야 할 때 비를 맞아 습도가 높아지면 병이 생기거든요. 유럽 포도는 병충해에 약해요. 겨울 한파도 짧다고는 하지만 포도나무에는 치명적이죠. 그래서 이렇게 비닐하우스를 만들거나 비가림 시설을 해 주어야 합니다. 알이 작아서 껍질이 많이 나오는 포도를 만들려면 땅이 기름져서도 안 되고, 습해서도 안 돼요. 물도 봄에 싹 날 때 딱 한 번만 주어야 하고요. 그렇게 키운 포도는 9월 말쯤 수확합니다. 우리 집에서는 한 번 수확하면 포도주가 500병쯤 나오는데, 저는 판매 허가가 없어 시판할 수는 없어요. 대신 지인들에게 선물로 나눠 주지요.”

포도밭을 나와 마당 한켠에 마련된 등나무 그늘 밑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가을을 코앞에 둔 바람은 시원했고,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경쾌했다. 꾸미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정원은 인공적이지 않아 편안하고 보기 좋았다. 포도밭과 와인이 남편의 작품이라면 눈길 가는 곳마다 꽃과 나무를 만나는 멋진 정원은 원예학을 전공한 아내의 솜씨였다.

“전공이 농학이니까, 은퇴하면 시골에서 농사지을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20년 전, 황무지나 다름없던 이 땅을 사서 그동안 시간 날 때마다 내려와 개간했지요. 형편없는 땅을 이만큼 만드느라 고생도 많이 했지만 여러 가지 포도를 시험 재배해 볼 수 있고 와인 연구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아주 좋아요.”(박원목 교수)


와인이 농가 소득에 기여하길 바라는 마음

그가 와인과 인연을 맺은 지는 올해로 30년째. 지난 1979년, 2년간 독일에서 교환교수로 생활하는 동안 시골 포도농가들이 소량으로 와인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을 보며 개인 와이너리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농학자인 그의 눈에는 무엇보다 와인이 포도보다 부가가치가 높아 농가소득을 올리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였다.

그가 몇 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우리 땅에서 재배하기에 적합한 와인용 포도를 찾아내 농민들에게 무료로 분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와인용 포도 보급이 많이 이루어지면 와인 소비가 점점 늘고 있는 요즘, 우리 땅에서 나는 포도로 질 좋은 국산 와인을 생산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크다. 몇 해 전부터는 감귤・사과・복숭아・머루・복분자 등 여러 가지 과실을 이용한 와인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지역 특산품을 활용해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보려는 지방자치단체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농가의 새로운 수입원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에 그 어느 때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실험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도 자신이 가진 재능과 지식을 기꺼이 농민을 위해 쓸 생각이라는 박 교수는 와인 연구 외에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와인 강의, 소믈리에 교육, 과실주 회사들의 자문역 등을 맡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남편의 일을 돕는 한편 아내는 아내대로 식물화 그리기에 푹 빠져 한국식물화협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그동안 받은 게 많으니, 이제는 모두 돌려주고 가야죠. 제가 익힌 기술과 노하우가 우리나라 산업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고, 농민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 욕심이 없으니, 하루하루가 행복합니다.”

남편의 말에 아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로, 학문적 동지로, 이제는 더없이 좋은 인생의 친구로 함께 포도밭을 가꾸고, 와인을 빚으며 사는 두 사람의 모습은 참 보기 좋았다. 지금도 당당히 “나는 아내 윤경을 위해 태어났다”고 말할 정도로 아내 사랑이 지극한 남편과 한쪽 귀가 불편한 남편 옆에서 ‘통역’이 되기도 하고, 생각을 대신 전해주기도 하는 아내. 서로 사랑하며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처럼 편안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이곳에서 나는 와인 향과도 닮았다. 강렬하지 않지만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사진 : 김선아


■ 와인전문가 박원목 교수가 일러주는 와인 즐기는 방법 ■

와인은 단숨에 들이키지 말고, 입안에 2초 정도 머물다 삼킨다. 그래야 숨어 있던 향이 나와 와인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맛을 음미할 새도 없이 꿀꺽 넘기면 쓰고 떫은 맛만 남는다.

또 가볍고 산뜻한 맛이 나는 화이트 와인은 차갑게, 상대적으로 묵직한 맛의 레드 와인은 상온에서 즐겨야 제격이다. 여러 종류의 와인을 마실 때는 드라이한 맛을 맨 먼저, 단맛이 나는 것을 맨 나중에 맛본다. 숙성 기간에 따라서는 빠른 것에서 오래된 순서로,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을 함께 마실 때는 가볍고 산뜻한 맛을 내는 화이트 와인을 먼저, 깊고 묵직한 맛의 레드 와인을 나중에 마신다.
  • 200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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