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준 박사

아프리카 작은 왕국에서 인술(仁術) 펴는 한국인 슈바이처

지난 1월, 경기고 동문회가 연 ‘자랑스러운 경기인상’ 시상식. 이날 수상자는 올림픽 금메달로 영웅이 된 수영선수 박태환과 아프리카에서 의료 활동을 하는 민병준 박사였다. 아프리카 스와질란드에서 날아온 민병준 박사는 올해 칠순을 맞은 반백의 노신사였다. 시상식을 몇 시간 앞두고 만난 자리에서 그는 시종 밝은 모습으로 아프리카 생활 얘기를 들려주었다.
남부 아프리카의 왕족 국가인 스와질란드는 인구 100만 명에 국민소득 800달러에 불과한 작고 가난한 나라. 정부 파견의사로 그곳에 첫발을 디딘 이후 열악한 의료 환경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자리를 잡은 지 올해로 29년째다. 그가 아프리카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35년 전. 백병원을 거쳐 시립병원 외과 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아프리카에 파견할 의사들을 모집한다’는 신문 공고를 본 것이 계기였다. 1970년대는 아프리카 대륙이 제3세계로서 국제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하던 시기. 우리 정부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과 외교의 물꼬를 터 UN가입의 발판으로 삼는 것이 큰 과제였다. 그 해결책 중 하나로 떠오른 것이 의사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던 아프리카에 의료진을 파견하는 정책이었다.

시립병원에서 근무하는 동안 행려병자를 비롯한 빈민층의 진료를 도맡으며 어려운 사람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그는 ‘이런 경험도 젊을 때나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에 선뜻 지원서를 냈다. 그렇게 해서 그는 1975년 8월, 아내 임정자 씨(65)와 세 살짜리 딸, 6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우간다로 떠났다.

“우간다는 우리 정부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나라였어요. 독재자로 유명한 이디 아민이 당시 우간다를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아프리카연합의 의장이었거든요. 그래서 한국 의사 7명이 한꺼번에 갔어요. 처음에는 아프리카가 아무리 덥고 못사는 나라라고 해도 그렇게 못 견딜 정도는 아닐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아이쿠’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고요.”


이디 아민의 오랜 폭정에 시달린 탓에 우간다 국내 정세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는 “상점에 가도 물건이 없어 비누, 휴지 같은 생필품조차 구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6개월 된 아들의 분유를 확보하는게 늘 그의 애를 태웠다.

“우유 때문에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가게에 가서 사정사정해 한 통씩 얻어 오기도 하고, 젖소가 있는 집에 미리 말해 두었다가 젖 짜는 날 얻어다 먹이기도 했지요. 사정이 좀 더 나은 옆 나라 케냐까지 1600km나 되는 거리를 자동차로 이틀 동안 달려간 적도 많아요.”

2006년 국회 개원식날 스와질란드 왕과. 왕실 주치의를 겸했던 그는 양국 교류에 중심역할을 했다.
어렵기는 병원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으로 와야 할 의약품이 암시장으로 팔려 나가기 일쑤였다. 마취약이 없어 응급환자를 국소마취로 진통제를 주사해 가며 수술한 경우도 다반사.

“외과 의사가 없으니까 저 혼자 모든 수술을 다 했어요. 한국인 내과 의사가 또 한 명 있었는데, 우리 둘이 종합병원을 운영한 셈이지요(웃음). 어쨌든 의사들이 그렇게 아프리카 각국에서 고생한 덕분에 70년대 후반부터 아프리카 많은 나라들과 국교를 맺게 됐어요. 국익에 기여했다는 생각에 참 뿌듯합니다.”

우간다에서 5년간의 근무를 마친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짐을 꾸렸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귀국하는 길,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케냐 나이로비에서 잠시 머무르고 있을 때 케냐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그를 초청했다. 식사 자리에서 대사관 관계자는 “스와질란드 왕국에서 우리 정부에 외과 의사 파견을 요청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외과 의사가 없어 수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말에 그의 마음은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호텔로 돌아와 집사람에게 의견을 물었어요. 우간다에 올 때도 별 반대를 하지 않았었는데 이번에도 그냥 어떤 나라냐고만 묻더라고요. 나도 어떤 나라인지 몰라 남아프리카공화국 옆 나라라는 것만 알려줬어요. 그렇게 한국행을 포기하고, 이름도 못 들은 스와질란드라는 나라로 가게 된 겁니다.”

스와질란드도 여느 아프리카 병원과 다를 바 없었다. 정부 병원은 한국, 영국, 아일랜드, 이스라엘, 덴마크 등 세계 각지에서 파견된 다국적 의료진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의약품이나 수술 도구의 부족 문제는 똑같았다.

“여기 온 지 2년째 되던 해(1982년)에 담석증 환자를 수술했어요. 그게 그 나라 신문에 톱뉴스로 소개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말 간단한 수술인데 말이에요. 그 정도로 의료 환경이 낙후된 곳입니다.”

무의촌 진료 후 한국 자원봉사자, 현지 주민들과 함께.

에이즈 감염자 수술하다 바늘에 찔리기도

1976년 우간다 오지에서 세 번의 수술로 살아난 환자와 아이가족과 함께.
정부 병원에서 근무하며 그는 왕족에서부터 서민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진료하고, 치료했다. 병원비가 없어 물건을 가지고 오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며 그는 최소한의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는 무의촌 사람들을 떠올렸다. 이 정도로 가난한 나라라면 무의촌 사람들의 건강 상태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때부터 약 상자와 간단한 수술 도구를 챙겨 들고 한달에 한 번씩 시골 마을을 찾았다. 외과 의사가 없어 수술을 하지 못 하는 지방 병원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수술을 집도하기도 했다.

“스와질란드는 나라 전체가 극심한 식량난과 식수난에 시달리고 있어요. 정부 병원에 오는 사람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고, 대부분은 아파도 병원에 가는 건 꿈도 꾸지 못합니다. 위생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설사, 피부병, 안질 같은 병이 많아요. 하지만 정말 심각한 것은 바로 에이즈입니다. 공식적인 통계로는 국민의 36%가 에이즈 감염자라고 하는데 제 생각엔 절반 가까이 되는 것 같아요.”

스와질란드에 차린 병원 ‘민 클리닉’.
그는 아프리카 생활에서 가장 두려운 세 가지 요소로 ‘물리면 24시간 안에 사망에 이르는 뇌성 말라리아’, ‘며칠간 잠만 자다 죽게 만드는 말라리라 모기의 일종인 체체 플라이’, 그리고 에이즈를 꼽았다. 실제로 그는 에이즈 감염자를 수술하다 바늘에 찔리는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집사람에게 말도 못 하고, 얼마나 속을 끓였는지 몰라요. 6개월간 완전 지옥에서 산 느낌이지요. 음성 판정을 받고 나니, 이곳에서 아직 할 일이 더 남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더라고요.”

결국 그는 당초 계약 기간이었던 10년간의 근무를 끝내고도 돌아오지 않았다. 무의촌에서 오로지 그의 방문만을 기다리는 가난한 스와질란드 사람들과 외과 의사가 없어 그가 떠나고 나면 당장 수술을 진행할 수 없는 정부 병원의 현실을 외면하지 못한 그는 그곳에 남아 ‘민클리닉’이라는 병원을 열었다.


우리나라와 스와질란드를 잇는 민간 외교관

한편 그는 스와질란드 정부 병원에서 일하면서 스와질란드와 우리나라의 연결고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국교가 없던 시절, 의료 현장에서 그가 보여준 헌신적인 노력은 왕족을 감동시켰고 스와질란드가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를 지지하도록 하는 데 크게 한몫했다. 1986년에는 양국에 대사관까지 세워졌다. 하지만 UN 가입이라는 목적을 이루자 우리 정부는 돌연 대사관을 철수했고 그로 인해 현지에 있던 그는 한동안 스와질란드 정부의 불편한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국가든 사람이든 한번 맺은 관계를 이해관계에 따라 쉽게 내칠 수 있습니까? 그 이후 한국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를 바꾸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도 두 나라의 교류를 완전히 단절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제가 그 창구 역할을 했어요.”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2005년, 스와질란드 명예총영사로 임명되었다. 지난해 여름에는 외교통상부가 선정한 42인의 재외동포 명예위원 자격으로 서울을 찾아 건국 60주년 경축식에 참여했다. 우리 정부가 세계 각지에서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있는 재외동포들을 초청한 매우 뜻깊은 자리였다.

무의촌 진료 시마다 빠지지 않고 도와주는 부인 임정자 씨.
뜻밖의 경사가 겹치면서 지난해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서울을 방문했지만 그는 두 번 모두 행사가 끝난 다음 날 곧바로 스와질란드로 돌아갔다. 자신을 기다리는 환자들 때문이었다. 그는 “우리나라는 나날이 발전하고 있지만, 스와질란드는 예나 지금이나 큰 변화가 없어 의료 환경도 그다지 나아진 것이 없다”고 한다. 무의촌 봉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도 요즘은 봉사 활동에 든든한 동지가 생겼다. 그의 부인 임정자 씨(65)다. 간호사 출신이지만 결혼한 후 아이들 키우랴, 남편 내조하랴, 병원 일은 완전히 접었던 임씨는 요즘 봉사 활동을 통해 비로소 본업을 되찾았다. 우간다에 올 때 세 살이었던 딸 수연 씨는 현재 코카콜라 벨기에 지사에서 근무 중이고, 아들 복기 씨는 미국에서 금융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부인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아프리카에서 지금껏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집사람 덕분”이라며, “나한테는 그 사람이 의사”라는 말로 부인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1984년 4월 20일 수술후 실을 뽑는 광경. 환자의 순진한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우간다에 살 때부터 서울에서 배추, 무, 상추 등 온갖 채소 씨를 공수해 와 직접 농사를 지었어요. 서울에서는 간호사였는데 여기서는 농부가 된 거죠. 농약 같은 건 구경할 수도 없는 곳이니 직접 풀 뽑고, 벌레 잡으며 그렇게 무공해로 키운 채소들로 한국식 식단을 차려 주었어요. 그만한 보약이 어디 있어요? 아이들에게도 한국에서 보내 준 동화책을 밤마다 읽혀 우리말과 영어를 둘 다 능숙하게 하도록 만들었지요. 이제는 아이들 다 키워 내보냈으니 봉사 때마다 같이 갑니다. 결혼할 때만 해도 친구들에게 ‘의사와 결혼했으니 너는 이제 팔자 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사람인데 아프리카에 와서 평생 고생만 시킨 것 같아 참 미안해요.”

부와 명예를 누리는 의사들이 부러울 때가 왜 없으랴, 하지만 그는 이제 절대적으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스와질란드의 가난한 환자들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무의촌 사람들이 그를 위해 준비한, 위생과는 거리가 먼 식사도 맛있게 먹는다. 그 때문에 설사로 고생한 적도 여러 번 있지만 가난한 살림에도 정성껏 먹을거리를 준비한 그들의 마음을 외면하기 어려워서다.

“사명감은 본래부터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다 이것이 내 사명이라고 느끼는 순간에 시작된다”는 민병준 박사. 아프리카에서 내가 할 일을 찾았을 뿐,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그의 말이 오래도록 마음을 울렸다. 그저 조용히,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스와질란드 국민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겠다는 말과 함께.

사진 : 이창주
사진제공 : 민병준
  • 2009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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