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달 특집] 바이올린 제작자 김현주・김동인 부자

‘한국의 스트라디바리’ 꿈꾸죠

헝가리 출신 집시 바이올리니스트 렌드바이의 음악을 들으면 ‘헝가리인은 바이올린을 쥐고 태어난다’는 말이 실감난다. 때로는 신비롭게, 때로는 강렬하게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바이올린. 마이스터(Meister) 김동인(41ㆍ스트라디 현악기 공방) 씨는 이런 선율을 자아내는 바이올린을 만들어 내는 장인이다.
그의 꿈은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유명한 17~18세기 이탈리아 바이올린 제작자 가문 스트라디바리 일가처럼 되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 바이올린제작가협회장을 역임한 김현주씨로 칠순 넘은 나이에도 아들과 함께 공방을 꾸리고 있다. 바이올린 제작자 아버지 밑에서 바이올린을 잡은 그는 대학에서 첼로를 배웠고, 독일의 명문 미텐발트(Mittenwald) 바이올린 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만든 바이올린은 국내 정상급 바이올린 연주자와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 외국 악기의 수리도 맡는데, 세심하기로 정평이 나 있어 금호문화재단의 모든 악기를 관리하고 있다.

“독일에서 받은 마이스터라는 자격증은 나를 다잡는 데 기본이 됩니다. 그저 부끄럽지 않으려 노력할 따름이지요.”

2001년에는 폴란드 비에니아프스키(Wieniawski) 현악기 제작경연대회에서 10위에 올라 주목을 끌었고, 4년마다 열리는 미텐발트 현악기제작경연에서 본선에 오르기도 했다. 이외에 여러 국제현악기제작경연대회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한국에서도 바이올린을 제작한다는 것을 알리는 중이다. 현재 미텐발트에 한국 학생 2명이 재학 중인데, 모두 그의 제자다.

“올해는 가을에 열리는 이탈리아 트리에날레 제작 콩쿠르를 준비하고 있어요. 귀국하자마자 이곳에 출전했다 실격당한 경험이 있어요. 라벨을 붙이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는데, 한국에서는 수출필증이 있어야 통과가 되거든요. 제 딴에는 견출지에 정말 잘 안 보이는 곳에 살짝 붙였는데 기준에 어긋났던 거죠.”

가문비나무・단풍나무・흑단 등의 나무와 줄을 연결해 소리를 내게 하는 일은 분명코 나무의 영혼을 불러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 나무를 일일이 조각도와 대패로 깎아 내는 작업을 그는 맨손으로 하고 있었다.

“나무는 살아 있어요. 습도에 따라 수축됐다 이완됐다 하죠. 그러니 섬세하게 다룰 수밖에 없어요.”

이 때문에 그는 작업할 때도 장갑을 끼지 않는다. 공방에서 조용히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등 사이로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공방이 있는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청바지에 작업복을 걸친 부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점심 식사를 하러가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인가’라며 모두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본다고 한다. 동화 속 아이처럼 아버지와 함께 있어 더 행복하다는 그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후 바이올린 제작자의 길에 들어선 아버지는 두 아들 중 하나는 이 일을 이어갔으면 하고 바라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청년 시절 독학으로 바이올린 제작을 배우셨어요. 가정 형편이 어려워 유학 갈 생각은 못하셨고요. 그래서 저만큼은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으면 하셨죠.”

김동인 씨가 다닌 150여 년 전통의 독일 미텐발트 바이올린학교(국립바이올린제작직업전문학교)는 이탈리아의 크레모나와 쌍벽을 이루는 명문 학교. 7학기제로 한 학기에 4명 정도만 선발할 만큼 까다롭기로 소문나 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포함해 단 두 사람만 마이스터 자격을 취득했다고 한다.


독일 바이올린학교 졸업 후 명장 밑에서 도제 수업

1993년 9월, 그는 뮌헨에서 기차로 2시간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 미텐발트에 도착했다. 1년 동안 아버지에게 목공 실기를 배우고, 악기 시험을 위해 첼로 레슨을 받고, 독일어 공부 등 철저한 유학 준비를 마친 다음이었다. 미텐발트는 ‘숲 속 한가운데’라는 뜻. 바이올린 제작으로 유명한 도시이자, 오스트리아와 인접한 국경 도시이기도 하다. “9월이지만 산꼭대기는 눈이 쌓여 있었어요. 알프스산맥 자락에 위치해 있으니까요. 비도 내리고 날씨는 우중충해서 음울할 정도였지요.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두려움, 언어 소통에 대한 걱정, 가족들의 기대를 업고 왔다는 부담감 등 걱정거리가 많아서 ‘우울감’을 떨치기가 힘들었어요. 하지만 이내 학교생활이 바빠지고,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어요.”

독일에 있는 7년 동안, 그는 정말 열정적으로 공부했다. 덕분에 ‘목 디스크’도 얻었다.

“그때 제가 배운 선생님들이 은퇴를 앞두고 계셔서 우리 학기 학생들이 마지막 제자들이었죠. 마지막 열정을 다하셨으니 우린 행운아였던 셈입니다.”

그의 행운은 또다시 이어졌다. 학교를 졸업한 후 현악기의 명장으로 손꼽히는 조세프 칸투샤(Joseph Kantuscher) 씨 아래에서 도제 수업을 받은 것. 현악기 제작 기법 중 그의 이름을 딴 ‘칸투샤’형이 따로 있을 정도로 이름난 명장이었다. 졸업 후 그의 제자로 들어가길 바랐으나 취업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졸업했으니 당신 나라로 돌아가라는 것. 오스트리아에서 플루트를 공부하고 있던 아내는 2년 정도 더 공부해야 해 홀로 남겨 놓고 떠날 수도 없었다.

다시 독일로 가기 위해 변호사까지 선임했지만, 비자문제는 여전히 난제였다. 그때 칸투샤 씨가 친구인 독일 노동청 간부에게 부탁해 가까스로 비자를 받았다. 그 후 3년여간 그는 학교에서보다 더 철저한 도제 기간을 거쳤다. 무엇보다 그가 크게 배운 것은 ‘생각하며 악기를 만드는 자세’였다고 한다. 칸투샤 씨의 지론은 완벽한 악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완벽에 가깝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칸투샤 선생님은 지금 아흔이 넘으셨어요. 슬로베니아분인데, 젊을 때 독일로 오셔서 독일인 아내를 만나 정착하셨죠. 당시 선생님은 여든이 다 된 노인이었고, 저는 20대 후반의 청년이었어요. 좁은 작업실에서 하루 종일 열심히 바이올린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90%를 해놓으면, 선생님이 10%의 마무리를 하셨습니다. 늘 ‘기억도 습관’이라며 작업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새기라고 하셨어요. 사실 작업하다 보면 다음 공정을 생각하느라 뒤돌아볼 틈이 없거든요. 하지만 선생님은 실수도 꼭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아들과 아버지가 나란히 앉아 바이올린을 만드는 공방. 그의 아버지나 그가 악기 제작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음악’ 너머, 음악을 가져오게 하는 그 ‘무엇’에 대한 관심 때문 아니었을까? 그것은 아마 ‘음악’에 대한 근원적인 경외감일 것이다.

사진 : 김선아
  • 2009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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