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부부가 산골에서 부치는 편지 (24) | 숲골짜기 할머니들 (1)

글 : 이상희 

그림 : 원재길
“바쁘지? 그래, 얼마나 바쁠까!”

이웃 할머니들하고 마주치면 으레 이런 말씀을 듣곤 합니다. 그 인사말에는, 내가 집을 자주 비우는 편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형편과 처지를 알고 있으니 민망해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으니까요.

오늘도 흙집 옷장에 보관된 겨울 외투를 꺼내러 뜰을 가로지르는데, 우씨 할머니가 다리 건너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뭔가를 갈무리하다가는 나와 눈이 마주치길 기다렸다 그렇게 소리쳤습니다.

“하는 일도 없이 그러네요. 잘 지내시지요? 방은 따뜻하세요?”

내가 늘 둘러대는 궁색한 변명을 중얼거리며 다가가니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어머님 안부를 묻습니다.

“그럼, 나야 잘 지내지…. 어머닌 언제 또 오시려나? 그 어머니는 만날 ‘우리 며느리가 애 많이 쓴다’고 그러시지.”

‘그러니 부디 곱게 봐주시오,라는 것이 우리 어머님의 청이지요?’ 하는 말은 눈으로만 건네고 나는 할머니 곁에 쪼그리고 앉아 대답합니다.

“한동안 어머님이 꼼짝 못 하실 거예요…. 저희 딸아이 치다꺼리하느라고요.”


입시생 딸이 수능시험 치르자마자 실기시험 대비하러 서울로 떠나 할머니 댁에서 지내고 있는 참입니다. 할머니는 ‘참, 그런다고 했지’ 하는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는 만사 제쳐놓고 잠시 빈둥대기로 합니다. 벌써 서너 번 들었던, 할머니 시집올 때 이야기며, 호랑이바위 이야기를 또 듣게 되길 바라면서요.

우씨가 아닌데도 우씨 할머니로 불리는 이 할머니는 세상의 할머니들이 다 그렇듯, 우씨한테 시집오면서 ‘우씨네 새댁’이 되었고 ‘우씨 아줌마’가 되었다가 ‘우씨 할머니’가 되었지요. 그러나 처음엔 우리 식구에게 ‘호박 할머니’였습니다.

이 깊은 산속에 땅을 사 놓고는 세 식구가 주말마다 들락날락하던 때였어요. 한번은 아침 일찍 들어갔더니 지금은 텃밭이 된 곳에서 할머니 한 분이 허리를 꺾은 채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다가가자 대단히 겸연쩍은 얼굴로 묻기를, 이 땅이 팔릴 줄 모르고 호박을 심었는데 그냥 가꿔 먹어도 되겠느냐고 말이지요.

그 뒤로 우리는 호박을 두어 개씩 얻어 갖는 행운에다 우리 땅에서 일어났던 옛일을 듣는 횡재마저 누리게 되었지요. 할머니는 해방 전에 이 숲골짜기로 시집왔는데, 다름 아닌 바로 우리 땅, 바로 그 호박 심은 자리에 있던 집으로 꽃가마를 타고 왔다는 거예요.

할머니는 읍내에 볼일 보러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팔 하나가 잘못되어 신경이 마비되었어요. 할머니가 움직일 때마다 그 팔이 제멋대로 덜렁거리는 걸 보는 게 여간 마음 아프지 않았는데 지금은 무연해졌습니다. 남은 팔 하나로도 밥 지어 잡숫고 빨래하고 김매고 도토리 줍고 고추 널고…. 지난해 세상 떠나기 전까지는 온종일 누워 계시던 할아버지 병수발도 거뜬히 해내셨으니까요.

우씨 할머니네 논은 우리 집 뒤뜰 뒤편 높다란 데 있는데, 시내에 사는 둘째 아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일요일마다 와서 농사를 짓지요. 주중에는 할머니가 매일 아침마다 논물이며 벼가 잘 자라는 걸 살피러 논에 올라 다닙니다. 그 논 바로 위쪽이 사시사철 물이 흘러, 우리가 산에 올라갔다 내려올 때마다 들르는 계곡이지요. 어느 여름에는 남편 혼자서 거기 바위에 앉아 윗옷을 벗고 땀을 식히고 있는데, 할머니가 한 팔로 논에 물을 대느라 애쓰는 게 보여 얼른 내려가 거들었더랍니다. 그 뒤로 할머니는 그 일을 거듭거듭 얘기하곤 했지요.

“작가 양반 아니었으면 우리 벼가 다 말라죽었지. 한 팔로 물을 못 끌어다 대서 우두커니 섰는데, 저 양반이 목욕하다 말고 달려오는 거야. 어찌나 고맙던지…. 목욕하다 말고,”

남편 얘기로는 그저 시원하게 조금 벗고 있었다는데도 할머니에게 그리 보였던 모양입니다.

할머니는 커다란 집에 혼자 삽니다. 밤이 되면 무섭다는 얘길 듣고, 남의 집 잠 안 주무시는 어머님은 꼭 하룻밤 그 댁에 가서 주무시고 옵니다. 두 분은 그냥 주무시지 않고 마늘을 까기도 하고 밤늦도록 텔레비전을 틀어 놓은 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기도 한답니다. 어머님 못 오시는 한겨울 어느 밤엔 나도 하룻밤을 그래야겠다, 생각합니다.
원재길ㆍ이상희씨 부부는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산골에서 고등학생 딸 새록과 살면서 시와 그림책을 씁니다.
  • 2009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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