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독도 상주기자 전충진

‘독도는 우리 땅’이라며 비분강개한 사람들아!

3월이면 연락선은 다시 운항을 시작할 것이다. 올해도 독도를 찾는 분들이 더 많아지고 독도 지키기에 힘이 더 실렸으면 좋겠다. 연락선이 다니면 난 우선 울릉도 나가 이놈의 앓는 이빨부터 빼 버릴까 한다.
‘독도 문제’도 앓는 이를 뽑듯이 우리 시대에 종지부를 찍을 수는 없을까?


글ㆍ사진 : 전충진 매일신문 기자
이 겨울, 파도 소리는 계통 없이 와글거리고 바람 소리는 묵직한 저음으로 연이어 벽체를 두드린다. 고기잡이배들 불빛도 보이지 않고 서도를 훑는 등댓불만 처연하다. 이런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도 배들은 더 이상 섬으로 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독도살이 반 년 눈칫밥에 터득한 것이다.

대체로 그렇다. 밤바다는 저 혼자 술렁이며 날뛰고, 나는 칠흑 같은 방에 웅크린 채 아픈 이빨을 사려 물고 고통에 겨워한다. 과연 이것은 무슨 사태인가. 나는 지금 왜 동해 한가운데 드러누워 이러고 있는 건가.

2월 17일 독도에서는 드물게 밤새 눈이 내려 서도 바위틈에 눈이 쌓였다.
1998년 9월, 대한민국은 ‘신한일어업협정’을 놓고 죽 끓는 듯했다. 독도를 고스란히 일본에 넘겨 줬다는 분노와 일본 규탄 목소리, 생계를 위협 받는 어민들의 항의까지 텔레비전 뉴스는 연일 궐기하는 국민들 영상을 내보냈다. 과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인가. 부아가 치밀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차라리 내가 독도에 들어가면 어떨까 싶었다.

2008년 7월, 일본의 역사 교과서 해설서 문제를 놓고 전국은 벌집 쑤신 듯했다.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고 언론은 연일 대서특필했다. 독도가 있는 대구 경북의 대표 언론 매일신문사는 동해, 독도 문제를 연일 1면 머리기사로 장식했다.

동도 구접안장에서 바라본 독립문 바위.
회의(懷疑)가 들었다. 분명 이런 ‘애국 열정’도 3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독도 실효지배에 어떤 보탬이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독도를 확실하게 지키려면 차라리 독도에 들어가 주민이 되어 사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겠는가. 그때, 내 처지에 당치도 않게, 조선의 망국을 보고 순국한 매천 황현 지사의 유서 한 구절이 삭지도 않고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벼슬을 하지 않았기에) 가히 죽어 의리를 지켜야 할 까닭은 없으나….’ 더도 덜도 말고 딱 이 한 구절.

‘대한민국 동쪽 땅끝’이라고 새긴 영토표지석.
그래. 내가 육군 병장 만기 제대하여 병역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관직에 있어 국가의 녹을 먹는 것도 아니지만, 가히 목숨을 버리지는 못할망정, 단 1년만이라도 독도를 지키는 데 보탬이 된다면 그 정도 수고로움은 감당할 수 있지 않겠나. 똑똑히 보지 않았는가. 우리나라 언론들은 이라크전처럼 흥행이 되는 취재에는 수천만, 수억 원을 들여 목숨을 걸고 나서지만, 진정으로 독도를 지키기 위해 나서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단 회사에 독도 상주취재에 대한 보고를 했다. 간부나 동료들 대부분이 웃었다. 그러나 편집국장은 진지하게 검토한 후 1주일 만에 단안을 내렸다. 상주 의사를 재차 확인하더니 준비 작업에 착수하도록 지시했다. 한 번도 처리한 적 없는 이 일을 놓고 모두 우왕좌왕했다. 나도 그렇거니와 울릉군청, 경북도청, 문화재청 모두 난감해했다. 일일이 전화하고 찾아다니며 설득해야 했다. 입도 절차만 밟는 데 꼬박 두 달이 걸렸다. 하루하루 일희일비, 피 말리는 여름 두 달이었다.

2008년 9월 5일, 독도행 배에 올랐다. 아스라이 한 점 독도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박동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또 눌렀다. 거치적거릴 것 하나 없는 수평선 위 느닷없는 두 개의 섬, 소름 돋을 만큼 신비스러웠다. 사진에서 본 것보다,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우뚝하고 위엄 있다.

독도경비대의 국기 게양식 광경.
첫발을 내디뎠다. 독도 접안장 바닥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어차피 혼자 떠나 스스로 해야 했다. 등짐 가득 먹을거리 짊어지고 카메라 셔터 누르며 이불 보퉁이를 발로 굴려 내려야 했다. 이것은 거창한 의식일 수도 없고 애국의 관념과도 상관없었다. 그저 현실이었다. 내 손으로 밥 지어먹고, 손빨래해 널고, 세수한 물에 걸레 빨면서 사진 찍고 글 쓰는 일, 그게 내가 해결해야 할 노동이었다. 고백컨대, 나는 내 밥 찾아 먹기도 급급한 생활인이 되었다.

지난해 11월 말까지 서도에서 생활했다. 오자마자 아침에 운동 삼아 서도 꼭대기까지 올라 다녔으나 급경사로 무릎관절에 무리가 와서 그만뒀다. 종일 다녀도 40㎡ 남짓한 마당과 선가장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 전부였다. 뭍과 통하는 유일한 생명줄은 휴대전화뿐. 가족과 전화통화조차 하지 못한 날은 유폐당한 기분이었다. 속 좁은 내가 혼자서 끙끙대노라면 밤새 바다모기는 왜 그리 무는지…. 작년 가을 바다모기에 물려 얼마나 긁었던지 온 팔다리에 고름이 잡혀 자칫 후송 될 뻔했다.

12월 들어 모든 연락선 운항이 끊겼다. 12월부터 동도 등대에서 생활하고 있다. 겨울 동안 독도는 무인지경이다. 바람과 파도만 제 세상 만났다. 바다는 일주일에 5~6일은 파도 대가리가 허옇게 부서져 ‘물먼지’를 날린다. 바람이 조금 분다 싶었는데, 출입문을 열면 돌풍이 몰아쳐 문짝과 함께 내동댕이쳐졌다. 이런날 고깃배가 올 리 만무하다.

세 사람이 40여 일 전 짊어지고 들어온 부식이 1주일 전 이미 바닥났다. 김치는 보름 전에 떨어졌고 이젠 양파 하나 반, 호박 반 개, 반쯤 썩은 감자 한 알, 파 다섯 뿌리, 양배추 반쪽뿐이다. 일주일 전에는 소주라도 한 병 구할까 하고 오전 내내 접안장에 쭈그리고 앉아 고깃배를 기다렸다.

독도 동도에서 바라본 일출 광경.
겨울밤은 길고도 길고 나는 이 무슨 궁상인지 모르겠다. 원망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냄비 바닥’ 같은 사람들아! 일본 교과서 해설서 문제로 그토록 흥분한 지 6개월도 지나지 않았는데 모두들 어떻게 그리도 까마득히 잊는가. 그뿐인가. 어떤 이는 왜 기자가 독도에 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마뜩찮은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그래서 원망스럽다. 또, 송구하다. 독도에 왔으면 최소한 독도문제 실마리라도 풀어내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해 몸 둘 바 모르겠다. 그도 아니면 한 줄만 읽어도 북받치는 감동에 눈물을 줄줄 흘릴 그런 기사를 써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

3월이면 연락선은 다시 운항할 것이다. 작년에는 일본 역사 교과서 파동 탓인지 많은 분들이 독도를 찾았다. 먼 뱃길 멀미도 마다않고 달려왔다. 올해도 독도를 찾는 분들이 더 많아지고 독도 지키기에 힘이 더 실렸으면 좋겠다. 연락선이 다니면 난 우선 울릉도 나가 이놈의 앓는 이빨부터 빼 버릴까 한다. ‘독도 문제’도 앓는 이를 뽑듯이 우리 시대에 종지부를 찍을 수는 없을까?

정월대보름날 동도 헬기장에서 바라본 독도 등대.
글쓴이 전충진님은 1961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대구대학교 사범대 지리과를 졸업했습니다. 1991년 대구 매일신문사에 입사, 현재 사회부에서 근무 중입니다. 《도자기와의 만남》이란 책을 냈습니다. 2008년 9월부터 최초의 독도 상주기자로 있습니다.
  • 2009년 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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