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26) | 산토끼는 지나가고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절간 같던 숲 골짜기 집이 대입 시험 전쟁 치르고 돌아온 딸아이 덕분에 시끌벅적합니다. 피로에 찌든 병사는 반나절 꼬박 침대 속에서 자다 말다 책 읽다 말다 고요히 지내는 터이지만, 끼니때마다 일으켜 앉히자면 어버이 둘이 요란하게 말품을 들여야 하니까요. 더구나 ‘일등같은 거 할 생각 말아, 그거 엄청 피곤한 거야.’ 농담 반 진담 반 어릴적부터 일러준 말 덕분인지 경쟁이라는 걸 모르고 어딜 가나 친구 만들기에 바쁜 성정 느긋한 이 병사에게도 이번 전쟁은 남달리 가혹했겠지요.

병사가 마침내 식탁에 앉아 전쟁터에서 겪은 일을 종알댈 때, 멀찌감치 제 방에서 친구들과 전화로 얘기하는 소리며 마당에서 호돌이 곰돌이와 어울리며 깔깔대는 소리를 들을 때, 그래서 더욱 가슴 뭉클해지곤 합니다. 그 감동은 대체로 시계와 달력 숫자로 흘러가던 일상을 또렷하고 생생하게 새겨 내면서, 또한 묘한 애조를 띤 채 딸아이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겨다 놓고 싶어 안달 나게 만듭니다. 눈치 없이 귀찮게 군다 할 줄 알면서도 헛수고를 하게 되지요.


“눈 온 산에 한 번도 안 가 봤지?”

싱글싱글, 길게 늘어졌던 딸아이 눈매가 여지없이 굳어지면서 단호한 대답이 날아옵니다.

“가 봤어.”

남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미하고 같은 마음에서 몇 마디 길게 말을 보탭니다.

“나랑 가 봤지. 그게 벌써 십 년이 다 되어 갈 걸, 아마? 최소한 계절마다 한 번씩은 산에 올라 봐야 하는데, 바로 뒷산… 치악산까지 안 가도 되니 얼마나 좋으냐.”

휘리릭,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딸아이는 서운한 만큼이나 키도 훌쩍 커 보입니다.

산이 있어 얼마나 좋은지, 눈에 발이 푹푹 빠지면서야 마음이 서늘히 식습니다. 하긴, 우리도 산 좋고 나무 좋은 줄 삼십 넘어 알았지…시험 결과 발표 기다리는 마음이 무거워 꼼짝하기도 싫겠지… 중얼중얼 속말을 흘리다 문득 눈길에 찍혀 있던 발자국이 뚝 끊긴 것을 깨닫습니다.

“어, 강씨 아저씨가 여기까지만 올라왔다 가셨나 보네.”

“여기서부턴 꽤 가파르니까….”

그래놓고도 나뭇가지에 쌓인 눈 덜어 먹으며 걷느라 가파른 데를 오르는 줄도 몰랐습니다. 한나라 때 소무(蘇武)가 흉노들한테 납치당했을 때 눈만 먹고 살아났다던데, 그런 생각에 마음 팔린 채 낮은 산꼭대기에 이르고서야 아이젠도 없이 내려갈 일을 걱정하는 남편 얼굴이 보이는 겁니다.

“저 건너편 숲으로 돌아 내려가는 수밖에 없겠네.”

상대적으로 경사가 덜할 뿐, 낙엽 한 층 눈 한 층의 낯선 길을 더듬는 걸음이 꽤나 더딥니다. 거북이처럼 더딘 덕분에 녀석을 만난 거지요.

“저기, 산토끼!”

꿩이며 다람쥐, 청설모, 고라니들은 마주친 적 있어도 산토끼는 처음입니다. 잿빛인 걸 보니 눈 속에서 하얗게 털빛이 변한다는 눈토끼는 아닌 모양이에요. 그 토끼가 열 걸음쯤 앞에서 기다란 두 귀를 한껏 곧추세운 채 아주 잠깐 멈추어 서더니 냅다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잡을 생각도 말고, 따라올 생각도 말라는 듯이!

엉금엉금 산을 내려오는 내내 그것이 마치 생의 한 시절 같다, 여겨졌습니다. 지금 딸아이가 애써 잠을 청하고 청하며 이겨내려 애쓰는 한 시절도 눈 속의 토끼처럼 시간의 저편으로 하얗게 사라지겠지요. 그 잔영에서 어떤 은유를 발견한다면 좋겠다, 바랄 뿐입니다.
원재길ㆍ이상희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고등학생 딸 새록과 살면서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09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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